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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직도 사사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삿 17:6,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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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사사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삿 17:6, 21:25) 
 

1.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

全北大 강준만 교수가 지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쿨 에너지』라는 책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대에 뒤처진 사람, 평균적인 사람,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요?

어떤 분이 “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그 이유로 요즘 나오는 노래도 잘 모르고, 영화관에도 잘 안가고, 음식 맛이 뛰어난 서울의 신촌이나 명동에 잘 가지를 않아서 유행에 뒤처지는 거 같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떤 가요가 유행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올 들어 영화관은 몇 번이나 가보셨습니까? 맛난 집으로 소문난 음식점은 몇 곳이나 알고 계시며 그 중에 가보신 곳은 몇 곳입니까? 

저도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 목회자들이 새로 나온 스마트 폰, 즉 ‘아이폰4’이나 ‘갤럭시S’ 등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런 스마트폰을 이용한 ‘목회 세미나’까지 열리고, 또 그런 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홈페이지와 교인 심방을 관리하는 등 난리인데, 저는 아직도 2년 전 폰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를 보고 어느 목사님 왈, “아니 진 목사 폰 언제 바꿀 거야?”합니다. 남성들도 필요하면 화장을 하고 화장으로도 안 되면 성형을 하고, 그리고 가정과 직장에서 컴퓨터를 이용하여 유비쿼터스 시대에 적응하는 것 …, 이렇게 사는 것이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여러분은 시대에 잘 적응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저처럼 뒤처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과 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을 전혀 색다른 기준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도 그런 기준을 제시하는데요. 그렇다면 사사기가 말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과 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2.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17장~21장)

1) 사사기, 사사시대

‘사사’란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이스라엘 왕정 시대가 시작되기까지 ‘재판관’ 또는 ‘최고 지도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사사기’는 그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의 이스라엘의 형편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주된 특징은 ‘이스라엘의 타락-하나님의 징벌-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주기를 가지고 7번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서론 부분인 1장부터 3장 6절까지는 사사시대가 이렇게 범죄와 징벌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 29절부터 36절에 보면, 여호수아 살아생전부터 시작된 가나안 정복 사업이 더 이상 전진되지 못하고 그대로 멈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적들과 동거를 하고 있었다는 말인데요. 이것은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정복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 그래서 하나님께서 멸하라 하신 원주민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남겨놓은 적들이 나중에 가서는 이스라엘을 찌르는 가시가 되고, 이스라엘을 불태우는 불씨가 되어, 결국 사사시대 전체가 불행하게 되었다는 것이 서론 부분에서 일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가 불행의 연속인 두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체적인 죄 때문인데요. 그것은 이방인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과 함께 했을 뿐 아니라, 이방인과 혼인하며(3:6a),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며(3:6b), 그리고 후손들에게 하나님 신앙과 말씀 교육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2:10). 

이렇게 서론이 기록된 후, 3장 7절부터 16장까지에는 옷니엘(3:7~11), 에훗과 삼갈(3:12~31), 드보라(4~5:16), 기드온(6~8:32), 돌라와 야일(9~10:5), 입다(10:6~12), 삼손(13~16) 등의 사사들을 중심으로 7주기에 걸쳐서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범죄와 하나님의 징계, 그리고 구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17장부터는 다시 한 번 더 이스라엘이 그렇게 불행한 세월을 수 백 년 동안 보낸 원인을 신앙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으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사사시대가 어두운 시대였던 이유

