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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부자에게 없는 것 (눅 16: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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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자에게 없는 것 (눅 16:19-26)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물질 문명의 시대다. 물질이 없으면 살기 불편하기에 얼마나 가졌느냐가 삶의 척도가 되어가고 있다. 이조 시대에는 양반과 상반으로 나뉘었지만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뉘어지고 있다. 물질은 필요하다. 물질 없이 살 수 없기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주님이 가르쳐 준 기도의 내용이다. 문제는 물질보다 중요한 것이 더 많이 있는데 그 중요한 가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를 보라. 

이 부자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옷이 있고 집이 있고 음식이 있고 매일 매일 즐기는 호화로운 연회가 있었다. 연회가 매일 준비되려면 그 집 안에서 일하는 일꾼들도 많았다는 것이며 호화롭게 즐기는 오락과 기쁨조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의 생이 끝이 나고 무덤에 묻혔을 때 그는 음부로 갔다. 삶이 종식된 이후의 부자의 삶이 또 다시 기록되어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 부자에게는 더 이상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는 삶이 없고 음부의 고통 중에 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부자는 얼마나 목마른 지옥의 삶을 사는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그 나사로를 보내어 달라고 한다.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외친다. 

사람이 죽으면 두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아브라함의 품으로 표현된 안식의 세계다. 또 하나는 음부다. 즉, 불구덩이의 내세, 심판 받고 떨어지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마18:9을 보면 지옥불이란 표현이 있고 
마25:41에서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이라는 표현이 있다. 
마13:42에서도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였다. 

분명코 내세는 불붙는 지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불붙는 지옥은 막9:48을 보면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며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 듯 하는 곳이다. 이런 곳으로 한 부자가 갔다.

이 부자를 볼 때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 육신을 위해 먹고 마시고 입고 연락을 즐길 수 있었던 모든 것은 내세 심판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사후 생명을 위해서는 너무도 무용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물질은 필요 없는 것일까? 아니다. 

부자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무가치하게 다룬 것이다. 자기가 누리는 모든 물질을 먹고 마시고 연락하는 데만 사용한 것이다. 물질을 바로 쓰면 죽은 자도 살리고 오지에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쓰여진다. 그런데 부자는 내세를 위해 무용하고 내세의 상급을 위해 무용하고 내세의 면류관을 위해 무용하게만 사용한 것이다. 결국 이 부자는 정말 중요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1. 하나님이 없다. (눅16:22)

눅16:22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나사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 때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일반 은혜와 특수 은혜를 받으면서 산다. 그리고 그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로 인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간다. 오늘 성경은 거지가 되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 이 부자에게도 은혜를 주신 것 같다. 하나님에게 눈을 뜨고 살도록, 현세와 내세에 눈을 뜨고 살도록, 죄와 허물에서 구원을 받고 살도록 선재(先在) 은총이 부어졌다. 

하지만 부자는 물질을 믿었던 것 같다. 먹고 마시고 연락을 즐기는 기쁨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게 하고 은혜를 모른 체 살게 한 것 같다. 필요한 것, 불편한 것을 해결해 주는 물질이 영적인 소경이 되게 하고 귀머거리가 되게 하고 하나님을 찾는 일에 벙어리가 되게 한 것 같다. 부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물질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해서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삶이란 우리에겐 물고기가 물 없는 곳에 있는 것과 같다. 부자의 비극은 물질이 없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없기에 비극이고 하나님이 없으니까 육의 사람으로 생을 산 것이다. 그래서 즐기고 먹고 입고 마시는 삶에 몰입한 것이다.

잠11: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2. 이웃이 없다. (눅16:20)

눅16:20을 보면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라고 되어 있다. 

그 대문 앞에 거지가 버려진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눅16:21을 보면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는데 있다. 얻어먹어야 한다. 상에서 떨어지는 빵조각, 그것은 손을 닦는 용으로 떼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으로라도 살고자 하는 거지는 정말 물질이 필요한 자였다. 

물질은 이상하다. 때로는 물질이 어떤 이에게는 쓰레기 버리듯 무가치하게 버려지고 또 어떤 이에게는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물질이 마술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삶의 태도, 가치, 목표에 의해 물질이 귀한 것이 되기도 하고 버리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분명코 배불림을 위해 대문 박에 버려진 거지! 그 버려진 이유는 또 하나 부자의 무관심 때문이다. 대문 밖에 헌데를 핥는 이웃이 있다는 것, 대문 밖에 빵조각을 얻어먹고 목숨을 연명하려는 이웃이 있다는 것, 부자는 그 이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조금만 나누면 되는데 생을 조명하지 않고 살았다. 철저한 무관심이다. 대문 앞에 버려진 거지를 향해 부자는 내어쫓거나 욕을 하지 않았다. 왜 남의 대문 앞에서 기생하고 있느냐고 따져 보지도 않은 것 같다. 거지를 쫓아내거나 해롭게 하지 않았다. 헌데를 핥고 있든, 개들과 더불어 대문에 누워 있든 말든 부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는 바로 부자에게 이웃이 없었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이웃이란 정의는 내가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웃이다. 강도를 만나서 신음하는 자를 싸매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이웃을 돌보는 모습이다. 그렇게 보면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은 부자가 아니고 거지 나사로였다. 이 이웃은 부자에게 있어서 거지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나사로를 무관심으로 내버려둔다. 그의 중심에 이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짐승의 삶이요, 이웃이 없는 삶은 목석의 삶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웃이 있어야 한다. 내가 도움을 주고 싶은 이웃이 대문을 열고 나가면 시야에 들어와야 한다. 물질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시야에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사람답게 살게 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잠14:24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

물질을 지닌 부자가 되어도 이웃이 없으면 미련한 자일뿐이다.
  

3. 이름이 없다. (눅16:19)

눅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모든 것이 있는 부자임에 틀림없지만 한 부자다. 이름이 없는 부자다. 누구의 자손인지, 가문인지도 모르는 한 부자다. 그의 생이 끝이 났다. 이름조차 없는 부자를 누가 기억할 것인가?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는 사람은 이름이 있어도 이름이 없는 사람과 같다. 아무리 멋지고 아름답고 부르기 좋은 이름이라 할지라도 물질에 둘러싸여 사는 인생은 이름이 없는 인생이다. 이름이 없는 것은 슬픔이다. 절망 중의 절망이다. 

땅에서 홍길동, 김길동... 이름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설 때 이름이 없다는 것은 절망이요, 슬픔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름이 있어야 함을 언급하셨다. 

눅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구원 얻지 못한 부자,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잊혀진 인생이었다. 부자는 이름이 없는 불행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4. 천국의 쉼이 없다. (눅16:23)

눅16: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라고 하였다.

음부에서 괴로워하는 부자는 쉼이 없었다. 천국은 안식하는 곳이다. 

히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히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는 것은 안식이다. 괴로움과 고통을 벗어던지고 사랑과 위로를 받는 쉼을 누린다는 것이다. 부자는 바로 이 쉼이 없다. 천국이 없는 부자의 내세, 부자는 정말 중요한 것이 없는 것이다.   

인생을 돌아볼 때 당신의 삶 속에 무엇이 있는가? 재능과 건강, 물질 등이 다 있어도 이 네 가지가 있어야 g나다.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 이웃이 있어야 한다. 이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세 천국의 쉼이 있어야 한다. ‘부자인가? 거지인가?’가 문제가 아니다. ‘자색 옷을 입었는가? 누더기 옷을 입었는가?’가 문제가 아니다. 정말 있어야 할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내게 있으면 다 있게 된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주의 나라에 이름이 기록되고 내세를 준비하는 삶을 살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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