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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하며 살아야 …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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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며 살아야 …  (눅 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1)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2)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3)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4)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5)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8)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9)
<누가복음 17장 11~19절>

할렐루야!
벌써 2010년 2달 남았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는 데 미뤘거나, 아직 못하신 일이 있다면 
남은 2달동안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세계 54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가 행복한 국민일 것 같으세요?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시죠?
조사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미국, 독일 같은 선진국은 40위 권 밖이었고 우리나라는 23위였다고 합니다. 
행복지수 1위인 나라는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100분의 1 수준인
인도 북동쪽에 있는 <방글라데시>였다고 합니다. 

방글라데시는 인구밀도가 세계 1위 즉,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1등이라는 겁니다.
문맹률이 90%가 넘고, 천연 자원도 없고, 
교육시설이나 의료시설도 열악합니다. 
그런 나라 국민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산다는 사실이 믿어지시나요?

행복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얼마나 큰 집에 살고,
얼마나 좋은 핸드백을 가졌느냐,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느냐 … 등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다 핑계입니다.
행복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얼마나 감사하며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행복해서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간 안산에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그 지방감리사께서 인사를 시키는데 … 
옆의 분들과 “당신을 보니 밥맛이 나네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에‘뭐 이런 인사를 시키나’라고 
잠시 생각했는데 … 순간‘괜찮은 인사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밥맛 떨어지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옆의 분 보면서 
“권사님/집사님을 뵈니 … 밥맛이 나네요”라고 인사합니다.
업그레이드(upgrade)해서 다시 한 번 인사합니다.
“당신을 보니 살맛이 납니다”
살 맛 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명의(名醫) 편작(扁鵲)

중국의 ‘갈관자(鶡冠子)’라는 책에 
죽은 사람도 살렸다는‘편작(扁鵲)’이라는 의사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삼형제 중 막내였는데, 삼형제 모두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편작의 형들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편작만 명의로 소문이 났습니다.

어느 날 위나라 왕이 편작에게 물었습니다.
“그대 삼형제중 누가 가장 뛰어난가?”
편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큰 형님이 가장 뛰어나고, 그 다음은 둘째 형님이며, 
제가 가장 아래입니다.”
왕은 의아해했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편작의 의술이 
가장 형편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큰 형님은 환자가 아픔을 느끼기 전에 
얼굴빛을 보고 장차 병이 있을 것을 압니다. 
병이 나기도 전에 병이 날 것을 알고 
병의 원인을 제거해 줍니다. 
환자는 아파보기도 전에 치료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는 큰 형님이 고통을 미리 제거해주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큰 형님이 명의로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둘째 형님은 환자의 병세가 미미할 때 병을 알고 치료해줍니다. 

그러므로 환자는 둘째 형님이 자신의 큰 병을 
미리 낫게 해주었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저는 환자의 병이 커지고 고통으로 신음을 할 때 
비로소 병을 알아냅니다. 
그의 병이 심하기 때문에 맥을 짚어보고, 
진기한 약을 먹이고, 살을 도려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저의 이런 행위를 보고 나서야 
제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인가 큰일을 했다고 생각하여 말을 내게 되어
제가 명의로 소문이 난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겸손함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환자들의 태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편작의 첫째와 둘째 형은 
병이 생기기도 전에 또는 병 초기에 치료해주었습니다.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최고로 기뻐해야할 일입니다. 
아프지 않고도 병을 낫게 해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감사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유능한 의사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맥을 짚고, 입에 쓴 약을 먹고,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겪는 치료를 받은 후에야 감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많은 분들이 병원에서 퇴원한 후 감사헌금을 드립니다.
병에서 낫게 되었다고 / 퇴원했다고 감사하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아프지 않은 분들, 병원 근처에 가보지도 않았던 분들은 
퇴원하는 분들만큼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입원했다 퇴원한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아프지 않고 지난 주간을 보낸 것 그게 더 큰 감사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감사를 모릅니다.
아니 감사하지 않습니다. 