자! 그렇다면, 사사기 17장부터 21장이 말하는 사사시대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였던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➊ 첫째로 17,18장은 신앙적인 타락의 실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장에는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던 미가라는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사사시대 초기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러니까 사사기 후반부에 기록되었다고 사사시대의 후반부가 아니라는 것이죠. 사사기 저자는 사사들에 대한 기록을 한 후, 사사시대가 왜 그렇게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였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사시대 초기에 있었던 한 사건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어느 날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렸습니다. 은 일천일백이면 당시 기준으로 노동자 10년 치 월급에 해당하는 상당한 액수입니다. 요즘으로 환산하면 약 4,5억 되지 않을까요? 이 거금을 도둑맞은 미가의 어머니는 화가 나서 그 돈을 훔쳐간 사람에 대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천금같은 내 돈 훔쳐간 놈, 벼락을 맞아 죽을 놈, 急煞할 놈, 染病할 놈! 돈 한 푼 쓰지 못하고 팍 죽어버려라.’ 아마 이런 식의 저주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는 미신적인 사고가 지배적인 때인지라, 어머니의 입에서 이런 저주의 말들을 들은 미가는 겁을 집어먹었고, 곧바로 자신이 그 돈을 훔쳐갔노라고 실토했습니다. 시치미를 뚝 잡아 떼려고 했는데, 어머니의 저주가 너무나 살벌한지라 실토를 한 것입니다. 홀어머니의 돈을 훔쳐간 미가도 미가지만, 그렇게 자신이 훔쳐간 것을 인정하고 그 돈을 가져 온 아들을 기특해하는 그 어머니도 대단합니다. 돈을 돌려준 아들을 향해 조금 전까지 저주하던 입술로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하면서, 그 돈에서 얼마를 따로 떼어서 아들을 위해 신상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17:3). 일종의 감사헌금이라고 볼 수 있는데, 웃기는 것은 말로는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린다”고 하면서 정작 그녀가 한 일은 우상을 만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과 우상숭배가 뒤죽박죽 뒤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장 7절에 보면 베들레헴에 살던 한 레위인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떠돌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미가의 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레위인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주지를 떠난 것도 당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무시당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거기다가 그렇게 자신의 기업을 떠나온 이 레위인에 대해 미가는 자기 집에 함께 거주하면서 자기 집을 위하여 제사장이 되어달라고 제안합니다. 연봉은 ‘은 10’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레위인이라고 해도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아론의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설사 제사장이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聖殿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개인이 사사로이 만든 우상을 그 집에서 섬기는 제사장이 된다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미가는 먹고 살 곳을 찾아 떠돌던 한 레위인 청년을 자기 집의 제사장으로 고용하여 그럴듯한 옷을 입혀서 제사장으로 세우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7장 13절,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여러분, 이런 일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변질되어 우상숭배와 혼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합된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그들이 아무리 입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불러도 만든 것은 우상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17장 6절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즉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자기들 좋은 대로 한 것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인지를 귀가 따갑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고 말았을까요?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에 관심이 더 많았기 때문이고, 결국 그들이 추구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관심이 세상에 쏠리지 하나님의 말씀에 갔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라고 하셨어도 말씀은 관심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자신이 옳다고 여긴 방식대로였고, 그 마저 알고 보니 세상의 방식이요 우상숭배 방식이었다는 것이죠.

18장은 사사시대의 신앙적인 실상의 두 번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 지파는 분배받은 땅을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섯 명의 대표를 보내어 남의 땅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이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이르러 미가의 집에 유숙하게 됩니다. 미가의 집에 제사장으로 있던 레위 청년이 이들을 만나서 그들의 길이 형통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레위 청년의 말대로 그곳을 떠나 라이스라는 곳에 이르러 그 땅이 정말 좋은 땅이라는 것과 라이스 사람들이 너무나 착한 사람들이라 만만하게 보여 자신들이 그것을 쉽게 빼앗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에 단 지파는 곧바로 6백 명의 무장 군인을 파견하여 그 땅을 치러 올라갔고, 가는 길에 미가의 집에 들릅니다. 정탐할 때 미가의 집을 들렀던 사람들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 이유는 이곳에 들렀다가 라이스 땅을 발견했기 때문에 미가 집의 우상들이 상당히 신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레위 청년이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고 따지자, 그들은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며 “한 집의 제사장으로 있는 것과, 한 지파의 제사장으로 있는 것, 어느 것이 낫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결국 레위인 제사장은 단 지파의 제안에 동의하여 미가의 집 우상들을 가지고 그들을 따라나섰습니다. 이를 안 미가와 이웃 사람들이 뒤쫓아 와 따지자 입을 닥치지 않으면 삼족을 멸하겠다고 협박하여 돌려보냅니다. 그러고 나서 단 지파는 라이스로 가서 그곳 백성들을 沒殺시킨 후 그 성읍을 차지했습니다.

18장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군사들로 위협하여 미가의 집에 있는 우상을 강탈합니다. 또 평화롭게 살던 라이스 사람들을 몰살시키고 그 땅을 빼앗습니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은 정복하지 못했으면서, 정작 동족의 것을 강탈하고 또 평화롭게 살던 라이스 사람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여 그 땅을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강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자 앞에서는 잔인해지는 비열한 모습입니다. 이런 단 지파 사람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신봉한 것은 하나님도 그 말씀도 정의와 진실도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욕망과 목적을 위하여 힘을 숭배했을 뿐입니다. 즉 그들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힘”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그들은 가장 불행한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➋ 사회적인 타락(19~21장)

19장에는 더 기막힌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한 레위인이 부인 외에 첩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첩이 불륜을 저지르고는 남편을 떠나 친정으로 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레위인은 그 첩을 데리러 처가로 갔습니다. 이런 사위의 모습에 첩장인이 감동하여 며칠간 붙잡아놓고 극진하게 대접을 했습니다. 며칠 후, 레위인이 첩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길을 가던 중, 해가 저물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서 한 노인의 집에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몰려와서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는 레위인을 끌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동성애를 즐기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주인 노인은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면서 대신 ‘자신의 처녀 딸과 남자의 첩을 내보낼테니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지만, 불량배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어디선가 본 모습이지 않습니까? 바로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성과 꼭 같습니다. 소돔 성을 방문한 천사들에게 소돔 사람들이 몰려와 “(그들을)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고 했었지요(창19:5). 

