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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옷, 새 스타일 (엡 4: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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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옷, 새 스타일 (엡 4:25-32)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 현대판이 있습니다. 여름 날 선녀가 더위를 피하기 위해 폭포 가에 내려 앉아 잠시 목욕을 하고자 옷을 벗었습니다. 이 광경을 훔쳐보게 된 나무꾼은 선녀가 어디 못 가도록 일단 붙잡아 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녀가 옷을 벗어 둔 바위로 살금 살금 기어가 선녀의 옷 보따리를 가슴에 안았습니다. 그 순간 나무꾼은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옷이 날개>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입는 옷에 걸 맞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야한 옷을 입으면 야하게 행동하고 싶어지고 고상한 옷을 입으면 고상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경찰이나 군인에게 제복을 입히는 이유는 경찰은 경찰 옷을 입고 경찰답게 행동하고, 군인은 군인의 옷을 입고 군인답게 행동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옷은 우리의 삶의 스타일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에 보면 바울은 이제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4:22을 기억하십니까?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고 이제 그들은 더 중요한 명령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4:24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달리 말하면 옛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요즈음 우리가 일기가 차가워지면서 우리가 새 옷을 꺼내 입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새 옷에 적응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요구됩니다. 잘 적응하면 마침내 우리는 새 옷에 걸 맞는 새로운 행동의 스타일을 갖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새 옷을 입고 새로운 스타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만난 vip들과 함께 우리는 옛 옷 대신 새 옷을 입고 새 스타일의 삶을 어떻게 이루어 갈수 있을까요?

1. 대안적 행동을 학습해야 합니다.

본문 25-29절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우리가 벗어 던져야 할 옛 누더기에 속한 행동들을 열거합니다. 대표적으로 거짓과 도둑질, 더러운 언어생활입니다. 이것은 진실하고 사랑이시며 거룩하신 주를 따르는 사람답지 못한 행동이 아닙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울은 단순히 거짓을 중단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일시 중단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거짓에서 벗어난 것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다시 거짓말을 또 시작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거짓말 장이를 온전히 벗어나려면 참말을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안적 행동인 것입니다. 

25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벗어야 할 옛 옷에 속한 행동은 이웃의 것을 빼앗는 도둑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한 순간 도둑질을 중단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도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는 언제 다시 도둑질을 재개 할지 모릅니다. 성경은 이런 이들에게 그들이 정말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이제 이웃의 것을 빼앗는 대신 이웃을 돕는 자, 구제하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28절입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이것이 바로 대안적 행동의 학습인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더러운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더러운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나는 30입니다.”를 영어로 잘 못 발음하면 더러운 사람이 됩니다./(I am thirty I am dirty) 그런데 옆에 있던 32살된 분이 자기도 영어로 하겠다고 “I am dirty,too/I am thirty two” 했다고 합니다. 자, 이런 사람이 잠시 그런 말을 참고 있다고 해서 그가 변화된 것은 아니지요. 그에게서 언제 그 더러운 말이 또 나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선한 말로 다른 삶을 격려하기 시작하면 그것이야 말로 변화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대안적 행동의 학습입니다. 

29절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물론 이런 노력이 하루아침에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실패하더라도 반복적인 노력을 하면 그것이 새로운 대안적 행동으로 정착할 수 있습니다. 반복이 습관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의 인도에 민감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거짓대신 진실한 말, 도둑질 대신 구제의 습관을, 그리고 더러운 말 대신 선하고 덕이 되는 말로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삶의 도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은 반드시 도덕적인 코드에 의해 만들어 지는 율법적인 삶만은 아니라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거하십니다. 

롬8:9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러므로 이제 부터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죄를 범하려고 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차적으로 근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 성령이 근심하고 계시는구나? 이렇게 느껴지면 그 죄를 떠나시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승리의 삶인 것입니다. 30절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은 우리가 거짓을 말하려고 하면, 도둑질을 시도하려고 하면, 아니 더러운 말을 뱉으면 우리 안에서 근심을 시작하십니다. 우리 맘이 불안하고 평화를 잃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을 즉각 버리십시오. 그것이 옛 옷을 벗는 일입니다. 그러나 반면 적극적으로 성령이 어떤 일을 하도록 감동하시면 그 일을 하시면 됩니다. 

