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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먼저 가정에서부터 (벧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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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정에서부터 (베드로전서 3:1-7)


오늘 읽은 본문의 1-6절의 주제는 ‘아내들이여, 남편들에게 순복하십시오.  순복하되 주 안에서 순복하십시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순복하라는 말씀은‘여자들아 남자들에게 순복하라’는 식으로 남녀의 성차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질서입니다.  특별히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 남편의 아내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로마 시대의 부부사이는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되어 모든 결정에 남편의 뜻을 따라야만 하던 사회였습니다.  남편의 종교는 곧 아내의 종교였고 자녀들도 자동적으로 가장과 동일한 종교를 가져야 하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와 남편보다 아내가 먼저 하나님을 믿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당연히 남편이 아내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심하게는 구박하며 핍박을 합니다.   남편의 권위를 내세워 쏟아붓는 언어폭력에 정신적인 고통을 당할 뿐 아니라 육체적인 폭력까지 당합니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 할머니들께서 얼마나 모진 핍박과 설움을 견디며 신앙을 지켜왔으며, 완고한 남편은 물론 온 집안이 예수를 믿게 된 과정을 간증으로 들으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예배당에 다녀왔다고 시부모와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매를 맞는 것은 물론 성경책을 찢어 아궁이에 던져버리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어떤 아내들은 바깥 출입을 못하도록 아예 머리를 깎이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어른들의 간증은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아픔이고 감동이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폭력으로 나오고 인격을 무시하는 그런 남편에게도 순복하라는 말씀을 하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혹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라도 아내의 선한 행동 때문에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때 우리 할머니들 중에 어떤 분들은 모진 구박과 욕설과 폭행을 당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며 남편과 자녀와 가정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자신을 욕하고 핍박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그 입으로 남편을 욕하지 않고 힘으로 대항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기만을 바라고 참고 또 견뎠습니다. 주일 아침 교회 다녀와 그 모진 곤욕을 치루고도 부엌으로 들어가 남편과 가족들을 위해 정성껏 점심상을 차려 바쳤습니다.  그렇게 희생하고 헌신하신 우리 어른들이 계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편안한 가운데 예수를 믿고 대대로 예수를 믿는 모태신앙 가정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남편들은 아내들이 다른 종교를 가지면 일단 남편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반항으로 여기고 곱게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아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선언한 것은 순종해야 할 아내가 일단 남편에게 불순종한 셈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하신 성경말씀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남편의 권위보다 위에 있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아내의 믿음과 용기를 칭찬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미 남편에게 불복하고 있는 아내가 혹시라도 또 다른 언행으로 남편을 거스리지 말고 순종하라는 충고입니다.  신앙문제로 남편에게 불복하여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순종하라는 말일까요?

말로 하지 않고 행위로 그 남편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남편은 이미 아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내의 입에서 하나님과 예수님, 교회와 성경에 대한 말을 듣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예수 믿자고 얼마나 많은 말로 부탁하고 애원하였겠습니까?    그런데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깃장을 놓습니다.    그럴 때 남편을 말로 설득하려는 아내의 애절한 노력은 자칫 남편을 가르치려 든다는 오해를 받고 잔소리와 바가지 긁는 소리로 들립니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복음은 꼭 말로 전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확신하는 복음을 전할 때 나의 논리와 열심으로 상대방을 설복시키리라는 고집이 오히려 복음을 차단하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수천 마디 말보다는 진심어린 행동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지난 주 봉은사에 들어가 땅밟기를 하며 기도했다는 사람들이 정말 무엇을 기대하고 그런 일을 했을까요?  순수한 신앙열정이라고 칭찬해야 할까요?   정말 봉은사를 찾는 불자들의 영혼을 위하여 그랬다면 꼭 그런 방식을 고집해야 했을까요?   그렇게 기도하는 광경을 꼭 동영상으로 찍어 우리가 이렇게 했노라 보고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세상 여론이 들끓어 문제를 삼으니 마지 못하여 다시 찾아가 머리를 숙이고 사과를 했는데 사과할 일을 왜 했을까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마치 믿지 않는 남편을 마귀 사탄이라 저주하고 망하라고 기도하는 아내의 행동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불신 남편은 망해야 할 사탄이 아니라 아내의 사랑과 선한 행실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 부탁해야 할 동반자입니다.  개인의 지나친 신앙 표현을 열심과 용기와 헌신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왜곡시킵니다.   나의 신앙이 정말 복음에 바른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을 내 편리하게 해석하고 내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개인의 신념인가 확인해야 합니다.   

