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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쌓을 곳이 없도록 (말 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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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을 곳이 없도록 (말 3:7-12)


한 꼬마가 있었습니다.
상쾌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발걸음도 가볍게 주일학교에 늦지 않도록 종종 걸음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기분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께서 예물을 드리도록 늘 주시던 동전 이외에 덤으로 또 하나의 동전 더 주셨기 때문입니다.
덤으로 주신 또 하나의 동전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이것저것 즐거운 궁리를 하다 보니 어느덧 시냇가에 당도했습니다. 그런데 운 나쁘게도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흐르는 시냇물을 건너다가 아차! 실수하는 바람에 동전하나를 그만 물속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꼬마가 스스로에게 한 말인즉 “하필이면 예물드릴 동전이 물에 빠졌을까?”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맹랑한 꼬마가 아닙니까?

자신의 실수로 두 개의 동전 중 하나를 물에 빠뜨렸으면 우선순위로 보건대 남아있는 동전은 당연히 본래의 목적대로 예물을 드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 맹랑한 꼬마의 영악스러운 모습 속에서 우리는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고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모면해 보고자 변명하고,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던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며 찾아 오셔서 질문하시는 하나님께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그 여자를 제게 주셨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은즉 그 첫 번째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예전에는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라고 노래라도 했다지만 지금은 돈 없으면 전혀 살 수 조차 없는 그러한 때입니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평가가 되는 그런 시대입니다. 이제는 돈이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죄악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도 한 때는 너무도 허기진 세월을 보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쌀밥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던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세대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고 할 정도입니다. 오늘의 세대는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쌀밥조차 먹어보지 못한 그런 세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청년 실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일자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내 마음에 들지 않고 그 일이 별로 돈이 안 되고 그 일이 힘들고 더럽고 위험하기 때문에 안 하려고 해서일 뿐입니다. 그냥 쉽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몇 푼 받아 살망정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합니다. 수고는 조금하고 대가는 많이 바라는데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남들이 하는 일 보면 별로 힘도 안 드는 일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해 보십시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너희가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먹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처럼 거저먹는 자리는 없습니다. 설사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해도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쉽게 얻은 것은 우리 삶에 결코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잠시는 기쁨인 것 같으나 곧 그것이 고통으로 바뀌는 것을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을 때 가장 평안함을 얻듯 우리들 역시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험한 풍파가 몰아친다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아무 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 제자들 가운데 여러 명이 갈릴리 바다의 어부 출신입니다. 누구보다도 갈릴리 바다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능숙한 뱃사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자마자 배 고물을 베고 잠이 드셨습니다. 한데 이상하게도 바다에 풍랑이 일기를 시작합니다. 

누구보다도 갈릴리 바다를 잘 아는 제자들이 아무 말도 없이 배를 띄웠던 것은 그들의 경험으로 보아 아무런 풍랑도 없을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의 경험에 따른 예상은 잠시 후에 엄청난 재난으로 그들에게 다가왔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이 풍랑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압니다. 온 바다가 다 뒤집어지는데 거기에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배를 육지에 대려고 기를 썼지만 이미 그들의 그 어떤 수고로도 배를 안전한 곳으로 가져다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데 놀랍게도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어떤 풍랑으로도 예수님을 깨울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풍랑 속에서 온통 배가 뒤흔들리는데도 여전히 주무실 정도로 예수님은 오히려 평안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했으면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면서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했겠습니까? 하지만 제자들 모두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러한 풍랑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고개를 숙입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따라서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러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될 때 우리에게 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저주받은 삶입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물론 사탄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거침돌을 펼치시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주 단정적으로 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너희가 저주를 받았노라고 그 이유가 너희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둑질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돌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복을 누리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도둑질한 것을 하나님께 갚아드려야 마땅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절도 잘하기로 유명한 남자와 소매치기 잘하는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산모가 병원엘 가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기가 손을 꼭 움켜쥐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손을 펴 보니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 간호사의 반지를 훔쳐 쥐고 나왔다고 합니다. 물론 꾸민 이야기이지만 세상이 얼마나 험한가를 풍자한 얘기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목회자요 설교자였던 스펄전은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하고 내가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요,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은 것도 도둑질하는 것이요, 주일 지키지 않는 것은 주일 도둑놈이요, 예배 시간에 예배하지 않은 것은 예배 도둑놈이요,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가로채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도둑놈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일조와 봉헌물이라고 하면 당연히 물질의 십일조만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시간의 십일조를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권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형편을 한번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모이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자고 말씀하고 있건만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주일 예배 한 번 드리기조차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땅히 드려야 할 공예배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많은 시간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루의 십일조로서 새벽의 첫 시간을 드리기를 원하고 한 주간의 십일조로서 주일 예배를 온전히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니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예배하는 자세가 과연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는데 과연 그렇게 예배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루의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건강의 복을 주십니다. 주일을 성수하면 범사가 잘 되게 하십니다. 
보십시오. 욥기에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또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건강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필요한 재능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요 그 일이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막으시면 되던 일도 안 되는 겁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다음 제자들에게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녁나절 배에 오른 제자들이 새벽 4시가 되기까지 그저 바다 한 가운데서 끙끙거리고만 있습니다. 그것은 풍랑이 그들의 길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평소라면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가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풍랑 가운데서는 이야기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서 순적하게 우리의 길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시작은 미약해도 나중은 창대하게 되는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칭찬받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누가 나를 향해서 수고했다고 또는 잘 했다고 아니면 고맙다고 한 마디 해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내가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질은 또 어떻습니까? 다른 무엇보다 십일조라고 하면 우리는 먼저 물질의 십일조부터 떠올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상하게 십일조라는 말만 나오면 귀를 닫아 버립니다. 그리고는 무슨 교회가 무슨 목사가 돈 밖에 모른다고 비난을 하면서 교회를 떠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맘몬주의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주인이 벌써 돈이 되어버린 사람입니다. 돈이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이를 통해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실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내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학개서의 기록대로 우리가 아무리 많이 모아도 하나님이 불어버리시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쌓아 주시면 그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일정 부분을 하나님의 영역으로 아주 구분을 지으십시오. 물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다 하나님의 영역 아래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하루의 십일조로서의 첫 시간 그리고 한 주간의 십일조로서의 주일 예배와 모든 공예배 아울러 물질의 십분의 일은 아주 하나님의 영역으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으로 아주 구분해 놓으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 바로 서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저주였다고 해도 이제부터는 복으로 모든 것이 바뀌게 되는 귀한 은혜의 삶을 우리 모두가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온전한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린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마중물의 원리를 잘 압니다. 마중물의 원리는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입니다. 우리가 받고자 하는 대로 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의 창고에 들이라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땅에 심는 씨앗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쯤 농가의 처마 밑에 보면 매달아놓은 옥수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옥수수들은 보통 옥수수들보다 씨알도 굵고 때깔도 좋은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종자이기 때문이요 종자로 쓰는 것은 제일 좋은 것들입니다. 결코 흠이 있는 것은 종자로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제일 좋은 것 그것이 종자의 원리입니다. 마중물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중물로 시궁창 물을 쓰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허드레 물을 마중물로 쓸 수 있겠습니까? 아니잖아요? 제대로 된 물을 사용합니다. 그것도 조금이 아니라 한 바가지 가득 물을 퍼다가 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중물이 바로 십분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하루의 첫 시간 그리고 주일 예배와 삼일 예배가 시간의 십일조라면 또한 물질의 십일조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온전히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봉헌물이 있습니다. 누구는 말합니다. 십일조 헌물만 드리면 됐지 거기에 무슨 이런 저런 헌물들이 그리도 많냐고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십일조와 봉헌물을 너희가 도적질하였다고요. 물론 이 봉헌물 속에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구제와 나눔의 헌물도 당연히 포함이 됩니다. 이 마중물의 원리는 이 모든 규칙을 세우신 분의 뜻대로 입니다. 

