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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내를 귀히 여기라 (벧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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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귀히 여기라 (벧전 3:1-7)
    

지난 주일 종교개혁 기념주일이라 가정에서부터 먼저 신앙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가정에서부터라는 말은 가정의 기초단위인 부부로부터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그리고 남편이 아내에게 대한 의무와 책임을 성실히 이행할 때 가정의 질서가 바로 서고 행복이 무르익습니다.   이것이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가정생활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회의 기초 조직이며 교회의 기초입니다.   가정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왕으로 공경하는 천국이 되면 그 천국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결혼하신 가정 그리고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가정의 본질을 생각하는 기회로 삼길 바랍니다.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설교를 들은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잘 들었지?’ 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데 아내들은 좀 섭섭했을 수 있습니다.  설교하는 목사가 남자라 남자들 좋은 말만 하고 7절은 언급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 분도 있답니다. 사실은 한 시간에 다 말할 수 없어 남편들에게 전할 말씀을 다음 시간으로 미루었을 뿐입니다.  오늘은 남편들이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아내들을 향해 주신 말씀은 오늘 남편에게 주는 말씀과 함께 실천될 때 비로소 완전한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1997년 우리나라에 불어닥친 IMF 시절 이후 유행했던 간 큰 남자 시리즈 가운데 여러분도 많이 들어 알고 있는 재밌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간 큰 남자 시리즈는 세상 변한 줄 모르고 아직도 조선시대에 사는 줄 착각하여 아내 두려운 줄 모르고 겁없이 행동하는 남편들을 풍자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리즈는 여자들이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의 권위를 잃은 서글픈 남성들이 자기 연민에서 만들어낸 우스개 소리랍니다.   이런 우스개 소리를 재미있게 나누는 층이 주로 중년층 남성들이라고 하니 그동안 아내들에게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고 늙어 구박당할까봐 꽤나 두려운 모양입니다.   중년 남성들이 이런 실없는 농담을 자기들끼리 한참 주고받으며 배를 잡고 웃은 다음 마지막에 덧붙이는 말이 ‘요즘 남자들 참 불쌍해’랍니다.   

가장의 권위는 커녕 돈이나 벌어다 주는 기계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며 살다가 돈 버는 능력마저 잃고 초라해진 자신을 바라보며 남 몰래 눈물 쏟는 실직 가장, 퇴직 남성들이 있습니다.  고개를 숙인 남자들이 가족과 사회에 미안한 마음으로 죄인처럼 지내다 어느날 말없이 집을 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비참한 소식들이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남편과  아버지들이 무조건 권위를 내세우고 가정에서 폭군처럼 군림해서도 안 되지만 경제활동과 생산능력 저하로 처참하게 무너져 버린 가장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가정이 제 자리에 바로 서고 이 사회가 회복되리라 생각됩니다. 아내들은 남편들의 기를 살려주세요.  남편들은 나를 알아주고 의지하며 바라보는 아내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늘 고마운 마음으로 대우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부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가정의 행복입니다.

베드로는 아내들의 행실에 대하여 1절-6절까지 길게 말한 후 남편들에게는 짤막하게 한 절만 언급하고 맙니다. 아내들은 좀 배우고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고 남편들은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 길게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혹시 베드로가 남녀차별을 하고 있지 않는가 마음 불편한 아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말씀 역시 그 시대의 사회배경을 이해하면 수긍이 갑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편이 예수를 믿으면 그 아내도 남편을 따라 예수를 믿고 자녀들도 자동적으로 예수를 믿는 집안이 된다는 배경에서 예수 믿는 남편들에게 권하는 말씀입니다.   

