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교개혁]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 (눅 5:27-39)

  • 잡초 잡초
  • 462
  • 0

첨부 1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 (눅 5:27-39)

 
내 용 

오늘은 세계 모든 개신 교회가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 49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 종교개혁일을 기준으로 해서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개혁 문제를 취급할 때 ‘하나님의 교회도 개혁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우리가 가지게 되는데 이 세상의 교회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구분을 합니다. 무형 교회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 교회는 영원히 변함이 없는 교회인데 우리는 그 교회를 알 수가 없고 볼 수도 없고 하나님만이 우리가 알 수 없는 교회를 인정하시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교회와 같이 우리가 몸담고 있으며 눈에 보이는, 이 지상에 세워진 모든 교회들은 유형 교회라고 합니다. 유형 교회에 대한 신학적 정의는 불안전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죄 많은 인간들이 모여서 운영하는 공동체라서 교회도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를 보면 부끄럽게도 교회가 부패하여서 너무나 많은 죄를 지은 역사가 많았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또, 솔직히 인정을 합니다. 가장 심했던 때가 중세기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 이 개혁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래 교회는 예수님 이후에 한 줄기로 계속 내려오다가 1054년에 두 줄기가 되었습니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 변했습니다. 1017년이 되었을 때 이것을 기점으로 또 한 줄기가 갈라져 세 줄기가 되었는데 바로 그 세 번째 줄기를 우리 개신교회라고 합니다. 이 개신교회를 프로테스탄트 교회라고 합니다. “항거했다”는 뜻으로 우리가 규정을 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무엇을 그렇게 항거했는가? 몇 가지 종교개혁의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의 진리성이 이유가 되었습니다. 우리 마틴 루터 종교 개혁의 골자가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인간의 의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지 말라”였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당시 최고 문제 초점이 되었던 것이 “면죄부 판매”라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속죄 표를 사야 되고 그 의를 만들면 죄가 없어지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더군다나 만약 아버지가 죄를 짓고 죽었으면 이 세상에 아직 살아있는 내가 그를 위해서 속죄 표를 사면 그 의가 아버지의 구원을 이루어준다는 교리였습니다. 인간의 의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지난 해 고난 주간에 마틴 루터 영화를 우리 교회에서 상영을 했습니다. 관람하신 분들은 아주 넉넉히 뭐가 종교 개혁을 일으켰는지 이해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기독교의 진리를 고행종교로 만들지 말라”입니다. 로마의 라테라노 성당을 다녀오신 분들은 설명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 성당 안에 그 높은 계단을 알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 무릎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피가 나게 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나의 이 고행의 의가 공로가 되어서 속죄의 기쁨을 느낀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무용지물 십자가가 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좀 선하게 해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인간의 의가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면 십자가상의 강도는 절대 구원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할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흉악범 죄수로 죽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과 대화한 시간은 1분에서 2분 정도로 우리가 계산할 수 있습니다. 대화 두세 마디 주고받은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자리에서 그에게 구원의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그를 구원한 의가 무엇입니까? 그는 흉악범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핵심 진리가 됩니다. 어떤 누구도 내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20세기 훌륭한 신학자로 평가 받는 칼 바르트는 일반 종교와 기독교 진리를 분리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기독교의 구원 진리는 하나님이 그냥 주신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또, 일반 모든 종교는 내가 필요하여서 신을 찾아가는 행위이며,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진리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길을 헤매셨고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이 “아담아, 어디 있느냐?” 찾아 나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잉카네이션(incarnation)’이라고 하는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 세상을 찾아오신 사건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가장 성행한 타 종교 중에 불교를 볼 수 있습니다. 샤카이족의 왕자였던 석가라고 부르는 그는 왕궁의 왕자로서 세상의 고난을 전혀 모르고 성장했는데 어느 날 신하들과 함께 평민들이 살고 있는 거리를 처음으로 나와서 돌아다닐 때 그의 마음에 충격을 주는 몇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너무 늙어서 꼬부라지고 보기 흉한 노파가 길가에서 꼬부랑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얘들아, 저게 뭐냐?” “사람입니다.” “왜 사람이 저렇게 되었느냐?” “늙으면 다 저렇게 됩니다.” “그러면 나도 저렇게 되느냐?” “그렇습니다.” 또 가다가 장례식 행렬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뭘 메고 저렇게 가느냐?” “사람입니다.” “왜 사람이 사람을 메고 가느냐?” “죽었기 때문에 땅에 묻으려고 메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저렇게 되느냐?” “그렇습니다.” 그때 그는 인간의 낳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의 심각한 고뇌에 빠졌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이렇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면 살아서 뭘 하는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양을 통해서 인간 고뇌에 문제를 해결하라는 하나의 수양이 불교라는 종교를 만들게 됩니다. 공자는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인간이 가장 훌륭하게 사는 길이 있을 터인데 그 길이 무엇일까?’ ‘어질 인(仁)’ 하나를 써놓고 어질게 사는 인간 교육 즉, “교육을 통해서 인간을 참되게 사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다.” 그래서 삼강오륜을 만들어서 교육을 하는 길을 가르쳤잖아요? “군위신강(君爲臣綱)이요, 부위자강(父爲子綱)이요, 부위부강(夫爲婦綱)이라.” 

