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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밤중에 달려온 사람들 (왕하 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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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달려온 사람들 (왕하 7:3-10)


한 젊은이가 불교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영향하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불교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부산의 범어사라는 절이 세운 학교였습니다. 매년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생이 되어서 매년 범어사 스님에게 가서 장학금을 받고는 했습니다. 그는 중3이 되었을 때 불교 학생회장이 되었습니다. 

불교학교에서 미션스쿨처럼 종교수업시간이 있습니다. 그때 스님이 오셔서 불교에 대해서 강의 하시고 했습니다. 그 때 이 학생은 뽑혀서 나가서 목탁을 앞에 나가서 치면서 반야심경을 선창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하듯이 그들은 반야심경을 합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따라합니다. 그 정도로 불심히 독실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를 했기 때문에 과학고등학교를 들어가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망하는 학교에 지원해야 하는데 친구가 와가지고 저 먼동네에 브니엘 고등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가 우리동네 가까운데로 이사왔다고 합니다. 그 학교는 서울대학교를 제일 많이 들어가는 명문 고등학교라고 합니다. 거기만 들어가면 명문대학교에 갈수 있다고 그런데 단 한가지 안좋은 것은 그 학교는 미션 스쿨이라고 기독교 학교라고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예수안믿고 부처만 믿으면 되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지 하면서 친구가 꼬득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고민하다가 명문대학교에 들어간다는 것 때문에 허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브니엘 고등학교에 지원을 했는데 마침 그 학교에 입학이 되었습니다. 그는 굳건한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미션 스쿨이니까 종교수업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사님이 들어오셔서 기독교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강의를 하십니다. 그러면 안들으려고 맨 뒤에 앉아가지고 수학책이나 펴놓고 딴짓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이 열심히 듣는 겁니다. 

속이 상해서 종교시간만 되면 앞자리로 나가서 앉았습니다. 자신의 양손에 염주를 하나씩 묶고 나갔습니다. 자기가 불교학생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전도사님이 한마디하시면 꼭 질문을 했습니다. 그건 아닌것 같은데요. 틀린것 같은데요. 계속 강의를 방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은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전도사님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죽으면 천국에도 가고 지옥에도 가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때 나같은 사람이 지옥에 갈수도 있겠구나라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수업이 끝나고 전도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무례를 사과하고 자기가 예수를 믿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전도사님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180도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가 지금도 기억하는 것이 전도사님실에 들어갈 때 자기 양손목에 있던 염주를 확 빼버리던것 그것이 자기생애의 극적인 변화였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전도하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친구를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브니엘 같은 재단의 브니엘 예술고등학교에 수학선생이 되어서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무려 13년동안 학생들을 800명이나 전도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간증한 내용이 열혈청년전도왕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가 브니엘예술고등학교의 수학선생인 최병호씨입니다. 그는 지금도 전도하는데 힘을 다하고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저는 최병호씨와 같은 놀라운 변화를 바라보면서 한때는 그가 예수믿는 사람들을 거부하고 핍박하고 반대하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어느순간 하나님께 붙들림바되고 그는 이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신학생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지만 오히려 목회자보다 더 열심히 전도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서 자신들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을 향해서 뜨거운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달려가는 네명의 나병환자 이야기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 당시 북 이스라엘 왕이 다스릴때 사마리아 도성은 매우 어려운 위기속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아람의 베나닷이라는 왕이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사마리아도성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는 도성을 완전히 포위해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근이 있어서 먹을것이 아주 궁하던 차에 성을 완전히 포위해 버리니까 들어갈 수도 없고 나갈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양식을 들여올수 없습니다. 돈이 있어도 살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물가가 치솟기 시작합니다. 