그 가정의 영적 상태와 신앙생활을 이끌어가며 더 많은 책임을 가진 남편들은 아내들에 대하여 신앙적으로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이어야 마땅합니다.  물론 행실에 있어서도 모범이 되어야 하며 특히 좋은 남편이어야 합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아직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경우 남편은 모든 면에서 당연히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불신 남편과 사는 그리스도인 아내에게 주는 긴 권면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짧은 말로 대신했다고 보면 어떨까요? ‘남편들아 알았지?  길게 말 안할테니 확실히 해!’  이렇게 짧지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담긴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 했습니다. 나와 함께 사는 아내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 받아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내들에게 부탁할 때도 ‘이와같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군왕들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순복하고, 사환들이 주인에게 순복하는 것처럼 아내들도 남편들에게 순복하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와 권위에 순복하시되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음으로 우리에게 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으니 이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순복하되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여 공경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주님을 본 받아 살아갑니다.   혹시 주를 믿지 않는 남편일지라도 아내가 하나님을 경외함과 정결한 행위로 남편을 사랑하며 존중할 때 그 영혼이 구원에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원리에서 ‘이와 같이’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깨닫고 그 본을 따라 아내를 잘 이해하는 남편,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는 남편이어야 합니다.   아내는 나보다 더 연약한 그릇임을 이해하며 함께 살아야 합니다.  아내들은 무딘 남성들보다는 감정적으로 더 빨리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아줘야 합니다.   감동도 빠르고 마음의 상처도 더 쉽게 받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임을 알아줘야 합니다.   생일날 꽃다발 선물을 받고 남편의 관심과 사랑에 감격하는 아내이지만 지나가며 툭 던진 한 마디 말에 상처를 받아 오랫동안 마음 앓이를 합니다. 

우리 교회 대부분의 아내들이 남편의 결정을 존중하고 이곳으로 따라왔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을 사직하고 공부를 멈추고 친구도 뒤로 하고, 남편의 학업과 연구생활에 동반자가 되어 응원하려고 여기에 왔습니다. 남편들은 논문 작성과 연구결과를 두고 아내들이 알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견디고 있으며 가족의 미래를 책임진 가장으로 어깨가 무겁습니다. 아내들 역시 정신적인 압박감 속에 고민하는 남편을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지금보다 안정된 생활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기대 속에 오늘도 연구실에 묻혀 사는 남편을 기다리며 아이들과 씨름하면서 하루 하루 살아갑니다.   

남편들은 나름대로 자기 발전과 목표를 이루는 성취감 속에 살지만 남편만 바라보는 아내들은 때로 무력함과 단조로움에 지쳐 우울증에라도 걸릴듯 답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아내를 향해 배부른 소리하고 있다던가 행복에 겨운 소리 한다는 식으로 말하면  남자다울까요?  남편 덕분에 해외에 나와 지내고 편한 세월 지내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라고 하는 말로 입막음하려 하지 말고 가끔은 아내의 마음과 고민을 읽고 함께 나누는 여유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신체적으로 연약한 그릇임을 알고 조심스럽게 대해야 합니다.    팔목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다는 아내의 호소를 귓등으로 흘려듣거나 한 마디 따뜻한 위로는 못하고 별 것 아닌데 왜 그리 엄살이 심하냐고 무시하는 남편의 말에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픈 아내들입니다.  아내들도 남편들의 수고와 가족을 위한 헌신을 감사하고 존중하며 높여줘야 하지만, 남편들은 아내들의 수고를 알아주고 격려하는 일에 인색하지 맙시다.   가정은 부부간의 오고가는 존경과 사랑을 먹으며 천국이 됩니다.   이런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고 부부가 서로 한 몸과 마음이 되어 주께서 세우신 가정의 질서와 법도에 순복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남편은 내 아내가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사람으로 알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남편들에게 순복하라 했다고 남편은 주인이고 아내는 몸종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내는 나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동등한 인격체입니다.  남자들만 생명의 은혜를 받고 여자들은 없다거나, 남편들이 대표로 받고 아내들은 덤으로 따라간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혹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아내일지라도 남편의 사랑과 선한 행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남편과 함께 생명의 은혜를 받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를 먼저 믿은 남편은 내 아내가 나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동반자로 알고 존중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동등한 생명, 이것이 복음이 주는 개혁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데 아내와 남편이 함께 참여한다는 선언, 남녀의 차별을 해소하는 생각은 그 시대의 사회를 새롭게 바꾸는 선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신앙개혁은 생각의 혁신이며 생활의 혁신입니다.   아내를 향한 남편의 자세와 남편을 향한 아내의 자세가 변화되는 것이 곧 주의 말씀을 기초로 하는 신앙개혁입니다.   내 신앙이 하나님 말씀 위에 바로 서있으면 내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며 교회가 변화되고 사회와 국가도 변화됩니다.  

