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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뒷심 (느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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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뒷심 (느 6:1-9)


하나님이 지켜보시기에 뚝심으로 결단한 인생이 있습니다. 

2007년도 세계 PGA골프대회에서 최경주 선수가 연거푸 우승을 했을 때 사람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엄청난 노력가이면서 뚝심의 사나이였기 때문입니다. 하루 평균 3,000번의 스윙을 했다는 말을 듣는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1,000개를 치겠다고 자신과 약속을 했습니다. 오늘 999개 치고 내일 1001개 치겠다며 골프채를 내려놓는 순간 성공은 당신 곁을 떠나간다.” 

프로로서 이런 말을 하는 그에게 어느 날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의 우승 요인이 무엇입니까?” 기자는 아마 그에게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또는 끊임없는 연습입니다!’ 라는 답변을 기대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경주 선수는 머뭇거림 없이 “신앙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기 고백을 합니다. “아무도 없는 연습장에서도 하루에도 수천개씩 공을 쳤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말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연습하다보면 쉬고 싶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려다보고 계신다!’라는 생각으로 나를 다시 세우곤 했습니다.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전 세계의 정상이 되는 길이 어찌 그리 쉬웠겠습니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을 인도하는 분이 하나님, 그분이 나를 지켜보신다는 생각으로 스윙 연습을 했습니다. 그는 결단하며 인내심을 발휘하여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마지막 성공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인생은 험난하고 치열합니다. 더구나 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때 갖는 부담감과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의 느헤미야는 지도자로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가지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면서 성벽재건에 성공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쌓던 완공 직전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제 성문에다가 문짝만 달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1%, 2%를 지으면 되는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성공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끈질기게 몰아내려는 적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산발랏과 도비야였고,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여러 대적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에게 악의를 품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이 교활한 음모를 가지고 달려들어 공격했습니다. 이렇게 흔들어보고 저렇게 흔들어보며 그동안 방해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성벽재건 공사가 두세 번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완성을 보면서 그들이 마지막 선택한 것이 있었습니다. 공사를 못하게 하면 안 되니까 결정적으로 공동체의 지도자인 느헤미야를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백성들은 오합지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 일을 꾸몄습니다.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느헤미야 6:2) 

적대자들은 광야의 천사처럼 꾸몄습니다. 산발랏은 예루살렘과 자기와 중간쯤에 속해 있는 ‘오노’라는 들판에 평화회담을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속마음에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를 제거하면 예루살렘은 예전과 똑같이 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간악한 음모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석자가 ‘오노’라는 들판 이름을 언어유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노’로 오라고 할 때 느헤미야가 ‘오 노(OH NO)’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적대자들의 음모를 알고 거절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때로는 강력한 거부와 거절의 표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는 적대자들의 음모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순진해서 많이 당하기도 합니다. “너 예수 믿지? 너 착해야 돼! 너는 그냥 순종해야 해!” 무지해서 고통 받는 사람들도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지도자가 될 때 예수 믿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될 때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다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파송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16) 

여러분, 비둘기 같이 순결하기만 하면 세상 공격에 무참히 무너지게 됩니다. 사탄의 교묘한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유약한 인간으로 멈출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 같은 지혜를 요청하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뱀 같은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유혹 속에 가득한지, 인간을 얼마나 타락시켰는지 세상 속에 들어가면 진리와 생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뱀 같은 지혜만 있고 비둘기 같은 순결함이 없으면 교활한 악인으로 멈춰서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요구하셨습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알지만 때로는 멈춰 설 수 있고 견딜 수 있으며 때로는 돌파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으며 때로는 단절할 수 있는 용기를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적대자들의 음모를 꿰뚫고 있으면서 그것은 ‘아니요!’라고 거절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느헤미야 6:3)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큰 역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다! 내 자랑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을 나는 포기할 수가 없다! 어느 순간에도 마음을 뺏기거나 내가 갖고 있는 정력을 낭비할 수 없다!” 

느헤미야는 결실을 맺기 위해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평화조약을 맺는 것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결실을 맺는 사람이 되려면 중요한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다 더 중요한 일, 보다 더 가치 있는 일, 보다 더 궁극적인 일에 쏟아 부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조금만 더 세상을 둘러보면 우리의 시간과 정신을 빼앗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세상의 취미와 오락, 세상의 운동과 공부, 세상의 휴가와 수많은 회의와 만남의 사건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빼앗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맺는 삶을 살 수가 있을까요? 제일 중요한 것은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 99%까지는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것, 좋은 것을 택했으면 그 다음에는 결단을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과 그냥 좋은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이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최선으로 했는데, 열심히 일을 했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우선적으로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지 않으면 나는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인생의 결실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우선권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 가지 기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십니까? 첫 번째 우리 기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사회에서나 언제나 우선권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느헤미야의 왕 앞에서의 결단이었습니다. 대적자들 앞에서의 결단이었습니다. 자기 백성들 앞에서의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자기 마음의 사명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가 가족입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전에 배우자가 내 삶에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합니다. 내 자녀들이 내가 하는 일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중독에 빠져 세상에서는 성공했다고 여겨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가정에 와보니 내 아내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 딸이 아버지가 나를 돌보지 않았다고 세상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일하는 데는 잠시의 즐거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내 정신과 영혼의 기쁨이 다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세 번째가 내가 원하는 사업이고 내가 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첫 번째가 이루어지면 우리에게 가정의 복을 주십니다. 가정의 복을 주시면 일의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가려하고 있습니다. 사업이 잘되면 ‘우리 가족이 나를 이해할거야! 내가 돈만 열심히 벌면 내 아내와 자녀도, 지금은 잘 못 만나지만 나를 이해할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 필요해서, 일이 너무 중요해서 당분간 일시적으로 일에 몰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내 인생의 전체를 걸고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입니다. 둘째는 가족입니다. 가족과 오랫동안 대화를 하지 못했습니까? 내 아들, 딸과 대화를 하지 못했습니까? 아버지들은 아들과 하룻밤 여행을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어머니들은 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떻게 인생이 여기까지 왔는지 물어보세요. 내가 지금까지 수고한 것이 의미가 있는지, 내가 많은 것을 쏟아 부었던 것이 가치가 있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의 음모로 감정적인 분노를 경험합니다. 