요즘 김치가 2천원하던것이 만오천까지 올라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읽지 않았지만 나귀머리 하나에 은 80세겔입니다. 은80세겔이면 노동자 일년임금이랑 맞먹는 것입니다. 적어도 삼사천만원정도 나귀머리하나에 말입니다. 그정도로 물가가 치솟습니다. 그러니 살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여인들이 아이들도 죽을거니까 오늘은 너희집 아이를 잡아먹고 내일은 우리집 아이를 삶아먹자 이정도로 비극적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밖에 있던 4명의 나병환자 문둥병자가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라는 것은 유대사회에서 처형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들은 가족과 함께 거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성안에 머물수도 없습니다. 성 밖에 따로 움막을 짓고 생활했습니다. 그들이 양식을 어떻게 구합니까 가족들이 조금씩 가져다 주는 것, 아니면 성안에서 던져주는 음식 부스러기 먹고 살아가는것, 쓰레기 주어먹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이 기근에 먹을것이 어디있습니까.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은 살수 없다. 그들 네명은 모여 회의를 합니다. 성안에 들어가봤자 죽을 거, 들여보내주지도 않을 거, 우리 아람진영에가서 항복하자 혹시 거기가면 살수 있는 길이 있을수도 있지 않겠느냐 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해가 뉘였뉘였지는 그 시간에 이 네명의 문둥병자가 아람진영을 향해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에 무서운 총칼을 든 군인들이 서있는 것이 아니라 온 장막이 조용한 것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너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네명의 문둥병자가 아람진영에 도착하기 몇시간전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큰 말발굽소리와 대군의 군대소리를 듣게하셨습니다. 아람진영에 말입니다. 아람진영이 갑자기 대군의 말발굽소리를 들으니 놀란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이스라엘 군사가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헷사람들과 애굽사람들을 돈을 주고 연합군을 사와서 우리를 공격하러 오는 걸꺼야. 이래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가운데에서 그들이 혼비백산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모든 무기를 두고, 의복을 두고, 먹을것을 쌓아놓고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네명의 문둥병자가 가보니까 온 장막이 텅비어 있는 것입니다. 먹을것이 쌓여 있습니다. 수없이 굶은 그들은 얼마든지 싣컷 먹을 수 있었습니다. 감추고 숨겨두고 은과 금 의복들을 여한없이 취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속에 반성이 생겼습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여기에서 지체하고 있으면 안되지. 우리가 침묵하고 있으면 안될거야.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 밤에 한밤중에 그 사마리아 도성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아람군대가 다 도망갔다고 그리고 먹을것이 쌓여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쟁이 끝났다고 그들은 가서 그 기쁨의 소식을 구원의 소식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밤중에 달려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미워하고 멸시하고 모독하던 성안의 사람들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왜 그들이 달려갔을까요. 먼저 그들은 감사한 마음 때문에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문둥병자입니다. 그들은 죽을 목숨입니다. 이제 몇시간있으면 굶어서 죽을 위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적적인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있듯이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그들에게 이 아름답고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주어진것입니다. 우리가 살수 있다니, 먹을것이 이렇게 쌓여있다니, 이 좋은 은과 금이 쌓여있다니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순간에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죽어가는 성안을 향해서 달려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감사한 사람만이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예수님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 제사장은 그 당시에 의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제사장에게 가다보니까 그들의 몸이 나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9명은 유대인이였는데 유대인 9명은 그길로 제사장에게 들렸다가 만나고 싶은 자기 친구에게로 가족에게로 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한사람의 나병환자는 자기 몸이 깨끗함을 받았을 때 그냥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너무 좋아서 너무 감사해서 그는 가던길을 뒤돌아와서 예수님께 되돌아와서 감사하고 사례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감사한 사람만이 다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 감사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전도하라 하니까 전도하는 분들도 있고 아직 시작안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도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은 복받기 위해서 전도할 것입니다. 왜? 내가 전도하면 그 사람도 복을 받고 나도 복을 받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또 어떤 사람은 주님의 명령이니까 전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동기가 있다면 내가 감사해서 내가 구원받은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전도한다면 그는 가장 아름다운 전도의 동기를 가지고 있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혹 기도하는 분들중에 그렇게 기도하는 분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지만 이렇게 기도합니다. 물론 그 기도도 맞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꼭 맞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던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죽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니까 우리는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죽었던 우리들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그 죄악에서 죽음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오늘 나병환자들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아니 죽었던 존재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운데 회복을 경험하고 수많은 음식을 앞에놓고 그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사해서 달려갔던 것입니다. 우리만 이 복을 누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감사한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달려가게 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위대한 구원의 소식, 이 감사의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오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영혼들을 향해 달려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감사의 마음이 우리 전도의 동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왜 전도해야 하느냐 내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았으니까. 내가 영원한 지옥의 불못에 떨어질 영혼이지만 예수님의 피값으로 내가 건짐 받았으니까 너무감사한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에 가리움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누추한 죄인이였지만 예수님의 피값으로 내 죄가 사함받고 내 죄가 가리워졌다면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여러분 마음에 이 감사의 마음이 샘솟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그들이 왜 한밤중에 달려갔습니까. 그것은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9절입니다.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그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만일 지체한다면 날이 밝을 새벽까지 기다린다면 그 시간에는 수 많은 사람이 죽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앰블런스가 사고현장에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수많은 사람들이 촌각을 다투면서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갈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내일 아침까지 기다린다고 몇시간을 여기서 낭비하고 지체한다면 그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갈거야. 우리가 빨리가면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할 수가 있잖아. 그들의 심정은 그러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22절에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없는 자에게 율법없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없는 자들을 구원하고자 함이라. 내가 약한 자들에게 약한자와 같이 된 것은 내가 약한 자들을 몇몇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 내가 여러사람에게 여러모양이 된것은 몇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하려함이라. 사도바울은 수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소원은 몇사람에게라도 더더 구원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아니 한사람이라도 내가 더 구원할 수만 있다면 한사람이라도 더 구원할수만 있다면 그것이 사도바울의 사명이니까. 

