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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욕망 (빌 1: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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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욕망 (빌 1:22-26)  
 

사도바울에게는 주님 앞에 가서 주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욕망과, 반면에 또다른 하나는 빌립보 교인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거룩한 복음 사역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욕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라고 본문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마음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욕망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이 세상에 사는 것 보다는 속히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 앞에 가서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욕망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은 많은 욕망들이 있습니다. 물욕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불행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 욕심이 지나치게 되고 조절되지 못할 때 비극적인 삶으로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가롯유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또 사람들에게는 성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될 때에 그 인생 역시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사들과는 달리 특별히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예언을 통해서 태어나게 되었고, 어릴 때부터 나실인의 귀한 직무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경건하고 깨끗하게 성장했지만 성적인 욕구를 참지 못해서 드릴라의 무릎을 배게 되고, 결국은 블레셋에 붙잡혀 두 눈이 뽑힌 채 맷돌을 갈며 살아야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맨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받을 때에는 광주리 사이에 숨을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교만해져서 자기의 기념비를 세우고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노력하며 하나님의 명령에는 불순종했을 때,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길보아산상에 목이 달리는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욕망은 자칫하면 사람들을 멸망의 자리로 내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욕망은 이런 세속적인 욕망, 세상적인 욕망이 아닙니다. 이렇게 자기를 멸망으로 내몰고 가는 욕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거룩한 욕망, 가장 아름다운 욕망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욕망,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살려고 하는 간절한 소원,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될 욕망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와 같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나누어져 있는 것 같고 둘인 것 같아도 그것은 하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삶과 죽음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살아가게 될 때 오히려 이 세상 것보다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천국을 갈망하며 살아가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윤택해지고 의미를 갖게 되고 경건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많은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1. 육신으로 사는 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22절) 

오늘 본문 (빌1:22)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내가 무엇을 가려야 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가린다'는 말을 개혁성경에는 '선택한다'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도바울이 육신에 거하여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많은 삶의 열매를 거둘 것을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서 빌립보 교인들을 위로하고, 빌립보 교인들을 가르치고, 빌립보 교인들을 돌보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건축하고, 거룩한 주의 사역을 하는 것을 내 일의 열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가릴는지, 무엇을 선택할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거하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아서 무엇을 선택해야 될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이러한 편지를 썼을 때에는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몸은 비록 감옥 속에 갇혀 있으나 이제 석방이 되어 자유의 몸이 되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감옥 밖의 자유인인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빌4:4)에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항상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에게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기쁨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렘29:11)에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희망을 가지시기를 원합니다.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담대함을 주는 것입니다. 환경을 보고, 어두움을 보고 어두움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 신자에게는 절망같아 보이나 그것이 희망입니다. 당장은 절망같아 보이나 그것이 축복입니다. 당장은 장애물같아 보이나 그것이 형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인기 정상을 달리는 유명한 연예인들이 연속 자살을 하면서 자살하는 풍토가 한국에 만연한 것 같습니다. 더구나 자살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데 에 대해서 우리는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이제 내 힘으로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마지막이다, 절망이다, 끝장이다 할 때에는 바로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때입니다. 그 때가 하나님이 역사하는 때입니다. 그때가 기적을 체험하는 때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지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2.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23절) 

그 다음에 보니까 (빌2:23) "내가 두 사이에 끼었다" 그랬습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에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여기 '두 사이에 끼었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말의 헬라어 원어에는 몇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 양쪽에 끼어서 꼼짝달싹을 못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둘째, 적군이 침략해서 나를 향하여 점점 압력을 가해오는 것을 가르킵니다. 셋째, 슬픔과 고통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도바울이 지금 둘 사이에 끼었다고 하는 것은 사도바울의 마음 속에는 천국에 가서 아버지의 품에서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을 볼 때 사도바울이 꼭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 끼어서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3.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다.(23절) 

여러분, 그런데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나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떠난다'의 헬라어 원어에는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야영지에서 텐트를 거두어 집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말뚝을 빼고 로프를 풀고 천막을 걷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휴가를 얻어 텐트를 치고 휴가를 즐기다가 텐트를 걷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떠난다'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잠시 휴가를 얻어서 장막을 치고 텐트를 치고 사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곧 우리들이 텐트를 걷고 천국으로 갈 날이 있다는 것을 가르킵니다. 

둘째, 배가 잠시 항구에 정박했다가 본향을 향해 출발한다는 의미입니다. 
배가 원래의 항구로 가기 위해서 잠시 항구에 정박해서 거기서 주유를 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자기의 본 항구로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영원한 본향으로 가기 위해서 잠시 머물면서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힘들지만 훈련을 받고 우리의 믿음이 점점 더 성장해서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생활을 하고 준비를 잘 했다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에 영원한 본향에 가는 것이 바로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데도 아직 젊은 내 아내가 혹은 내 남편이, 자녀들이 먼저 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러나 천국에 가보면 이해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병들고 때로는 고통을 당하고 많은 환난과 시련 때문에 고생하지만, 천국에 가보면 다 그 이유들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또한 몸에 장애를 가지고 살기도 합니다. 정신적인 지체를 가지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면 그런 문제들을 다 해결함을 받고 영화로운 몸을 얻어서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은? 
특별히 여기 "내가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으나"라는 말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더 좋다'라는 것은 영어의 more와 best라는 말이 혼합된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럴 수 없이 좋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좋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 속에는 오직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 마치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너무 깊숙이 파묻혀서 하늘나라의 영화로운 모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처소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이제 잠시잠깐 후면 우리 주님이 이세상에 오십니다. 아니, 우리도 이 세상에 영원토록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도바울처럼 이제부터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십시다.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십시다. 

직접 가까이 하여 분명하게 보게 된다. 
'함께 있다'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첫째는 우리가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잘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고전13:12)을 보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온전히 알리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우리 속에 계신 주님과 함께 영적인 교제를 나누며 살지만 그 때에 가면 실제의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모습을 똑똑하게 만나게 됩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지식적으로 더 잘 알게 된다. 
뿐만 아닙니다. 거기에 함께 한다는 말은 주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더 잘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주님을 알지만 부족합니다. 그러나 직접 만나고 보면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된다. 
주님을 더 잘 알 뿐 아니라 주님과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을 가르킵니다. 정말 주님을 만나서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서로 대화하며 주민과 사귀는 이런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우리도 같이 한다는 것이다. 
또한 주님의 영광에 우리도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주님과 더불어 동참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우리가 같이 받으면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가슴이 뛰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무디는 임종할 때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땅이 사라지고 지금 하늘이 열리는구나.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음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 줄 몰랐구나. 주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신다. 나는 주님께 가야 한다. 오늘은 나의 대관식 날이다." 우리 모두 이렇게 하나님께 서시기를 바랍니다. 


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해 더 유익하다.(24절) 

(빌1:24)을 보니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 그랬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바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사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4:19)에는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고 했습니다. '세운다'고 하는 말은 유익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엡4:29)에는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내 생각도, 우리의 말도, 우리의 행동도 누가 듣고 보아도 은혜가 넘치고, 누가 보아도 기쁨이 넘치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의 삶이 은혜롭고 보람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천국이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우리는 머지않은 장래에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과 더불어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며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세상에 대한 욕망보다도 영원한 천국에 대한 욕망,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가는 욕망을 가지고 오늘도 내일도 어떠한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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