신학도 신앙도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목사와 선교사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이 벌이는 충동적인 행동들이 지금도 충분히 기독교를 이상한 집단으로 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간증인 혹은 찬양지도자라는 멋드러진 이름으로 마구잡이식으로 양산된 사람들이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듯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용기있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기독교인 눈에는 이런 행동들이 기독교의 본질인양 오해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여호수아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전술, 여리고 성을 일주일 동안 아침마다 돌게 하신 일을 어느 땐가부터 땅밟기라는 이름으로 유행처럼 따라 합니다.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퍼포먼스 하듯 땅밟기를 합니다.   기도하며 봉은사 땅을 밟으면 여리고가 무너지듯 봉은사가 무너진다고 하셨습니까?   내가 마음에 두고 구입하려는 땅을 기도하며 매일 아침마다 밟으면 내것이 된다고 약속하셨습니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일까요?   아니면 나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멋진 명분일까요?   

갈릴리와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셨던 예수님도 땅밟기 하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요한도 베드로도 땅밟기를 하셨다는 기록이 없는데 유독 한국교회 어떤 이들은 왜 그렇게 땅밟기를 좋아할까요?   혹시 땅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의 본능적인 욕심이 비뚤어진 신앙으로 잘못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고 순종해야 할 또 하나의 부분입니다.   땅밟기 그것보다 더 좋은 선한 행실들이 얼마든지 있건만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오만함과 무례함을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불신 남편과 사는 아내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정결하게 살아가는 행위를 남편들이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 그리고 깨끗한 삶, 바로 이것이 남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거룩한 삶이란 세상의 거짓되고 타락한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의 수 많은 여자들이 허황되고 사치스럽고 입에 담기 부끄러운 행동들을 서슴치 않고 저지를 때 그들과 구별되어 깨끗한 몸가짐과 행실로 아내의 자리를 지키고 어머니의 자리를 충실히 해나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아내가 그가 믿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죄악을 멀리하고 깨끗하게 사는 모습을 남편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내 아내는 다른 집의 여인들과 다르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집의 아내들이 어떻게 살고 있다는 말일까요? 여인들이 아름답게 단장하고픈 본능을 따라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어 외모를 꾸밉니다. 단정하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화장을 하며 치장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 시대의 여인들이 허영심에 들떠 분에 넘치게 외모를 꾸미느라 투자하는 물질과 시간은 대단하였습니다. 상류사회의 여인들은 화려한 화장과 값비싼 옷 그리고 각종 귀금속으로 꾸며 자기 집안의 부를 과시하였습니다.  단순히 단정하고 아름답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뭇남성들에게 매혹적으로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부정한 마음에서 나온 지나친 화장과 치장입니다.  남편들이 그런 아내들을 염려하고 경계하며 의심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여인들조차 세상 사람들처럼 겉으로 꾸미는 화장과 치장으로 절제할 줄을 모릅니다. 교회 안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있는데 지나치게 외모를 단장하는 여인들이 교회의 분위기를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어갑니다.  베드로가 이런 점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남편에게 순복하는 아내의 단장은 외모의 꾸밈이 아니라 마음 속에 담긴 속 사람을 온유함으로 단장하고, 정숙함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사환들이 주인에게 순복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이라 하였던 것처럼 아내들은 겉모양 꾸미기 보다는 내면을 단장하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교훈을 하였습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2:9-10. 딛2:5,6 참고)   이곳에 있는 자매들은 그럴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없지만 어떤 사람들은 남는 것이 시간과 돈이라 미장원을 내 집 드나들 듯 날마다 출근하여 머리를 꾸미고 사우나에 맛사지로 육체미 관리하느라 들이는 시간과 공력과 물질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렇게 멋지게 단장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리며 자선단체에서 자원봉사 몇 시간 봉사하는 것으로 선행을 다했다고 착각하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땋은 머리는 공들여 꾸민 헤어 스타일입니다.  이번에 그리스를 방문하여 아테네 박물관을 견학할 때 고대 그리스 여인들의 아름다운 육체미를 표현한 많은 대리석 조각상들을 보았는데 거기 있는 여인들이 대부분 땋은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시대 부유한 상류층 여인들의 사치스러움의 모델입니다.   대단히 부유한 계층의 여인이 아니고는 그렇게 화려한 헤어 스타일을 할 여유가 없었을 겁니다. 바울의 말처럼 땋은 머리에 금이나 진주로 장식하고 값진 옷을 입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 사람들입니다.  내면의 단장은 얼마나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겉으로 꾸며 자기를 과시하는 허황된 행동입니다.   바울은 ‘그런 외모 치장으로 하지말고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단장하고 선행으로 단장려고 힘쓰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에게 마땅한 행실입니다’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던 믿음의 여인들을 모델로 제시합니다. 그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내면을 단장한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모델로 제시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여러분도 선을 행하십시오’  옛날 우리 할머니들은 남편을 바깥 양반이라 또는 주인 양반이라 불렀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안사람 혹은 집사람이라 불렀는데 아내들은 주로 집안에서 가정을 돌보고 남편들은 밖에서 일하였던 농경사회 문화에서 나온 호칭입니다.   집사람이라는 호칭이 오늘날에는 여성의 권위를 무시하는 용어처럼 해석됩니다.  여자들은 집안에서 애나 보고 밥짓고 빨래나 하는 부엌데기 취급하는 것이라 여겨 싫어하는 호칭이 되고 있지만 본래의 의미는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고 집 안밖에서 일하는 남편과 아내의 역할 차이에서 부르던 호칭이라 여기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아내가 남편을 주인양반이라 부르던 시절에 그 의미는 남편에 대한 존경과 가장의 권위를 존중하던 호칭이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부른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동방문화의 배경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여종으로 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존경과 사랑의 마음에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선하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존경받는 조상이며 오늘날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을 받고 있지만 아브라함이 남편으로서 턱도 없이 무책임하고 비겁한 적도 있었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두 번씩이나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 속였습니다.  한 번은 그가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애굽 사람들이 아내의 아리따운 모습을 보고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애굽의 바로에게 아내를 두 눈 멀거니 뜨고 빼앗기고 말았을 뻔한 아찔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라는 이런 아브라함을 멸시하지 않고 남편의 권위를 그대로 존중합니다.   아브라함을 ‘내 주인’이라 부르며(창18:12) 존경과 순종의 본을 보였습니다.    

