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교개혁] 버릴 것과 자랑할 것 (빌 3:1-9)

  • 잡초 잡초
  • 296
  • 0

첨부 1


버릴 것과 자랑할 것 (빌 3:1-9)


1986년에 개봉된 영화 <미션>은 정말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에는 <로드리고 멘도사>란 악랄한 노예상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인디언들을 잡아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동생과 결투하던 중에 동생을 죽이게 됩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평생을 무기를 휘두르면서 악행을 행한 것을 회개하는 의미로 칼과 총을 비롯한 무기들을 담은 무거운 자루를 끌고 죽을 힘을 다하여 폭포 옆 절벽을 기어 오릅니다. 간신히 폭포 위에 올랐을 때, 그 곳에는 그가 평소에 노예로 잡아다 팔았던 <과라니>족속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과라니 족 인디언 중 한 사람이 칼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그는 칼을 들어 내리칩니다. 그런데 그가 내리친 것은 자신들의 원수인 멘도사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그는 멘도사가 끌고 온 무기 자루의 줄을 끊어 폭포 아래로 밀어버립니다. 인디언들은 원수를 용서한 것입니다. 그 순간 무거운 굴레가 사라졌습니다. 이제 그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회의 신부가 되어 원주민들을 도우면서 그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무기를 사용하며 살아가던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과거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멘도사가 아직 완전히 과거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끝이 납니다. 나중에 포루투갈 군대가 그 마을에 쳐들어오게 되었는데, 이 때 그 마을의 영적 지도자인 가브리엘 신부와 멘도사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가브리엘 신부는 포루투갈 군대에 대응하지 않고 미사를 집례하다가 순교합니다. 그러나 멘도사는 참지 못하고 다시 무기를 들어 포루투갈 군대를 향해 총을 쏩니다. 그러다 죽고 맙니다. 영화는 멘도사가 다시 무기를 드는 것을 통해 아직 그가 과거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멘도사는 총과 칼을 놓은 듯했으나, 마음으로는 여전히 붙잡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버릴 것이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은 하루라도 빨리 버려야 합니다. 버리지 못하면 그것 때문에 인생이 눌려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반면에 절대로 버리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과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것>을 선택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겨 자랑해야 할까요? 
버려야 할 것은 사람들마다 다를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는  자신이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대답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최고로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제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붙잡고 소중히 여기고 자랑해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 구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최고의 자랑거리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랑거리입니까? 그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구원자는 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최고로 소중히 여기고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소중히 자랑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모든 교만을 버리고 예수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본래 우리는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교만한 범죄 이후 모든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자신을 믿고, 자신의 능력과 지식과 소유를 믿었습니다. 인간적인 자랑거리를 늘어놓으면서 살았습니다.
 
바울에게도 인간적인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랑거리를 4-6절에서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베냐민 지파에 속한 정통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심하게 핍박할 정도로 열심도 있었습니다. 그는 흠이 없다고 자부할 정도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런 자기 자랑은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힘으로, 인간적인 자랑거리로 얼마든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자신은 추하기 짝이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는 자신의 추악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나중에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동안 자신이 자랑했던 것들은 모두 무익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구원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얻기 위해, 그 분을 더 풍성히 맛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랑거리로 여겼던 모든 것을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는 데 방해가 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7-9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여러분, 바울이 발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대한 지식보다, 가말리엘에게 배운 지식 보다 백 배, 천 배 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한 바울은 아직도 예수님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자랑에 도취되어 사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개>란 영적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개는 길에 떨어진 뼈다귀는 물고 가면서도, 그 옆의 금 덩어리의 가치는 모릅니다. 개란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은총을 모르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또 <행악하는 자>란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살고 구원을 얻을 것처럼 교만하게 말하면서, 자신을 의지한 나머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몸을 상해하는 자>란 우선 할례를 받는 유대인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이후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팔 일만한 할례를 베풀었는데, 이는 몸을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또 <몸을 상해하는 자>란 고행을 하면서 몸을 해롭게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기 몸을 채찍으로 치고, 칼로 그어가면서 학대하면서, 그것을 자랑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런 모든 것들은 인간적인 노력이며,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삼가라고 충고하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이 저지르던 실수는 중세 시대에도 반복되었습니다. 중세 기독교는 예수님의 은총을 의지하는 마음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고행, 금식, 수도 생활을 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십자군 전쟁에 나가서 싸운다거나, 혹은 전사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15세기 말에 와서는  종이에 찍은 면죄부를 돈을 주고 사면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해 왔습니다. 이런 가르침에는 그 어디에도 예수님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 때 종교개혁자 루터가 등장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알게 했습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오직 은총뿐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을 부인할 때,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은총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은총>의 가르침은 <오직 믿음>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엄청난 역사의 변혁이 이루어졌는데, 그게 바로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에 대하여 <노, no!>라고 말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우리 노력이 실패했음을 선언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모든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교만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놀라운 은혜에 이르게 됩니다. 

