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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몰입의 영성 (눅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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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영성 (눅 18:1-8)
  

신앙 생활은 낙심할만한 일들이 너무도 많이 놓여 있다. 재정 문제, 자녀 문제, 결혼 문제 등을 놓고 기도를 꽤 오랫동안 해 온 것 같은데 풀어지지 않고 아무런 신호가 없으면 낙심이 찾아온다. 낙심은 모든 것을 중간에서 포기하게 만드는 사탄의 제일 가는 무기다. 도둑질을 해도 회개하면 되고 살인죄를 저질렀어도 회개하면 되고 폭력범이 되어도 회개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데 낙심은 회개도 못하게 만든다. 낙심은 기도도 못하게 만들고 기도의 응답도 못 받게 만든다. 낙심은 꾸준한 신앙을 파괴하고 낙심은 열정적인 헌신을 파괴하고 낙심은 성장, 성숙을 시들게 만든다. 

오늘의 시대에 낙심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소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념이 다른 것 같아도 몰입이라고 말하고 싶다. 몰입은 말씀에 사로잡히려 하고 성령에 사로잡히려 하게 한다. 또 사로잡힌 자는 몰입 속에서 깊은 영성을 지니게 된다. 낙심은 깨뜨리고 망가지게 만드는 방망이지만 몰입은 하나님의 신령한 이끄심이다. 몰입의 영성을 유지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일에 몰입하라.

사랑 안에 거하는 일에 몰입하라.

기도에 몰입하라.

세상의 헛된 욕심에 몰입하지 말고 영적인 사역에 몰입하라.

몰입이란 빠져드는 것이다. 몸과 마음, 삶 전체가 빠져드는 것이다.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빠져드는 것이다. 자신의 주변과 자신의 여건을 잊어버린 채 빠져드는 것이다. 빠져들려면 몰입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한다.  

1. 무시 당하는 것(감정)을 뛰어넘어라. (눅18:2)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은 과부의 원한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되는 재판장을 소개한다. 그 재판장은 사회적 약자인 과부의 문제에 귀 기울일 자가 아니었다. 눅18:2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라고 하였다. 

기도에라도 몰입하려면 기도자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의 송사를 들어줄 자가 사람을 무시하는 자다. 나를 사람답게 여겨주지도 않는다. 이런 안하무인의 사람 앞에 어찌 용기가 나겠는가? 이때 주저앉아 있으면 송사를 해결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시를 당한다는 상처 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기도할 수 없다. 기도에 몰입하기가 어렵다. 조용한 기도실, 고요한 숲속, 한적한 정원에 거해도 안된다. 이제 무시 당하고 있다는 것에 개의치 말라. “무시를 당해도 나는 기도한다. 무시를 당해도 나의 원한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라고 외쳐야 한다. 감정 때문에 주저하지 않는다고 외쳐야 한다. 

눅18:35~43에서 나오는 소경을 보라.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다. 그때 앞서가는 자들이 소경을 꾸짖었다. “잠잠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주님께로 향하는 소경의 원한이 공중 분해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소경은 이 무시 당함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 더욱 크게 소리를 질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다. 

몰입하는 것은 중단하는 것이 아니다. 몰입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몰입하는 것은 뛰어넘는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어떤 방법으로라도 무시를 당하고 있다는 감정적 요인들을 뛰어넘는 것이다. 상한 마음, 분한 마음 등 그것을 넘어 몰입으로 가면 응답이 오게 된다.  

2. 듣지 아니함(의심)을 뛰어넘어라. (눅18:4)

눅18:3을 보라. 분명코 과부가 자주 그에게 가서 원수에 대한 한을 풀어달라고 아뢰인다. 그런데 눅18:4로 가서 보면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듣지 아니함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는 말이다. 한 번이 아니고 자주 자주 찾아갔지만 들어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얼마동안 듣지 아니하다가”란 말은 들어줄 날, 들어줄 때가 올 때까지만 듣지 않았다는 말이다. 

무슨 일이든 영구히 듣지 아니할 문제는 없다. 그러므로 듣지 않는다는 장애물이 있을 때 그것을 뛰어넘어라. 듣는 날이 오고야 만다. 듣고도 못 듣는 체 하는 것이고 듣고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 뿐이지 때가 되면 듣게 된다. 