남편을 무시하고 깔보는 아내의 입에서 ‘사내가 되어가지고 째째하게’ 이런 발언이 나오면 어떤 남편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데서는 혹시 무시당하더라도 가정에서 아내와 자식들에게만은 존중 받기를 원하고 또 존중을 받아야 가정의 질서가 바로 서는 법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을 향해 ‘꼴에 남자라고 큰소리 치네’라는 말을 한다면 볼장을 다 본 가정입니다. 그것도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남편의 권위도 아버지의 권위도 곤두박칠 치고 맙니다. 이런 가정은 어른도 아이도 질서도 존경도 없는 콩가루 집안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법입니다.   

불신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비웃음과 핍박을 당할 때도 그 영혼을 사랑하며 구원에 이르도록 하려면 아내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특히 행동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남편을 ‘내 주’라고 부르지는 못할지라도 선한 행실로 대우하는 것이 진실로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잔소리로 남편을 설득하고 이기려고 너무 애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이나 남편이나 집에서 듣고 또 듣는 엄마와 아내의 잔소리와 바가지 긁는 소리에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는 경우는 정말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더구나 예수 안 믿는 남편에게 아내가 하고 또 하는 교회 이야기, 성경 이야기는 듣기 싫은 잔소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남편이 아내의 선한 행실을 보고 있습니다!    임금과 권세자들이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주인이 사환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남편이 아내의 행위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남편을 남편으로 인정하고 가정의 머리로 인정하고 높여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다는 칭찬은 회사와 학교와 동네에서도 들어야 하지만 먼저 가정에서 들어야 합니다.   아내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서 뭔가 달라졌다.  내 아내를 저렇게 좋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은 예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어떤 분일까 나도 그 예수를 알고 싶고 믿고 싶다는 감동은 아내의 수만 마디 말보다 진심어린 사랑과 거짓없는 선한 행실로부터 나옵니다.    

오늘이 종교개혁 제493주년 기념주일입니다. 500여년 전 개혁자들이 부르짖은 종교개혁은 교회개혁이었고 신앙개혁이었으며 곧 개인의 신앙개혁이기도 합니다. 그 개혁정신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교회와 개인의 신앙이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르고 타협하며 너무 쉽게 허용하다가 그만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을 잃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교인이 교인답지 못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길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신앙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을 너무 거창하고 대단한 것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하지 맙시다.  개인의 신앙이 말씀이 지시하는 길로 바로 들어서고,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주의 말씀으로 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신앙개혁의 기초가 됩니다.  바른 신앙훈련은 가정으로부터 시작되고 복음 전파 역시 가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며 믿지 않는 배우자들에게 그리고 동일한 신앙을 가진 배우자에게 내가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사느냐에 따라 복음의 열매가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실은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복음이 복음되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불신 남편을 위하여 혹은 믿음이 연약한 남편을 위하여 아내가 보이는 내면의 아름다운 단장은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을 본받아 정숙함으로 보이는 선한 행실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핍박 중에도 두려움을 이기고 놀라지 아니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아내는 믿음의 조상인 사라의 딸입니다.  아내 여러분, 그리고 앞으로 한 남편의 아내가 될 자매 여러분 주 안에서 순복함으로 여러분의 가정을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닮은 아내 한 사람의 선한 행실이 가정의 신앙을 말씀 위에 바르게 서도록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신앙개혁자들이 될 것이라 믿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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