오늘 나병환자들의 마음은 그러했을 겁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할수 있다면 우리가 지체할수없지 않느냐 빨리달려가야하지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전도자의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너무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그가 짐을 싸서 다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잠을 자다가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환상중에 수많은 생명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지옥불에 떨어지는데 그 소리를 들을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너무 괴로워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는 돌아갈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중국땅에 복음을 듣지못한 수많은 영혼들이 수백명 수천명이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이럴수없지 다시 짐을 풀고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생명이라도 더 구원코자하는 간절한 마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세계 제2차대전 때 유대인들이 나치독일에게 엄청난 고통을 당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스실로 끌려갑니다. 그때 오스카쉰들러라는 사업가가 헐값으로 유대인들을 고용해서 공장을 운영했습니다. 그릇제조공장을 운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거의 다 붙잡혀온 사람들이니까 임금도 안주고 강제로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릇을 만들어서 독일군에게 군수품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장교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유대인들이 독일군에게 학대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왜 저런 고통을 당할까. 그의 마음속에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스카 쉰들러는 원래 돈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늘 술에 취해 살아가는 사람인데 그는 어느순간 유대인들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죽는것을 내가 막을수만 있다면 그런데 자기가 알고 있는 천이백명의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끌려갈 위기가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그는 중대한 결단을 합니다. 자기 재산을 다 정리해서 그것을 돈으로 만들어서 나치장교에게 가서 뇌물로 건넵니다. 이 돈을 받고 유대인들을 내게 주십시오. 내가 그들을 앞으로 공장직원으로 써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생명의 댓가로 돈을 주고 생명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천이백명이 가스실로 가는 기차를 타야되는 순간에 그들을 빼돌려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고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 천 이백명의 보호받은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자기 고향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천이백명이 모여서 오스카쉰들러에게 너무나 고마워서 고마움을 표현하는데 드릴게 없습니다.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이 가진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자신들의 금니를 뽑아서 녹여서 반지를 하나 만듭니다. 그것을 오스카쉰들러에게 감사의 뜻 생명의 댓가로 그에게 전달합니다. 