당연히 마중물은 물이 나올 때까지 붓는 것입니다. 먼저 붓는 것입니다. 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심는 것입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게 되고 마중물을 통해 보다 많은 물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그 양을 백배 육십 배 삼십 배로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을 필요로 할 때마다 마중물을 들고 나가는 것처럼 해마다 씨를 땅에 뿌리는 것처럼 그렇게 십일조와 봉헌물을 주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약속을 주고 계십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어 우리들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늘 문이 신명기 28장에는 하늘의 보물 창고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그저 시시하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며 예배하면 하나님은 건강과 더불어 범사가 잘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의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리면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고 하십니다. 이걸 바꾸어서 말하면 내가 감당할 만큼 내게 주십니다. 내가 잘 감당해서 섬기고 나누는 일에 힘쓰면 더욱 더 많은 것으로 나누고도 남도록 하나님은 항상 채워주십니다. 엘리야를 공경하며 대접했던 사르밧 과부는 대접하고 돌아서면 거기에 새로운 밀가루가 또 있고 다시 대접하고 돌아서면 또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엘리야뿐 아니라 자기와 아들 모두가 다 먹고도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갑작스럽게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죽음에서 놓아 다시 살아나게 하여주셨습니다. 그건 엘리사를 섬겼던 수넴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수넴 여인이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 아이가 잘 자라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죽게 되었지만 엘리사의 기도를 통해 저가 다시 살아나는 기쁨을 얻게 하셨습니다. 가뭄의 때에는 그 가뭄을 피해 살도록 인도하셨고 다시 돌아와서는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오늘 본문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려움과 근심 걱정 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좀 먹는 일이 없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풍랑을 막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심지어는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우리들이 복되다고 말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런 복된 삶을 함께 누리시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몬태나 주의 빌링이라는 곳에서 기차를 세우고 간단한 연설을 할 때의 일입니다. 두 명의 어린 소년이 경찰의 저지선을 넘어서 앞으로 나와 대통령과 그 부인 그리고 유명한 인사들이 자리한 곳 바로 밑에까지 와서 섰습니다. 그 중의 한 소년이 손에 잡고 있던 작은 미국 성조기를 번쩍 들어서 대통령에게 바치자 부인이 그 국기를 받아 들었습니다. 함께 나왔던 다른 소년은 침울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국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른 자기의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찾아 손에 쥐고는 대통령에게 받쳤습니다. 

그것은 10센트짜리 동전이었습니다. 대통령은 몸을 구부려서 그 소년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후 5년이 지나서 윌슨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품을 정리하던 부인이 대통령의 지갑을 열어 보았더니 지갑의 따로 된 칸에 5년 전에 소년이 드린 선물인 10센트짜리가 종이에 쌓인 채로 넣어져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어디를 가든지 소년이 바친 그 선물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바치는 예물은 주님께서 이처럼 기억하시고 간직하심을 믿으십시오.
아무쪼록 온전한 십일조와 봉헌물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것을 누리시는 성도들 우리의 땅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아름다워지는 귀한 은혜와 복을 받아 누시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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