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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오직 은혜 Sola Gratia (엡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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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은혜 Sola Gratia (엡 2:5)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로부터 즉각 도출될 수 있는 원리는 ‘오직 은혜’(Sola Gratia)만이 구원의 근거라는 점입니다. 오늘은 ‘오직 은혜’와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은혜’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는 ‘대가 없음’과 관련 있습니다. ‘오직 은혜’의 의미를 부정문으로 표현하면 구원이란 인간이 행한 어떤 일에 대한 보상이나 대가가 아니라는 뜻이고, 긍정문으로 표현하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 되지요. 이 원리에 근거하면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조차 구원이 믿는 행위의 대가라는 의미가 아님이 분명해집니다. 믿음을 조건으로 구원을 베푼다면 조건을 지킨 일에 대한 보상의 성격을 가지게 되니까요. 성경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 2:8a)라는 말씀을 통해, 구원이 은혜로 되는 것이되 그 은혜의 선물이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베풀어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무능력한 존재로 취급합니다. 이 때문에 인간에게는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으며 꿈은 이루어진다고 외치는 현대인들에게 ‘오직 은혜’란 매력적이지 않은 구호입니다. 그들은 포기할 줄 모르는 인간의 끝없는 도전과 인간 승리의 드라마에 감동을 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격분하고 반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달콤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달갑지 않은 것이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말을 ‘좋은 소식’, 곧 복음(Good News)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는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 없이는 무시될 수밖에 없는 구호입니다. 인간 자체에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성경은 구원 받기 전의 성도를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로 표현합니다(엡 2:1). 자연인의 영적 상태는 “죽은 지가 나흘”이 되어 이미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나사로와 같습니다(요 11:39). 죽은 나사로는 썩는 냄새만 풍길 뿐 예수님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다가오심을 깨달을 수도 없었고, 먼저 그분을 찾아가 살려달라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지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오직 은혜’로 그를 살리셨을 때, 비로소 그는 반응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시체의 특징은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연인도 영적인 일에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0-11)라는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 자연인 중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을 만족시킬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조차 영적인 일을 깨닫는 일에는 전적으로 무력합니다. 자연인의 의지는 하나님을 찾기는커녕 은혜를 베풀기 위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하고 그분의 은혜를 진심으로 거절합니다.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 것만을 선택합니다.

인간이 영적으로 죽었다면 무언가 행하실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한 가지는 악취만 풍기는 존재를 불로 심판하시는 일입니다. 구약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렘 17:9)이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마 15:19)라 하셨습니다. 불태워버려도 아까울 것이 없는 존재지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노아의 때에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던 것처럼 언젠가 불로써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벧후 3:6-7, 히 10:27).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할지라도 죄인인 인간은 불평할 수 없습니다. 마음 깊숙한 곳부터 썩어버린 인간이 행한 일들에 대한 대가나 보응은 오직 심판뿐이니까요.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습니다. 모두가 불로 태워져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어떤 이들을 살리셨습니다. 다른 시체들보다 썩는 냄새가 덜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살리셨다고 말합니다(엡 2:4-5). 썩는 냄새는 마찬가지이지만 오직 그분의 긍휼과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살리셨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5)는 선언으로 마감됩니다. 오직 은혜지요.

이어지는 성경구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는 말씀입니다. ‘오직 은혜’는 아무도 자기를 자랑치 못하게 합니다. 썩는 냄새 풍겼던 시체가 무슨 자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다윗처럼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 7:18)라고 할 뿐이지요.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돌리며 감사하고 찬양드릴 뿐입니다. 또한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신 사람들은 무반응이던 시체의 특성을 벗어나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비교적 괜찮게 살았던 존재가 아니라 오랫동안 썩어서 냄새만 풍기는 존재였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도무지 살 수 없음을 깨닫고 그분을 찾게 되지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주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옛 사람의 불의한 마음은 이러한 진리를 누릅니다. ‘오직 은혜’라고 말하기보다 ‘거의 은혜’ 혹은 ‘대부분 은혜’라고 표현하고 싶어 하지요. 조금이나마 자신의 행위에 쓸 만한 구석이 있었다는 것을 애써 논증하거나 설득시키고 싶어 합니다.

역사적으로 성경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펠라기안은 ‘죽지 않고 타락하기 전의 아담처럼 생생히 살아 있는’것처럼 말했습니다. 세미 펠라기안은 ‘죄로 인해 심각하게 손상되었지만 반쯤 죽은’것처럼 말했지요. 알미니안은 ‘거의 죽었다가 산’것처럼 표현했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의 비참한 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자존심 상한 인간들에게 그 이론들은 참 그럴듯했습니다. 그래서 신속하게 널리 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논증도 설득도 시도하지 않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진리와 그렇기에 ‘은혜로 구원을 얻은’ 진리를 단순히 선언할 뿐입니다.

성경의 증언을 받아들이든 성경을 수정한 사람의 이론을 받아들이든 선택은 자유입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어떤 주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오직 은혜’는 특정 견해에 대한 인간의 선택이나 말씀에 대한 순종 때문에 구원 받는 것도 아님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하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끝내 성경의 증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면 정말 예수님의 양인지 심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셈이지요.

‘은혜’라는 말은 기독교 신앙에서 대단히 많이 사용됩니다. 그만큼 많이 오해되고 많이 오용되기도 합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으니까 이제 자기 욕망대로 살아도 된다고 오해하거나, ‘오직 은혜’니까 아무런 희생과 헌신 없이 살아도 된다고 오용하지요. 이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라고 책망 받을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엡 1:4) 하시려는 목적이 있으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에 구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거룩하고 흠이 없게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계획하신 목적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께서 당신님의 택하신 양떼를 흠이 없고 거룩하게 되는 방향으로, 책망할 것이 없는 존재가 되는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이 있을 것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능자의 보호하심과 채워주심도 작용하겠지요. 반면에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거역하는 양떼들에 대해서는 바른 길로 걷도록 하기 위한 전능자의 신실히 징계가 따를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교회는 종종 이방인 중에 모독을 받습니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성도의 윤리에 대한 강조 현상이 많습니다. 하지만 윤리적 삶에 대한 직접적인 강조는 자칫 성도에게 자랑거리를 만들게 하거나 율법주의로 흐르게 하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저는 성도의 윤리적 수준이 저하될수록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오직 은혜’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라 여깁니다. 은혜를 오해하거나 오용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의 삶에는 자연스럽게 은혜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반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윤리적 삶을 강조할지라도 무익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를 구원하지 않으심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말해보면 그들은 곧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정중하게 반응하든 무례하게 반응하든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강력히 거절합니다. 아무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놓으라고 빚 독촉 하듯 할 자격도 없지만, 심판 받는 사람은 그분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핑계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죄로 인한 인간의 비참한 실상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통해 ‘오직 은혜’를 잘 깨닫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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