예컨대 진실을 말하도록 감동하신다면 어떤 불이익이 있어도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구제하라고 하시면 당장에 손해 같아도 그렇게 하십시오. 선하고 덕스런 말을 하라고 감동하시면 즉각 그렇게 하십시오. 이런 감동을 소멸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살전5:19에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감동을 소멸치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과정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요, 새 옷을 입고 새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인도 앞에 더욱 민감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중요한 주제를 엡 5장에서 더욱 강조하게 됩니다. 엡5:18을 기억하십니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에 충만 할수록 우리는 더욱 성령의 인도에 민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에 민감할수록 그리스도를 기쁘게 따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3. 무엇보다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새로운 삶에로의 성숙을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물을 아십니까? 그것은 분노입니다. 분노를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오래 동안 교회 나와도 유치한 유아기적 행동을 반복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시도 때도 없이 감정을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가장 힘든 것이 감정의 절제입니다. 마귀는 바로 이런 분노의 감정을 이용하여 우리의 성숙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27절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어떻게 하면 마귀에게 틈을 주게 됩니까? 

선행하는 26절을 읽겠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일단 분을 풀지 못하면 그는 분노의 지배를 받게 되고 이런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계속되는 바울의 31절의 권면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그러면 이런 분노를 처리하는 성경적 실천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는 모든 분노와 증오의 사슬을 끊고 우리를 자유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인생은 끊임없는 상처의 연속입니다. 성숙한 인생은 그러나 이런 상처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용서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보여준 거룩한 삶의 모본이 아닙니까?

마지막 32절을 읽겠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용서가 힘들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참아주시고 용서하셨는가를 묵상해 보십시오. 이런 용서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가정을 만들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허물이나 죄가 없는 공동체가 아니라, 이런 허물과 죄를 용서로 극복할줄 하는 성숙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저는 금세기 용서의 실천으로 한 공동체, 한 나라를 위대한 미래로 이끈 우리 시대의 가장 감동적인 리더가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존 칼린의 <인빅터스>(Invictus)라는 책은 이런 만델라의 감동적인 크리스쳔 리더십을 무엇보다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3월 <우리가 꿈꾸는 기적>이란 제목으로 영화로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남아공에서 럭비는 본래 백인들만의 스포츠였습니다. 오래전부터 백인들만이 사용해온 남아공의 국기, 국가, 그리고 그들의 대표적인 럭비팀 스프링복스는 인종차별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럭비 경기가 벌어지면 흑인들은 남아공의 상대 팀을 응원하곤 했다고 합니다. 천신만고 27년간의 복역 생활을 마친 넬슨 만델라가 극적으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나라의 통합은 불가능한 기대처럼 보였고 언제 어떻게 산화될지 모르는 불안한 나라였습니다. 백인들에게 넬슨 만델라의 당선은 그들에게 임할 복수를 기다리는 불길한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정권은 바꾸었지만 아직도 백인들만으로 구성된 스프링복스 럭비팀의 유니폼은 남아공 흑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모든 것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되고 얼마되지 않아 남아공과 오스트렐리아 월드컵 럭비 결승전이 벌어진 그 날 경기 5분전에 갑자기 넬슨 만델라가 월드컵 경기장에 등장한 것입니다. 그것도 남아공 흑인들이 그렇게 증오하는 스프링복스의 유니폼을 입고 말입니다. 그것은 흑인 지도자로서 백인들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백인들의 모든 것을 수용하겠다는 말보다 더 큰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약 5분동안 경기장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유니폼을 입은 채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선수들 앞으로 다가서 첫 번 백인 선수의 손을 잡는 순간 스탠드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넬슨~~넬슨~~넬슨~~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소리는 온 경기장을 압도하고 있었고 백인도 흑인도 함께 울고 있었습니다. 

<인빅터스>의 저자 존 칼린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만델라는 자신의 관용을 드러내는 이 조용한 상징적 행동으로 남아공을 새로운 국가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날 남아공의 백인들은 만델라가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우리는 당신들의 과거를 용서합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 백인들과 함께 열광하며 살아갈 것입니다.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흑인들도 그들의 지도자들을 따라 백인들을 용서하기로 동의한 것이다. 이렇게 용서와 화해의 새 날은 찾아왔다” 

그날 남아공의 한 흑인 결코 백인을 용서하지도 그리고 백인의 게임을 응원하지도 않겠다고 한 베케 베케라는 청년도 TV를 보다가 갑자기 마음이 무너지고 동시에 자기의 가슴속에 쌓인 증오가 녹아내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현실이야. 이제 남아공의 팀은 나의 팀이야! 그들이 누구든 그들의 피부색이 무엇이든 그들은 나의 팀이야!” 

하나님은 그날 남아공에게 게임에서도 극적인 승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다음 주일 만델라는 남아공에서 가장 인종편견이 심했던 네델란드 개혁 교회를 찾았고 백인 목사와 교인들은 역사상 차음으로 자신의 교회를 방문한 흑인 성도 만델라를 끌어안고 함께 찬양을 불렀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남아공에는 진정한 역사의 새 날이 찾아왔습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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