화염병 던지며 개혁을 외치고 분신자살 투신자살하며 사회변혁을 외치기 전에 먼저 내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정권타도를 부르짖고 노예제도 철폐운동에 앞장서고 남녀평등을 외치는 사회운동가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그 삶을 따라 주의 발자취를 따라갈 때 주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세상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에 모범적인 가정이 나옵니다.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은 경건하여 온집안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으려고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자기 집에 모아 기다렸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에 감동되어 온 집안과 친구들이 함께 세례를 받는 경사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경건한 한 사람이 끼치는 거룩한 영향력입니다. 친척과 친구들 뿐 아니라 그 집에 있는 하인들과 군대의 하급자들도 고넬료의 선한 영향력을 받았습니다.   하인 둘과 부하 병사 가운데 경건한 한 사람이 고넬료의 심부름으로 시몬 베드로를 초청하러 갔었습니다(행10장).     그날 고넬료 가정교회 부흥회에서 그들은 제외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넬료의 가정은 그 시대 가부장적 사회에서 가장이 예수를 영접하면 전체 가족에 끼치는 영향력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직장에서 나는 하급자들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며, 고용주로서 나는 고용인들에게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비쳐지는가 생각하게 합니다.  사장이 기독교인이면 사원들이 싫든 좋든 의무적으로 사내 예배에 참석하게 하는 것, 군대에서 지휘관이 기독교인이면 아래 사병들이 반강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게 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 상급자나 사장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행실로 본을 보이고 있다면 아래 직원들이나 부하들이 그 사람의 인격을 인정하여서라도 불만이 없을 것인데 신앙과 행실이 영 다르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는 지위와 직급을 이용하여 전도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겠지만 과연 그 전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 전파가 될까요?    

교회에서는 한 없이 너그럽고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가정에서는 폭군 남편이거나 잔소리 많은 아내라면 이런 이중적 생활은 상대 배우자에게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전도는 꼭 말을 많이 하여 상대방을 설득 혹은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말을 많이 하여도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허공을 치는 메아리일 뿐이고 듣기 싫은 잔소리로 들릴 뿐이다. 교회에서 열심있고 인정받는 남편과 아버지와 함께 사는 가족들은 가장의 권위와 강요에 못이겨 억지로 따라오지만 속으로는 이중적 신앙생활을 싫어합니다.  

어느 목사님 사모님이 예배시간에 이부자리를 싸들고 강대상 앞으로 나왔습니다.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인가 놀라는 교인들에게‘강대상에 있는 저 남자와 살아보는 것이 내 평생 소원이다’하더랍니다.   강대상에 올라가면 천사같은 얼굴로 사랑과 자비를 말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 집에 돌아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폭군으로 돌변합니다. 툭하면 아이들과 아내에 소리지르고 집안 분위기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가족들에게는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그러던  사람이 예배당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전혀 딴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 목사님의 이런 이중적 모습을 교인들은 알리가 없으니 사모님과 가족들이 어떤 고통 가운데 살았을까 짐작이 갑니다.   강대상에 있는 저 남자와 살아보고 싶다는 그 사모님의 하소연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왜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까?   노년에 따뜻한 밥 제대로 얻어 먹기 위함입니까?   기력이 떨어지고 치매라도 걸리면 아내에게 쥐어 뜯기고 구박받을까 두려워 미리 잘 보이라는 말입니까?  그건 간 큰 남자 시리즈 해소법이고 우리 그리스도인 남편들은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남편은 아내와 가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거룩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는 남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영광스런 책임입니다.   그런데 남편들이 아내를 알아주지 못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기도가 방해를 받습니다.  기도하려고 머리를 숙였는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기도가 막히고 방해를 받는 것입니다.   

나와 생명을 함께 나누는 가장 가까운 아내를 무시하고 무례하게 대우하여 연약한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의 입에서 무슨 정직한 기도가 나올 수 있을까요?   그래도 멋지게 기도하고 있다면 그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고 자기 혼자 열심을 내는 독백에 불과합니다.   속 상한 아내를 두고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을 때 울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고 가슴치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먼저 아내와 화해하고 그 후에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이 옳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기도가 막히는 것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막혔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아내가 이렇게 소중한 믿음의 동반자입니다. 그리스도인 남편들입니까?  아내를 잘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보다 연약한 그릇이며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은 사람이니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려집니다.   가정에서부터 바른 신앙의 본을 보이시고 선한 행실로 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주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드러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본 받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나그네의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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