요즘엔 시체가 잘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먹는 음식에 
방부제가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만큼 유해한 환경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들지 않고 사는 것이 
기적이요, 감사의 조건입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나병환자 열 명

오늘 본문 말씀은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료를 받았지만
한 명만 감사를 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병은 요즘 <한센병(Hansen's disease)>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오늘 설교 중에 
<한센병>과 <나병>이라는 단어를 섞어서 사용할 것입니다.
요즘 <한센병>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나병>이라고 되어 있어 …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필요할 때는 <나병>이라고 하겠습니다.

옛날부터 한센병에 대한 오해가 많았습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한센병이 공포의 질병으로 표현되어 왔습니다.
그래서‘전염된다, 유전된다, 불치병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한센병환자’하면 소록도에 사시는 분들처럼
얼굴이나 손, 피부 … 등 몰골이 흉해진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한센병환자는 다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약도 없던 시절, 한센병으로 인해 그런 모습이 되었던 분들이
실제로 우리 주변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기에 진단하여 치료하면 완치될 수 있는 병입니다. 
유전병도 아니고, 치료받으면 전염되지도 않는 병입니다.
단지 이 병을 앓은 후에는 여러 후유증이 남을 수 있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는 않는 병입니다. 
<한국한센복지협회 사이트 http://www.khwa.or.kr 참조>

오늘 이후로 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었다면
모두 깨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해 한센병이 큰 병이 아니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나병/문둥병(한센병)이라고 표현하면서
무서운 병으로, 큰 저주를 받아 걸리는 병으로 판단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병(한센병) 환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지역은 아주 위험한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은
서로 적대적인 감정을 가졌기 때문에 테러가(싸움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위험한 지역이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는 비록 위험한 지역이지만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유대인, 사마리아인이라는 혈통을 뛰어넘어 
한센병 환자들은 한 곳에 모여 살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나병(한센병)은 진노를 받아 생기는 병으로 여겼으며
제사장만이 진단할 수 있었습니다.(레 13:8) 
일단 나병으로 진단받으면 그는 자신이 나병환자임을 알려야 했고 
사람들과 격리되어 마을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레 13:45-46)
병이 나은 후에는 제사장에게 보이고 정결례를 행한 뒤에 
다시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레 14:1-32)
<두란노「비전성경사전」참조>
그래서 본문 12절에 보면 나병환자 열 명이“멀리서서”

“소리를 높여 …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눅 17:13) 했습니다.

나병환자들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으시고 보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눅 17:14) 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들의 병이 치료될 것이니, 
가서 제사장들에게 보여 확인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나병환자 열 명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분의 말씀을 진실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당장 치료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제사장에게로 갑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믿고 순종하여 갑니다.
그런데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14절) 할렐루야!
믿고 순종해야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열 명 중 한 명은 예수님께 다시 돌아왔습니다. 
가족들에게 달려가는 것보다 친구들에게 가는 것보다 …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15절)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16절)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눅 17:17-18)

열 명 중 이방인/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15절),
예수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16절).
나머지 아홉은 이방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예수의 말을 들으면 병고침 받을 수 있다,
저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병 나은 것에 대해서는 기뻐했으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았고, 예수님 발아래 엎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서울:두란노, 1983), pp.137~138. 참조>

사람이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영광돌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롬 1:21)
<누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 HOW 주석, p.344. 참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롬 1:21)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2천년 전에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생각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안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며 사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러시아의 작가‘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 1821-1881)는 
(1864년) ‘지하에서 온 편지’라는 글에서 
“인간은 바보가 아닌 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감사할 줄 모른다. 
놀라울 정도로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 
사실 나는 인간에 대한 최고의 정의를 다시 한다면, 
감사할 줄 모르는 두 발 달린 동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2003년 3월초 프랑스의 요리사 
베르나르 르와조(Bernard Loiseau)가 엽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유명한 요리사였는가 하면 
그가 자살하던 날 프랑스의 텔레비전 방송국 뉴스 시간에 
그의 자살 소식을 보도했고, 
며칠 후에는 그에 대한 특집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자신이 경영하던 식당의 등급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타이어 회사 미슐랭(한국이름-미쉐린 타이어)은
매해 프랑스의 모든 식당을 등급별로 평가한 
식당안내서 <기드 미슐랭 Guide Michelin>을 출간합니다. 
베르나르 르와조가 경영하던 식당은 
지난 27년간 최고 등급인 별 세 개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해 연초에 발간된 그 안내서엔 
그의 식당이 두 등급이나 강등되어 별 한 개로 떨어져있었습니다. 
이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해버렸습니다. 
27년 동안 별 세 개를 받은 것만도 감사한 일이고
은퇴하여 다른 사람에게 
음식맛을 전수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자살한 것입니다. 