<러빙 갓, Loving God>란 유명한 책을 쓴 <찰스 콜슨>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이란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바로 옆방을 쓰면서 세상 최고의 권력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교도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서 인생의 밑바닥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비참함과 연약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고통을 통해 그는 비로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힘을 믿고 살던 자신이 얼마나 바보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인생을 맡겼습니다. 그가 자신의 실패를 선언했을 때, 주님은 그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교도소에서 나온 후 그는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삶에 헌신하게 됩니다. <교도소선교회>를 조직했고, 전 세계 2천 개 이상의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공로로 1993년에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러빙 갓>이란 책에서 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을 원치 않으신다. 그 분은 바로 우리 자신을 원하신다. 그 분은 우리의 업적을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의 순종을 원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비참한 패배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이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는 역설의 왕국이다. 승리는 패배를 통해 오고, 치유는 상처를 통해 온다. 자아의 발견은 자아를 버림으로써 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승리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쓸데없는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패배 선언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네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넌 졌다. 넌 죄악도, 사망도, 사단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포기해라! 너의 패배를 인정해라. 그러면 너는 예수님 안에서 이길 것이다. 네 자아를 버리라. 그렇게 하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얻을 것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교만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붙잡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찌꺼기 같은 열등감을 버리고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열등감은 교만 못지 않게 위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깊은 열등감에 빠진 사람들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교만한 자들만 구원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반대로 <난 아무 것도 못해요>라고 말하는 연약한 사람, 열등감에 빠진 사람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은총은 구원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총이 임하기만 하면 어떤 사람이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열등감의 늪에서 허덕이는 많은 약자들도 구원하였습니다. 

<오네시모> 같은 사람은 노예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주인에게 인정받는 신실한 노예가 아니라,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치는 노예였습니다. 붙잡히면 죽을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총은 깊은 열등감에 빠진 채로 도망하는 오네시모도 구원하였습니다. 

예수님께 구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매춘부도 있었고, 강도도 있었고, 세리도 있었고, 희망 없는 병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이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은총은 그 어떤 약자도 구원하십니다. 수많은 사형수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살을 기도했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잃고 실의에 빠졌던 여인들도 예수님 안에서 새 삶을 얻었습니다. 마약에 빠져 감옥을 드나들던 연예인들도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질병으로 평생을 고생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발목을 잡는 열등감을 던져 버리십시오. 열등감은 결코 장롱 속에 보관할 귀중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빨리 버려야 할 쓰레기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예수님만 붙잡고, 예수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만 자랑하면서 살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자들의 교만을 깨뜨리고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열등감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구원하십니다. 교만한 자도, 열등감에 빠진 사람도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길 분은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가장 자랑하고, 가장 신뢰하고, 가장 사랑해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예수님을 여러분의 인생 목록 1번에 모시길 기원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외치시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성찬을 받을 것입니다. 그 시간을 통해 우리 안에 가장 소중하신 예수님께서 임재하는 은혜가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