옛날 대학시험에 우리나라 삼강이 뭐냐고 했더니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이라고 쓴 학생이 있다고 하는데, “부자유친(父子有親)하며 군신유의(君臣有義)하고 부부유별(夫婦有別)하고 장유유서(長幼有序)하고 붕우유신(朋友有信)을 지킬 때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교육을 만들었더니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유교로 발전해 버렸습니다. 

종교는 필요에 의한 것을 하다가 그것이 종교화 되어서 완전히 굳어지는 것이 세상의 종교들입니다. 며칠 전 독일에서는 월드컵 축구경기 알아맞히는 문어님이 돌아가셔서 추모제를 지냈다는 것을 봤습니다. 만약 그 문어 어른께서 소천을 안 하시고 계속 그런 일을 했다면 문어 종교가 생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거 신기하지 않냐? 인간들이 하는 일을 이 물고기가 어떻게 이렇게 100퍼센트 맞추느냐? 이것은 신이다.” 이렇게 필요에 의해서 종교가 자꾸 생겨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진리는 사람의 필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 이 선물의 개념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나를 위해서 아주 고마운 일을 해줄 때가 있잖아요? 그 일이 너무나 고마워서 나는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고마운 마음을 그에게 전달하느라고 선물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은 선물일까요? 아닙니다. 빚을 갚은 겁니다. 진짜 선물이란 내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받을 만한 공로가 전혀 없는데 받았을 때 그게 바로 진짜 선물입니다. 