솔직히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미각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감각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음식을 접하기 싫어한답니다.

연세 드신 분들, 요즘 신세대들이 먹는 음식이 맛있습니까!
아마 예전에 먹었던 산나물 등 구수한 음식이 더 입맛에 맞으실 것입니다.
맛을 느끼는 미각도 나이가 들면서 쇠퇴해버립니다.
<르와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솜씨가 좋다 한들 한 평생 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는 없는 법인데 
1, 2년도 아닌 장장 27년간이나 프랑스에서 최고의 요리사로 
인정받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럼에도 그는 별 두개를 잃었다하여 
어리석게도 자신의 생 자체를 포기해 버렸습니다.
<이재철, 「인간의 일생」, 홍성사, 2004. 참조>

대부분의 인간은 현실을 인정하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나이를 인정하십니까?
우리교회 할머니 중에 자기 손자에게 
‘누나’라고 하라고 시키는 분을 봤습니다.

할머니를 왜 누나라고 부릅니까? 
신세대 부부들 중에도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데 고치시기 바랍니다.
<아빠를 ‘오빠’라고 부르는 엄마를 보며 자라는 아이들이
세상을 바르게 보겠습니까?>
여러분, 자기를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먹은 나이도 인정하고, 자기 위치도 인정해야 합니다.

여자분들, 아침에 화장하기 전의 자기 얼굴을 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인정하셨습니까? 인정해야 합니다. 
외출할 때는 예의상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화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를 속이기 위해 화장하을 한다면 그것은 위장입니다.
자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최고라고만 생각하고 
자신은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월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나만 못하다는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남들과 비교하면서 교만에 가득 찬 말을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눅 18:11-12)

물론 그들이 그렇게 살았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를 뽐내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남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라며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
교만 가득한 감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 

우리는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혹자는 ‘감사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감사는 저절로 되지 않기 때문에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감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배꼽에 손 얹고 ‘감사합니다’해야 하는 거야”라고 
끊임없이 반복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불평하는 마음이 더 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 할 때
주된 불평거리는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민 21:5)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출 16:31) 고 좋아했습니다.
[깟씨:미나리과에 속하는 일 년생 풀로 지중해 곳곳에서 자라난다. 
백색, 연분홍색 꽃을 피우며 회백색의 작은 열매를 맺는다. 
날 열매는 악취가 나지만 건조되면 좋은 
향을 내어 방향제, 향료, 조미료, 약제로 사용된다. <두란노비전성경사전>]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매일 만나를 먹게 되니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나중에는 “꿀 섞은 과자”같다던 만나를 먹으면서
“ …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민 21:5) 했습니다. 
처음엔 그렇게 맛있었지만 매일 먹으니 …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감사도 없어졌습니다.
감사가 없기 때문에 꿀 섞은 과자 같았던 만나를
하찮은 음식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길이 평탄하지 못하다고 불평했고, (민 21:4)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고, (민 21:5)
고기가 없다고 불평했고, (민 11:4)
지도자가 못마땅하다고 불평했으며, (민 16:41) 

불평에 불평을 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한 그들은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감사와 불평은 선택입니다.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감사를 연습해야하고, 감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중요한 말은‘감사합니다’입니다.
‘엄마, 아빠’…‘안녕하세요’를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감사합니다’를 가르쳐야 합니다. 
서양의 부모들은‘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먼저 가르친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은‘땡큐(Thank you)’입니다.
미국 사람들을 만나보면 별 일도 아닌 것도‘땡큐’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50개를 선별했는데,
그 가운데서도‘땡큐’가 28%를 차지해 1등이 되었다고 합니다. 