그 반지를 쥐어 든 오스카 쉰들러가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조금만 덜 방탕했더라면 몇사람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었을텐데. 더 많은 사람을 내가 구원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는 그렇게 소리지르고 울부짖습니다. 그 반지의 안에는 탈무드의 유명한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한 사람은 전 세계를 구원한 사람과 같다.> 한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은 전세계를 구원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스카쉰들러의 리스트에 올라와 있던 사람들은 리스트라는 말은 무슨 이름표 기록표 아닙니까. 리스트에 기록되어 있던 천이백명 기록되어 있던 구원받은 사람들이 후손들이 몇 년후에는 육천여명이 되었는데 그들이 어느 장소에 모여서 오스카 쉰들러를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일들을 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생명이라도 더 구원할수만 있다면 그 일 때문에 그들은 사마리아 도성을 향해서 달려 갔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마지막으로 이제 그들이 한밤중에 달려가야만 했을까. 침묵후에는 하나님의 벌이 임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침묵후에 하나님의 벌이 임할 줄 알았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9절에 뭐라고 합니까.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린다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오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입을 꽉 닫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우리가 기다린다면 하늘의 벌이 우리에게 미칠것이다. 이 문둥이들은 나병환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만히 두시지 않을거야 지금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가 여기 머물면서 딴 생각이나 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용납하시지 않으실거야. 그들은 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이 놀라운 축복을 주신 분이 누구냐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아람군대를 다 몰아내시고 그 먹을 것이 쌓인 그곳에 누구를 제일먼저 초대하셨습니까. 고통받는 네명의 문둥이를 초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거기서 마음껏 그것을 누리면서 먹고 마실수가 있었습니다. 그 축복을 누릴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만이 이 축복을 누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실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누구로부터 받은 것입니까. 여러분이 받은 축복들 건강의 복, 배물의 복, 직장의 복, 자녀의 복, 누구로부터 온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왜 그 복을 주셨습니까. 그 복을 누리라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만 누리고 있고 독점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 복을 이웃에게 나눌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가지는 구원의 기쁨, 죄사함받은 감격, 이웃에게 나눠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물질, 우리의 시간, 우리의 생명을 이웃과 나눌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축복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 복을 나 한사람 누림으로 끝난다면 그 복은 곧 고갈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복을 부어주신 분의 뜻과는 상반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 복을 온전히 거두어 가실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 우물을 볼때마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우물이나 샘은 자꾸 퍼내야지 새로운 물이 자꾸 솟아나오는 겁니다. 만일 그 우물을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뚜껑덮어두고 몇십년을 덮어놓는다면 그 우물은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물을 올라오지 않습니다. 샘이 막혀서. 어찌보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내게 주신 축복을 자꾸 이웃을 위해 흘려보내고 나눌때 하나님은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실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목사님 제게는 왜 기쁨이 없습니까 남들은 구원받아 너무 좋다는데 신앙생활하면서 너무 즐겁다는데 난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구원의 감격을 남에게 흘려 보내지 않기때문입니다. 내 기쁨을 남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지 않으면 기쁨은 곧 고갈되고 맙니다. 그러다가 형식적인 신자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사람을 보면 저게 미쳤나 왜 저러지 예수믿은지 얼마안되서 그럴거야 십년만 지나봐 기쁨이 오나 쳐다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자기의 기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지 새로운 기쁨이 주어지는 겁니다. 물질도 나눌때 하나님이 더 채워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끌어 모으려 합니다. 보전하려고 하고 독점하려 합니다. 그럴수록 여러분의 영혼은 고갈될것이고 여러분의 물질을 쇠잔해버리고 말것이라는 겁니다. 