이 복음에 의한 구원은 하나님이 그냥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만 하고 또 공로가 있어서 하나님이 그 공로를 의로 여겨서 우리를 뽑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택하여 주셨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가 부르잖아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권 안에 내가 들어있다는 기쁨을 가지고 그 기쁨 속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특별히, 이 구원 선물이 인간의 조그만 보행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극장표 하나 사는 것같이 속죄 표를 사거나 무릎 조금 아프고 피 좀 흘렸다고 해서 구원이 주어지는 값 싼 종교의 자리로 기독교가 전락했기 때문에 종교 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이게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이 거저 주신 믿음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해서 우리가 선택 받았고 선택받은 백성은 감사할 뿐이지 무슨 조그만 일을 했다고 해서 그게 의가 되어서 속죄 표를 샀다고 구원받게 되는 값싼 종교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냐?” 이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만인제사론’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해결합니까? 내가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직자가 중간에서 중재역할을 꼭 해주었습니다. 이때 생긴 제도가 고해성사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지 못하고 성직자에게 다 고백합니다. 나는 이런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성직자가 중간에서 그 사람의 기도를 다 듣고 그를 위해서 죄 사함의 기도를 해줄 때 비로소 죄가 사해지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는 이것이 다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필요가 없느냐? 그 중보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가 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를 용서하고 내 죄를 없이해주는 사함의 권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 예루살렘 성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그곳은 제사장만 들어갔었습니다. 제사장 중에서도 대제사장만 거기 들어가서 백성의 죄 사함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던 자리인데 이것이 찢어져 열리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으로 누구든지 제사장의 역할을 자신이 할 수 있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지은 죄는 내가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회개를 통해서 사함을 얻는 제도를 가지고 있지 누구에게 고백을 해서 그것을 가지고 용서받는 제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루터는 수도사 시절에 너무나 깨끗하게 살려고 생각하다 보니까 지은 죄가 날마다 있잖아요? 생각만 잘못해도 지은 죄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신부를 찾아서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신부님! 내가 이렇게 또 나쁜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나쁜 생각이 들어왔었구나. 그러면 내가 사함의 기도를 해주겠다.” 고해성사를 받고 신부님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청년 시절에 용서함을 받고 나오는데 2~3시간 후에 또 생각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떡합니까? 해가 넘어가기 전에 또 고해성사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또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이 신부님은 마틴 루터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하도 자주 찾아와서 고해 성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터에게 말했습니다. “일주일씩 모아가지고 오너라. 나는 너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겠다. 너 하나 위해서 신부 생활을 해야 될 정도이다.” 이런 말을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때 루터는 생각했습니다. ‘왜 내가 직접 하나님께 고하면 안 될까?’ 이런 심각한 신학적 고민에 빠진 겁니다. 

성경을 아무리 연구해 봐도 죄 용서에 있어서 예수님 이후의 중보 역할은 필요치를 않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6절에 뭐라고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누구도 거치지 아니하고 내가 지성소에서 홀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해서 내 문제를 하나님과 직접 해결하는 이러한 은혜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만인제사론’입니다. 대제사장만 하던 일을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개신교의 신학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고해성사를 안 합니다. 우리 교인들이 저한테 와서 고해성사 하시는 분들 한 사람이라도 계십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나와 직접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직접 해결하는 신학의 기초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약간 충돌적 분위기를 주고 있는 여러 가지 말씀들이 있는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것을 예수님이 개혁하는 작업이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금식하는 문제에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 사람들은 옛날에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안 했습니다. 그래서 와서 따지는 겁니다. “여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안 합니까? 우리 바리새인들은 다 금식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안하는 겁니까?” 이렇게 금식의 문제를 가지고 들고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유대 나라 사람들의 그 당시 하루 이틀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24시간이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낮과 밤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해가 뜨는 시간과 해가 지는 시간으로 계산을 해서 해가 뜨기 전과 해가 진 후 그것을 이틀로 계산하는 계산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식하는 날이 되면 이 사람들은 늘 하는 것이 해 뜨기 전에 밥을 잔뜩 먹어 두는 겁니다. 그리고 해가 떠 있는 시간만 밥을 안 먹는 겁니다. 해가 지면 또 많이 먹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먹으면 식량이 더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굶었다 먹으면 더 많이 먹게 됩니다. 이런 금식을 하면서 지금 예수님께 가서 금식을 가지고 따지는 겁니다. 여러분! 이슬람들이 라마단 한 달 동안 금식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한 달 동안 밥을 안 먹으면서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직장 생활하고 농사지으면서 할 것을 다 합니다. 라마단 금식기도 기간에는 전 세계 이슬람 사람들이 다 합니다. ‘어휴! 한 달씩 굶으면서 어떻게 사느냐?’ 이런 하루 계산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해뜨기 전에 먹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안 먹습니다. 해 지면 또 바로 먹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겁니다. 사실 마음먹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하지 마라. 차라리 먹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 이러면서 혼인집 비유를 통해서 잔칫집 설명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 유대 나라 결혼 풍습은 2천 년 전에 전통적으로 밤에 했습니다. 결혼식 하자마자 신랑신부 신혼여행 떠나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 동안 집에 있습니다. 그러면 일주일 동안 신랑신부가 꼼짝하지 않고 손님을 맞이해야 되는데 오늘은 이 친구들이 오고, 내일은 저 친구들이 오면서 일주일동안 잔치 분위기입니다. 