오늘 과부의 원한을 들어주는 재판장은 과부를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평안을 위해서 들어주었다. 눅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요, 사람을 무시하는 자이기에 약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줄리 없는 이지만 자신이 번거로울까봐 응답을 하였다. 번거롭게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들어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쓰러질 것 같아서” 란 뜻이다. 

몰입하는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니다. 듣지 아니한다는 의심을 뛰어넘는 것이다. 듣는다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귀찮아서라도 들으실 거라고 나가는 것이다. 창32:25에 기록된 야곱의 씨름 이야기를 보라.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자와의 씨름, 그것이 바로 듣지 아니함을 뛰어넘는 몰입의 모습이다. 믿음은 의심을 깨고 몰입하게 만든다.  

3. 반복되는 시간(지루함)을 뛰어넘어라. (눅18:5)

눅18:5에서 재판장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는 말씀처럼 ‘늘 와서’ 재판장을 괴롭게 하는 이가 과부다. 어제, 오늘도 다녀갔다. 앞으로도, 또 변함없이 재판장에게 오게 될 것이다. 반복하여 찾아오는 과부의 발걸음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똑같은 문제로, 똑같은 사람에게 자주 찾아가는 것은 본인에게 지루하다. 새로운 것이 없다. 반복되는 시간의 되풀이가 헛된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도 뛰어넘어야 한다. 반복되는 시간을 뛰어넘는 것은 지루함을 이기는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을 이기는 것이다. 아무런 답이 없는 일상의 단조로움을 이기는 것이다. 

기도에 몰입을 하는 영성이란 이렇게 시간을 뛰어넘기이다. 성도들은 교회의 문을 열고 기도하러 나온다. 눅18:7의 말씀처럼 밤낮 부르짖는다. 반복되는 기도가 이어진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때로는 해를 넘기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문제로 울부짖는다. 이때 오랜 간의 시간은 지루함이 되어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러나 한 번 더, 한 번 더로 뛰어넘어라. 하나님은 더 이상 참지 아니하시고 성도의 기도 제목에 답해 주신다.   

몰입은 이런 면에서 장애물 뛰어넘기이다. 무시 당하는 느낌의 감정이란 장애물, 들어주지 않는다는 의심의 장애물, 반복되는 시간이 가져다주는 지루함이란 장애물을 뛰어넘기이다. 허나 몰입이 시작되면 장애물이 장애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감정이나 의심, 지루함 따위는 몰입할 때 뛰어넘기 수준에 불과한 것이 된다. 결코 낙심치 않는 몰입의 경지는 기도하는 기쁨에 거할 뿐이다. 

우리 집 엘리베이터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누군가가 바꿔놓는 글귀인데 “자기가 가진 꿈에 열중해서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그 분야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모든 분야에서 통하는 진리이다.” 그렇다. 꾸준히 열중하면 성공한다. 몰입이란 어떤 면에서 꾸준함의 도를 담고 있다. 

언젠가 여선교회 회원들과 소금강에 간 적이 있다. 비룡 폭포라고 하는데 물길이 내려오는 곳에 바위가 원형으로 깎아놓은 듯 만들어져 있다. 수 년을 쉬지 않고 집중하고 집중하여 내려오는 물줄기에 바위가 깎아진 것이다. 이런 글귀가 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 수 있는 것은 그 힘이 아니라 꾸준함이다.” 몰입이란 모든 것을 뛰어넘기이지만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조차 장애물로 여기지 않고 꾸준히,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마가의 다락방의 120문도, 그들은 전혀 기도에 빠져들어 경험해 보지 못한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몰입의 영성이다.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제자들을 보라.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라고 하였다. 여기에 쓰인 단어인 프로카르테오(prokarteo)는 “끈질기게 계속하다. 죽치고 있다.” 는 뜻이다. 사도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꾸준히 기도에 무릎을 던지겠다는 몰입의 영성인 것이다. 

많은 일들이 우리의 삶을 압박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나타나도 기도가 전부요, 기도가 최고의 일이요,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되라. 그것이 꾸준한 기도, 낙심하지 않는 기도요 다른 말로 기도에의 몰입이다. 이제 몰입의 영성을 가지고 응답의 사람이 되고 기도의 고수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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