따라서 사사기 19장에서 베냐민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결국 이스라엘 역시 극도로 타락했던 소돔성 사람들과 똑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그 레위인의 행동은 더 기가 막힙니다. 19장 25절,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자기 첩을 붙잡아 불량배들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간음을 저지르고 친정으로 가버린 첩을 그렇게 공을 들여 데려 올 때는 언제고, 이렇게 불량배들에게 흔쾌히 내어준단 말입니까? 

그 여인은 불량배들에게 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을 것입니다. 어떤 여인이 순순히 불량배들에게 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남편이라는 작자가 자기 살겠다고 자신의 첩을 불량배들이 있는 밖으로 강제적으로 내보냈습니다. 정말 무정한 사람입니다. 불량배들은 밤새도록 그 여자를 유린한 후 새벽이 되어서야 놓아주었습니다. 동틀 때쯤 여자는 노인의 집으로 겨우 기어와 문 앞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히는 것은 19장 27절에 있는 대로, 그 레위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연 이유는 자기 혼자 떠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첩이 문에 엎드려져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첩이 밤새도록 윤간을 당하고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밤새 잘 잤고, 아침이 되자 첩의 생사는 개의치 않은 듯 혼자 떠나고자 했습니다.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첩을 맞이했다면 목숨만은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렇게 비극적으로 죽었고, 그제야 그 레위인은 기브아 불량배들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노의 표현이 또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첩의 시체를 열두 토막 내어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으로 보낸 것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시신을 토막내어서 각 지파로 보낸단 말입니까? 정말 이기적이고 잔인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지켜야 할 법, 자신이 지켜야할 가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무기력하게 대처하다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무시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흥분하고 분노하게 만들어 결국 이스라엘 전체를 서로 죽고 죽이는 內分으로 몰아가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겸손히 자기를 돌아보았다면, 자신의 비겁함에 대해서 분노하고 부끄러워했다면, 비극은 그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소견대로 행한 결과는 이스라엘 전체의 불행이었습니다. 

20장, 이스라엘 전 지파가 미스바에 모였고, 그 중에서 칼을 빼는 자는 40만 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레위 사람으로부터 일의 자초지종을 들은 후 베냐민을 징계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먼저 그들은 베냐민에 사람을 보내어 그 불량배들을 넘기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겠다는 생각에서 였습니다(20:13).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그것을 거절했고, 오히려 공세적으로 나와 군사를 일으켜 대항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열 한 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1, 2차 전투에서는 베냐민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전투에서는 연합군이 이겼습니다. 그 싸움으로 베냐민 군사 2만 6천 명 중 2만 5천 백 명이 죽었습니다. 겨우 6백 명이 살아남아 광야로 도망을 쳤고, 이스라엘은 베냐민의 성읍으로 들어가 사람들과 가축까지 모두 죽이고 성읍들은 불태워버렸습니다. 광야로 도망친 6백 명을 제외한 베냐민 지파의 모든 남녀노소가 학살당한 것입니다. 본래 한 가족이었고, 같은 백성이었던 그들이 어쩌다가 이처럼 끔찍한 비극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까? 베냐민 지파가 자기 지파의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범죄자들을 내어 놓았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 묵인하고 관용한 결과는 지파의 몰살과 이스라엘의 불행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베냐민을 없애자고 한 것도 하나님과 무관한 자기 소견대로 한 것이었고, 그 이스라엘 연합군에 맞선 베냐민 역시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서 그 일을 해결하려 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감정대로, 자기 생각대로 행한 결과 이런 비극이 일어난 것이죠. 