유대 나라의 잔치는 보통 일주일을 합니다. 그런데 신랑 신부가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해야 될 거 아닙니까? 음식을 잘해서 대접해주고 기쁘게 해줍니다. 그런데 금식하는 날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찾아온 손님들에게 오늘은 금식하는 날이니까 물 한모금도 줄 수 없다고 할 수 있느냐? 그때는 먹고 마시는 것이 좋으니라. 나중에 신랑신부가 없을 때는 그때 금식하라. 습관화된 종교 의식이라면 개혁을 해서 얽매이지 말고 살아라. 하나님이 밥 굶는 것을 좋아하시냐? 하기도 싫은 종교 의식을 억지로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나의 의가 쌓아진다고 생각하는 그 따위 신앙은 버려라.”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까? 바로 이런 문제 때문입니다. 잘못 알고 있는 유대교를 뒤집어엎는 바람에 예수님이 끌려가서 개혁자로 살았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여기 가죽 부대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복음의 성격은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변하는 진리가 있고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사용할 시대가 되면 새 가죽부대를 준비해야 된다는 이 말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성격이 시대에 따라서 살아있는 말씀으로 움직여 나갈 것을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이 본래 토요일인데 왜 주일날 예배드립니까? 개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해서 전 세계 개신교회가 “이 날이 안식일이다.” 개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해서 주일이 생겨서 주일 예배를 지금 드리는 겁니다. 옛날이라면 여러분들은 지금 불법자들만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옛날 제가 어렸을 때 교회 다닐 때는 남녀 좌석이 따로 있었습니다. 가운데 갈라서 이쪽은 여자, 이쪽은 남자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래서 부부도 교회 문까지는 같이 걸어오다가 교회 문 앞에서 안녕히 가시라고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남녀석을 구분하고 예배 마치고 다시 재회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 같이 앉아계시잖아요? 시대에 따라서 변해야 되는 진리는 변해야 그것이 살아있는 말씀이 되고 흘러가는 물은 영원히 깨끗한 것입니다. 고여 있는 물은 썩어서 못 먹습니다. 그러니까 이 변해야 되는 진리를 변하지 않게 하는 것이 교회의 신학의 문제요 바로 시대 변천에 따른 살아있는 복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가끔 쓰는 용어가 있는데 바로 “보수적이다, 보수주의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사용하실 때는 무슨 말인지 알고 사용하셔야 합니다. ‘보수적’이란 옳은 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보수적’이라고 합니다. ‘보수주의’란 새로운 것을 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보수적’인 사람이고 바리새인들은 ‘보수주의’입니다. 그래서 보수와 보수주의가 지금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신학의 방향과 교육의 갈 길의 방향을 아주 훌륭하게 해야 그 시대에 살아있는, 그 시대 사람들을 구원하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현실적인 문제로 종교 개혁을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가장 무섭고 흉악한 마귀 집단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정치 이념이나 하나의 권력 유지를 위한 집단들이 내셔널리즘을 종교화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를 보십시오. 국가의 세력 확장을 위해서 내셔널리즘을 종교화 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의기양양한 군가를 가르치면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옳은 일이 무엇이냐?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국가의 젊은이들이 그와 같은 내셔널리즘의 종교화에 무수한 목숨을 국가 제단에 바쳐서 일본이 그렇게 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얻었습니까? 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죄만 남았고 일본은 침략국이었다는 역사의 오점밖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종교의 가장 큰 희생은 순교를 하는 일입니다. 종교화된 내셔널리즘을 가지고 국가 집단에 수없이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낸 군국주의는 내셔널리즘을 종교화하면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 “쇼군”이라는 영화를 보셨을 겁니다. “쇼군”이라는 영화가 미국에 들어왔을 때 미국 언론에서 “이것은 하나의 일본 종교다.”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보십시오. “거기에 사무라이 무사가 정좌를 하고 앉아서 자기 옷을 벗어젖히고 그 예리한 칼을 가지고 자기 배에 찔러서 자기 창자를 자기가 다 끊어버리고 할복자살을 한 것은 종교이다. 