오늘 이들은 침묵후에 하나님의 벌이 임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밤에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1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부득불할 일이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할 것이라. 나병환자들은 우리가 침묵하고 있다면 벌이 임할 것이라.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 우리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가진 것을 나누지 않는다면 이 구원의 기쁨, 구원의 감격을 나만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벌이 임할 것이다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병환자들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든지 더 먹고 더 숨기고 더 감출수 있었지만 그들은 한밤중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사마리아 도성을 향해 달려가 그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도성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기들 나병환자들을 냉대하던 사람들, 무시하던 사람들 미워하던 사람들, 모독한 사람들을 향해서 이 복음의 소식을 들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전 이것이 전도자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1956년 미국 전역을 큰 충격으로 몰아넣은 한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짐엘리엇이라는 29살의 젊은 선교사가 그의 친구 4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남미 에콰도르 동쪽에 있는 쿠루라이 강변에서 시체로 발견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 지역의 복음 전도를 위해 파송받은지 일주일만입니다. 그들은 시신으로 무참한 모습으로 발견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유명 신문들은 이렇게 기사를 썼습니다. 이것이 무슨 낭비인가 휘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먼 남미까지 가서 아무도 없는 그곳에 가서 개죽음을 당해야 했던가. 왜 그들은 개죽음을 당해야 했던가. 이런 기사를 올렸습니다. 

이때 20대초반의 짐 엘리엇선교사의 아내가 신문기사에 이렇게 항의했다고 합니다. 낭비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남편은 오늘 이 일을 위해서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기도해왔습니다. 내 남편은 이제 그뜻을 이룬것입니다. 절대로 내 남편의 죽음을 낭비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죽음을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선교사들의 아내들은 일년동안 간호사 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어린애들을 들쳐업고 바로 쿠루라이 강변에 아우카부족을 향해서 찾아갑니다. 

5년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들을 섬깁니다. 말없이 그들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온갖 사랑을 다 베풀어 줍니다. 5년이 지난 다음에 아우카부족의 추장이 여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길래 우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하며 섬겨주고 있습니까. 그때 짐엘리엇 선교사의 아내가 말합니다. 바로 당신들이 5년 전에 쿠루라이강변에서 죽은 선교사들의 아내들입니다. 그 이야기에 온 부족사람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그 마을은 결국 복음을 영접하게 된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50년이 지난 지금 그 마을은 복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천국과 같은 동네가 되었습니다. 선교사를 살해했던 다섯명의 인디언들 중 네명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간증하고 다닙니다. 그 짐엘리엇선교사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죽은 그 부족민 목사가 되신 분에게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그리고 짐 엘리엇선교사의 아들이 몇 년전 한국에 와서 간증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가 복음의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기적의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짐엘리엇선교사는 일기책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자는 이러석은 자가 아니다. 영원한 것은 무엇입니까. 영생이요, 생명이요, 천국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세상의 권력이요. 건강이요, 세상 명예요 영원한 것을 위해 이 세상의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바꿔말하면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다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우카부족의 주민 천명은 다 크리스챤이 되었습니다. 그 마을은 완전히 복음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섯명의 선교사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특별히 선교사들의 아내들의 삶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자기 남편들을 무참히 살해한 그 사람들에게 가서 사랑과 섬김으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저는 어찌보면 이들의 마음이 나병환자 4명의 마음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을 냉대하던 성안 사람들 한번 고생좀 해봐라 죽어봐라, 고통당해봐라, 그러지 아니하고 그 기쁜소식을 힘차게 달려가서 증거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들은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그를 채찍질했고 십자가에 매달았고 그를 향해 침을 뱉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래고 우리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우리의 롤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사랑과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때로는 나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아직 뭐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거부하는 그들을 향해서도 복음을 들고 다가갈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전도자의 사랑이요 용기가 아닐까요.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의 삶이 되어야 되지 않을까요.오늘 여러분에게 이런 사랑과 섬김의 삶이 우리가운데 넘쳐날 수 있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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