21장 1절을 보면, 그렇게 베냐민을 없애고서도 분이 풀리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고 맹세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흥분이 가라앉자 그들은 벌어진 일들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자기들이 자기 생각과 감정대로 행하여 이런 일을 벌여놓고는 이제 와서 후회하고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 뜻대로, 자기 방식대로, 자기감정대로 행하여 문제를 키워놓고는 뒤늦게 후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이스라엘은 멸문의 위기에 처한 베냐민 지파를 되살려야겠다고 방향을 수정했습니다. 그럴려면 우선 살아남은 자들을 짝을 지어주어야 하는데 문제는 아무도 그들에게 딸을 주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는데, 지난번 미스바에 온 이스라엘이 모였을 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그 총회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과, 소집에 응하지 않은 책임을 묻는다는 명목으로 길르앗 야베스에 군대를 보내어 남자와 결혼한 여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미혼 처녀들만 살려 400명을 얻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는 것이 하나도 예외가 없이 정말 어리석고 기가 막히고 잔인합니다.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습니까? 

정말 기준도 법도 양심도 없이 제 멋대로 입니다. 잘못된 맹세를 해 놓고서는 그 맹세를 지키고자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처녀들만을 데려와서는 베냐민 남자들과 강제로 결혼을 시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을 기뻐하실까요? 부모와 가족들을 다 잃고 아내감으로 팔려온 길르앗 야베스 처녀들의 슬픔과 아픔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고도 여전히 200명의 처녀가 부족하자, 또 방안을 내는데, 그 역시 당혹스럽습니다. 당시 실로에 언약궤가 있었고 매년 실로에서 여호와의 명절 축제가 열렸습니다. 이때 실로의 처녀들이 춤을 추러 나오는데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각자 처녀 한 명을 붙잡아가서 자기 아내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실로의 처녀들은 여호와의 명절을 맞이해 기뻐하며 춤을 추다가 아닌 밤 중에 날벼락처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붙들려 그와 결혼해야 하는 일을 당한 것입니다.

25절은 이러한 실상에 대해 결론을 내립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호와 신앙을 제 마음대로 우상숭배와 뒤섞어서 이상한 종교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소돔 성처럼 음란하고 부패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갈등과 다툼과 전쟁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시대였습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무자비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렇게 된 이유는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왕은 국가의 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에 왕이 생겼을 때 이스라엘이 변했거나 이스라엘의 내면의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사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진정한 왕으로 모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 백 년 이어진 이스라엘의 불행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3) 아직도 사사시대인 이유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가 사사시대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그때보다 더 하나님이 없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이지 않습니까? 성범죄자를 전자발찌로도 제어할 수 없습니다. 거대 기업들의 부정과 비리는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권력형 비리는 여전합니다. 에이즈에 감염된 10대 소녀가 수많은 남성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그렇게 돈을 버는 것에 대해 스스로 합리화했다고 합니다.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같은 동네에 사는 모녀를 살인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열 세 살짜리 아이가 부모와 일가족을 불태워 죽였습니다. 정상적인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인간들이 온갖 변태적이고 이상한 쾌락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말하는 “불의, 추악, 탐욕, 가득 찬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가득 찬 악독, 수군거림,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롬1:28~32).” 등의 온갖 죄들은 점점 더 늘어가고 심해져 갑니다. 

이것은 시대적인 현상만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도라 하면서 불신자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회자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 평신도들에 대해, 이제 어느 누구도 세상과 다른 잣대를 갖다 대지 않습니다. “그들도 인간이다!” “그들도 별 수 없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이 시대에 여러분들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좋은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시대를 앞서 가는 것은?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시대에 뒤처진 삶”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사기가 시대에 뒤처진 또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시대에 뒤처진 삶에 대해 사사기가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 생각과 주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입니까? 그렇게 사는 것은 수백 년 전 사사시대 사람들과 꼭 같기 때문입니다. 베냐민 사람들의 모습이 그들보다 수백년 앞서 살았던 소돔 사람들과 같았던 것처럼, 오늘날 사사시대 사람들처럼 자기 소견대로 사는 것은 그만큼 시대에 뒤떨어진 삶이라는 것이죠. 세상에서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을 주관이 뚜렷하고 주체성 있고 줏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게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멋있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관만 내세우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서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이 왕이시라면 그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면서 그 왕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지, 어떻게 그 왕 앞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사사시대 눈에 보이는 왕은 없었지만 영원히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왕으로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시대 사람들은 왕이 없다는 핑계로 그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갈 길인가를 묻지 않고, 자신에게 편하고 좋은 대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가족들과 이웃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상관하지 않는 생각 없는 세대였습니다. 그들을 통치하는 왕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는 혼란으로 어두워지고 말았던 것이죠.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의 왕입니까? 여러분은 누구의 통치하에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여러분이 절대복종해야 하는 유일한 분이심을 이 시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순종합니까? 추상적으로 주님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과 가정과 교회에 주신 왕의 메시지로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따르는 그 사람에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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