산발랏은 느헤미야를 다섯 번씩이나 불렀습니다. 산발랏은 권력에 굶주린 인물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성공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이 손상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욕망의 투사를 느헤미야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용어로 투사, 투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권력욕에 빠져있으면 다른 사람도 권력욕에 집착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욕심이 있으면 저 사람도 욕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열심히 성벽을 짓는 것을 보니까 느헤미야가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노골적인 혐의을 느헤미야에게 뒤집어 씌었습니다. 엄청난 비난의 음모를 그에게 집어넣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성경에 보니까 봉하지 않은 편지를 산발랏이 느헤미야에게 보냈습니다. 원래 모든 공식 문서는 편지에 인장으로 날인하고 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밀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읽도록 만들었습니다. 거기에는 헛된 소문이 들어 있었습니다. 악성루머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갖고 느헤미야를 쫒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를 배반했다. 그가 유대인의 왕이 되려고 한다. 자기를 보낸 아닥사스다 왕을 배반하고 그로부터 해방하려고 한다.’고 모함했습니다. 누군가 밀고만 하면 느헤미야는 죄수로 페르시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나름대로 선한 일을 한다고 하는데, 옳은 일을 한다고 하는데 거짓 소문과 악성루머로 나를 모욕하고 비난할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가슴 속으로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인간적으로는 감정적인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격분의 심정이 터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느헤미야에게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감정을 조절하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솟구치는 분노를 억제했습니다. 감정을 감정적으로 받아치지 않았습니다. 왜곡된 것을 다시 왜곡된 것으로 받아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의 방어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흔들리는 정서가 아니라 이성적인 응답이었습니다.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가 헛소문을 내고 있으니 사실이 아니다.”

자기 투사라는 핵심적인 특징은 자기 모습이 거꾸로 반영된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 산발랏아, 네가 만들어낸 일이 아닌가? 네가 욕심쟁이니까 남도 욕심쟁이로 알고 네가 왕이 되려니까 남도 왕이 되려고 생각하고 있구나. 나는 그런 생각이 들뿐이다.” 

느헤미야는 감정을 조절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느헤미야는 상대방이 행했던 거짓 헛소문과 악성루머에 대해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 낸 것이라 하였나니” (느헤미야 6:8) 

느헤미야는 “그건 네 생각이지, 네가 만들어 낸 것이지, 네 머릿속에서 꾸며낸 것이지, 네 마음에 악한 것이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나는 그런 일이 없다.” 단순 명백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왜 산발랏이 헛소문을 만들어서 느헤미야를 공격한 것일까요? 느헤미야를 겁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느헤미야 6:9)

느헤미야는 실제로 겁이 났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느헤미야가 완벽해서 두려움을 초월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도 두려웠고, 이런 위기를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마음 속에 깊이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느헤미야갸 한 일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이고, 내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내가 꿈과 비전을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꿈과 사명이고,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소명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앞에서 기도하며 거룩한 뚝심으로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가는 길이 탄탄대로를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험한 돌멩이도 있고 골짜기도 있으며 높은 산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헉헉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지금 하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인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꿈인지를 다시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확인하고 결단해야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영어성경에는 9절 하반부에 기도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느헤미야 6:9) 

이제는 내 손이 하나님의 손이 되어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내 지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내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받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기를 얻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달려가기를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는 길에 누군가가 지나가듯이 하는 비난 소리, 때로는 악의에 찬 비웃음에 감정을 너무 오랫동안 상하게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정을 풀어야 합니다. 진실이 맞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괜찮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이 나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 내 순수한 감정이 손해 보는 시간과 정열의 낭비가 얼마나 큰 지 모릅니다. 내 마음 속에 결단이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전해 주실 것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과 생각, 우리에게 주신 계획들이 세상의 비난 때문에 주저앉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미움과 감정적인 분노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믿음으로 맡기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고 뒷심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뒷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뚝심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뒤를 맞춰주시는 거룩한 뚝심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를 어떻게 펼쳐나갈 것입니까? 우리의 마지막을 다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내게 주신 사명을 확인하면서 나아가 하나님의 역사를 수행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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