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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일을 위하여 (수 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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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하여 (수 7:1-15) 

 
퓰리처상을 받은 유명한 종군기자 중에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 30세의 나이로 한국 전쟁에 종군하면서 취재한 여기자입니다. 지금은 워싱턴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만 그녀의 취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작전을 하는 중에 포위를 당해서 아주 절망 속에 있는 미 해병 중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얼어붙은 콩 통조림을 따먹고 있는 한 병사에게 “만일 내가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내게 어떤 소원을 구하겠습니까?”라고 물었고 그때 그 병사가 슬픈 얼굴로 했던 대답이 유명하게 전해집니다. “Give me tomorrow!”,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이 대화가 아주 유명한 얘기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다는 내일이 있다면 지금의 이 어려움도 이기겠다는 것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지치는 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미래가 보장되기만 한다면 현재의 고생은 문제가 안 됩니다. 지금 무슨 고생인들 밝은 미래만 있다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미래가 암울할 때 현실도 고통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실망도 큰 법입니다. 앞날에 대한 불안 때문에 현실에 말할 수 없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고3인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힘겨워하는지 아십니까?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몇날 며칠 밤을 새우는 것쯤은 충분이 감당하겠다는 심정입니다. 잠을 자지 않고 공부를 해도 모두가 대학에 들어간다는 소망이 밝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그 소망이 점점 어두울수록 지쳐갑니다. 의욕도 떨어집니다. 그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마도 밝은 내일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밝은 내일이 있다면 오늘 인생을 한 번 걸어볼 만합니다. 그 소망이 있다면 내일을 위하여 오늘 할 일을 거뜬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오늘 실패 했더라도 내일 성공이 보장 된다면 내일을 기다려볼만하지 않겠습니까? 

내일이 있다는 것은 분명 소망입니다. 내일이라는 날은 분명히 희망의 날이요, 오늘 보다 나은 날이기에 기다려야 합니다.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반성하고 정리하고 오늘의 실패를 내일의 승리를 위한 초석으로 삼는 것이 가장 중요한일일 것입니다. 오늘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내일을 위하여 충전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경건과 거룩함이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훈련 받게 됩니다. 긴 훈련 후에 지도자 모세는 세상을 떠났고 후계자 여호수아의 인도로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됩니다. 

요단강을 건너 맨 처음 만나게 되는 큰 성 여리고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사하며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서 다음에 있는 조그마한 아이 성을 공격하게 되는데 작은 성이라서 많은 군사가 갈 필요가 없이 이삼천 명만 보냈더니 전쟁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위기 중에 위기입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웠으면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장로들과 함께 하루 종일 하나님의 법궤 앞에 엎드려서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는 겁니까? 차라리 우리를 요단 저쪽에 놔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하고 울고 있겠습니까?

이때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십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이렇게 징징대며 푸념하고 원망만하고 있다고 일이 해결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전쟁에 패한 원인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라고 정확한 원인 규명을 해 주십니다. 

그 내용이 1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여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러시면서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위기 관리능력을 상실하여 절망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내일을 위하여~” 라는 소망을 주십니다. 오늘로 끝이 아니라 내일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패배의 원인은 너희 속에 있다. 거룩의 문제요, 도덕성의 문제요, 진실의 문제요, 나아가 신앙적 문제라”고 하나님은 지적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아간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아간이 지금 지은 죄가 뭡니까? 전쟁 통에 좋은 외투를 발견합니다. 불태워버리기 아까운 옷입니다. 또 거기에 은 200세겔이 있이 있습니다. 버리기 아까운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금덩이 하나가 또 있습니다. 이걸 보는 순간 ‘감춰놨다가 전쟁 다 끝난 다음에 꺼내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아마 우리들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아깝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선민의 논리로 볼 때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금덩이 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어야 했고, 고급외투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의지해야 했단 말입니다. 욕심과 탐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속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도둑질이요, 나쁜 짓인 줄 스스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남을 속이거나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정죄하지 않으면 이 속인 일은 영원히 숨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완전범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사건이 있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초대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부부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서 땅을 판 돈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결심하고 땅을 팔았는데 팔고 보니까 그 돈이 너무 많고 아까운 겁니다. 

그래서 반을 감춰놓고 나머지 반만 가지고 베드로 앞에 갖다 놓았는데 이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땅 판 게 전부냐?”하고 물을 때 “사실은 아닙니다. 반은 놔두고 반만 가져왔습니다.”라고 솔직히 말했더라면 문제가 없는데 “네, 이게 답니다.” 그랬다가“어찌하여 성령을 속이느냐?”라는 한마디에 죽어버렸습니다. 부부가 똑 같이 그러다가 죽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안 바치고 사는 사람도 많은데 바치려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생각엔 안 바치는 사람보다 반이라도 바치는 게 백번 낫다는 생각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거짓말 때문입니다. 속인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초대교회를 세우려는데 용납되지 않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것과 오늘 아간의 범죄가 같은 맥락입니다. 아간이 이걸 속이고, 숨긴 것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언제나 진실이 먼저입니다. 잘 살고 못 살고, 능력이 있고 없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그게 먼저가 아닙니다. 얼마나 진실하냐가 먼저입니다. 거짓말하고 성공하면 뭐합니까? 남의 등을 쳐서 잘 살면 그게 편한 것입니까? 그래서 진실이 먼저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 정직함이라고 하는 것도 생각을 해 봅시다. 정직 역시 잘했나 못했나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진실을 묻는 겁니다. 

투명성이라는 것은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게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느냐 이것을 묻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윤리와 도덕의 기본입니다. 심지어는 경제의 기본이고요, 정치의 근본입니다. 이것이 빠져나가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숨은 죄가 문제입니다. 차라리 드러난 죄는 다른 사람들도 알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면 어느 정도 예방도 할 수 있습니다만 숨어서 활동하는 죄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어느 한순간 누룩처럼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숨기려했던 아간의 죄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큰 죄였습니다. 

여러분, 왜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정직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는지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어려운지 어렵지 않은지는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왜 어렵게 사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또한 왜 부자로 사느냐고 트집 잡지 않으십니다. 다만 왜 정직하지 않느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십일조의 기준을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십일조를 하느냐, 적은 십일조를 하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정직한 십일조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정직의 문제, 진실의 문제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어차피 다 드러날 일입니다.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진실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망의 내일, 희망의 내일을 바란다면 오늘 마땅히 정직해야 되고, 당연히 진실해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정직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곧바로 심판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내일이 영영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영원히 죄인으로 남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일을 주신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용서하신다는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실패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바로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내일이라는 시간을 주실 때에 그 내일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오늘 결단해야합니다.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거룩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거룩하게 되기를 기다리고서야 내일을 주실 지도 모릅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아간의 범죄로 인한 이 문제를 해결하고서야 이스라엘이 아이 성을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희망이 무엇입니까? 점령해야할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하지만 그것을 위하여 오늘 스스로 거룩하게 해야 내일을 보장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내 욕심을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실 때 그것을 제하여버릴 수 있다면 내일이 올 것입니다. 오늘 내 거짓과 불신앙을 다 멸하여 버릴 수 있을 때 내일은 주어질 것입니다.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배려가 있고, 진심이 들어 있는 이 말씀에 깊이 귀 기울일 수 있는 우리 해성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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