감사가 몸에 배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감사하다’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합니다.
그래도 요즘엔 제가 하는 인사를 받는 이가 반은 됩니다.
그런데 인사해도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아파트에 산지 10년도 넘었으니 대충 몇 층에 사는 사람들인지 압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 타면 같이 탄 사람이 몇 층에 사는지 아니까 
가는 층의 번호를 눌러줍니다.
그러면‘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 말이 없습니다.
속으로‘저인간이 내가 ○○층에 사는 걸 어떻게 알지?’
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감사를 표현해야 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감사도 훈련입니다. 반복해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집에서‘엄마, 아빠’를 떼면, 무엇을 가르칩니까?
‘가나다라, 1234, ABCD’를 가르칩니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영어, 수학, 태권도, 피아노 … 등을 가르칩니다.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감사’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할 줄 모르면 행복을 모릅니다.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면 불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감사를 표현해야 …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 치료를 받은 나병환자 중 
1명만이 돌아와 감사를 표했습니다. 
물론 나머지 9명의 사람들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하기 위해 돌아온 1명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8:19)
예수님은 감사를 표현한 사마리아인에게 
육체의 병 뿐만 아니라 영혼의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10명이 병고침을 받았지만, 
오직 한 사람만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병고침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영혼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에 …

우리는 가을이 되면 교회 곳곳에 
‘감사’의 마음을 꽃 장식으로 표현해 놓습니다.
감사를 표현하며 사십시다. 

성경에 끊임없이 “감사”가 반복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감사하라. 감사하라. 감사하라.”고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할 줄 모르니까
일 년 중에 특별히 감사하라고 감사절까지 정해주셨습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크신 은혜임을 표현하는 날입니다.
‘어떤 분은 일 년 동안 손해만 봤는데 감사할 일이 어디 있어.’
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병원에서 산소호흡기를 사용하는 비용이 대략 30만원 쯤 된다고 합니다. 
보험이 적용되어 그만큼 들지는 않겠지만 …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산소호흡기를 3일만 써도 100만원입니다. 
매일 30만원어치 산소를 공짜로 마시고 있으니 
적어도 우리가 숨만 잘 쉬어도 매일 30만원씩 벌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값없이 거저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 거저 주셨습니다.
햇빛도, 공기도 … 다 거저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1년 동안 살면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날마다 생각날 때마다 감사를 표현하자고 나누어 드렸던
저금통에 얼마나 감사를 표현했는지요? 
그것도 추수감사주일에 가져오십시오.
왜냐하면 추수감사절은 감사를 표현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 10명중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한 명은
감사함으로 더 큰 은혜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감사절을 지내십니까?
어떤 분들은 추수감사절에 일 년 중 단 하루 노는 데 드는 비용만큼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 헌금봉투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 봉투 뒷면에 하나님께 감사의 편지를 써보세요.
기도제목을 쓰셔도 되지만, 하나님께 감사를 글로 표현해보세요.
그리고 최고의 마음을 담아보시기 바랍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나이 들어 죽게 되면 관위에 붉은 천을 덮게 되어 있습니다.
그 천을‘명정’이라고 말합니다. 
명정에는 관직을 했던 사람은 그 직함을 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성도(聖徒, 거룩할 성, 무리도)’라고 쓰고
직분을 가졌던 사람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고 씁니다.
그래서 제가 장례식에 가서 입관할 때 꼭 명정을 살펴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간 사람은‘학생(學生)’이라고 씁니다. 
왜냐하면 평생 배우다 죽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도 배워야 합니다.
감사를 배워야 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람에게도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를 표현하며 사는 감사자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우리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감사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불평과 원망과 탄식을 하는 
어리석은 입술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연약하지만, 부족하지만 넉넉하지 않지만 
감사하며 사는 저희들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고
가장 기쁜 삶이고, 가장 복된 삶인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감사를 전하는 입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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