내셔널리즘을 종교화하면 이렇게 무서워진다.” 이렇게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는 힘을 주어서 일본의 젊은이들이 가미가제 전투에 천황이 내려주는 술 한 잔을 너도나도 받아먹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거 아닙니까? 어떤 종교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슬람의 자살 폭탄 테러도 똑같은 것입니다. 자신들의 정치 목적 달성을 위해서 내셔널리즘을 종교화해서 시골의 가난하고 소망이 없는 청소년들을 자기들의 종교 교리에 맞추어서 설득을 했습니다. “만약 네가 이렇게 하면 너는 저 세상에 가서 가장 좋은 삶을 영원히 살게 되는데 남자인 경우는 가장 예쁜 여자 일곱을 데리고 영원히 살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그래! 그렇게 사는 것이 낫겠다. 

나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세상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 이런 희망 없는 인생을 사는 것보다 그렇게 몸을 던지고 저 세상에 가서 그렇게 좋은 삶을 살아야지.’ 이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이 19~21살에 그 예쁜 처녀, 총각 아이들이 허리에 자살 폭탄을 두르고 버스에 올라가서 심지에 불을 댕겨 죽어버리고 마는 내셔널리즘을 종교화해서 무수한 생명을 죽여 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이러한 일들이 이 시대에 개혁할 종교개혁입니다. 인간답게 살고 인간의 자유함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그 가치성을 부여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세상이 아닌 정반대의 세상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 세상을 보시면 어떻게 설교하시겠습니까? 

더 심각한 종교가 있습니다. 북한의 정치 세력은 이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도 강한 종교화 개념을 부여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 예수님 사진 걸어놓으셨습니까? 심방 다니면서 봐도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에는 누구의 집에나 김일성, 김정일 사진 걸어놨습니다. 앞으로 김정은 사진까지 셋을 걸어서 삼위일체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들의 신앙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우리 먹고 사는 모든 것은 장군님이 내려주신 은혜입니다.” 이것은 종교화된 거기에서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지금 예수 믿는 사람 “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먹을 양식 주시고 입을 옷을 주셔서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을 그렇게 하는데 바로 그 하나님의 자리에 장군님이 계신 겁니다. 

북한은 전 국민 내셔널리즘을 다 종교화해서 종교집단이 되어 버렸는데 바로 하나님이 김일성, 김정일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러한 일이 지금 세상에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비인간화 문제가 있는 것을 개혁해야 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집어넣어서 “인간은 인간답게 살라. 하나님의 형상에 자유함을 누리고 세상에서 하나님 형상으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 진리가 들어가는 곳은 사람 살 곳이 되게 하고 자유와 평화를 주장하고 온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이 무엇입니까? 절대 신을 절대 신으로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고 그 이상 아무 공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부심과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유대교를 개혁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로 세상이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끊임없이 앞으로도 이 복음으로 세상을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 그 개혁 사역에 여러분과 저와 우리 교회가 계속 쓰임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당시의 잘못된 유대교, 잘못 가는 역사를 개혁하셨습니다. 그 개혁이 너무나도 강하게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주님은 끌려가 십자가에서 희생이 되셨습니다. 오늘 주님과 유대교 신자들의 이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말씀을 저희들이 생각하면서 이 땅에 오늘 인간화의 문제, 인간을 비인간화 하고 있는 세상의 잘못된 모든 역사를 개혁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는 사역을 우리 모두가 해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시고 인간의 자유함을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