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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헐몬의 이슬같이 (시 1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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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몬의 이슬같이 (시 133:1-3)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교통체증으로 인하여 오랜 시간을 도로에서 고생하지만 그것보다는 고향에서 가족들을 만나는 기쁨이 훨씬 크다고 여깁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도 일 년에 세 차례씩 절기를 지켰는데, 그때는 전국에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여오게 되고 거기서 각 지파 사람들이 같이 지내며 즐기는 생활을 노래하곤 하였습니다. 본문 시편의 표제에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했는데, 이는 예루살렘 순례 차 전국에서 모여오는 무리들의 연합과 동거함을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 시편의 노래는 오늘날 신약교회의 특수성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향하는 새생명의 축제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1. 형제의 연합입니다.

예수님의 탕자 비유에는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을 소개하였습니다(눅 15:22-24).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60년 동안 헤어져 생사를 모르던 남북의 이산가족이 상봉의 감격을 느끼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누어진 형제가 만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1) 육친(肉親)의 형제가 있습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끼리 형제동기(兄弟同氣)라는 말을 합니다. 친형제 말고도 같은 조상을 둔 집안이나 혈통이 같은 사람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씨족 중심의 사회일수록 같은 핏줄의 형제를 중요시하면서 다른 씨족과의 거리를 가지는 경향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거룩한 민족으로 그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신 7:6). 

이방인을 개와 같이 멸시하면서 배타적인 적대감을 가지기도 하였습니다(출 2:11-12). 아브라함도 이방인 지역에서 자기의 조카 롯을 골육지친(骨肉之親)이라고 챙기기도 하였습니다(창 13:8). 어떤 경우이든지 형제는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게 살아야 됩니다. 형제가 화목하지 못하고 대립하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것으로써 부모나 조상에게 불효가 됩니다.

2) 온 인류가 형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인류를 한 형제로 지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7:26-27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뿐 아니라

만물까지 한 형제로 서로 공존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는 언어나 종족이나 국경에 구별 없이 서로 사랑하며 협력하여 다같이 번영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고 또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과 권리를 유린하는 등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질러 왔습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인 요셉의 아들로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형제보다 모든 사람을 형제로 여기며 사랑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곳에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2:46-50).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한 피 받아 한 몸을 이룬 형제요, 자매라고 합니다(엡 2:19). 여기서 말하는 ‘형제의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 공동체를 뜻합니다(엡 4:16).

2. 아름다운 동거입니다.

1절에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했습니다. 연합과 동거는 비슷한 말이지만 용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만 후자는 부부와 같은 특수한 관계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곧 신령한 공동체인 교회와 성도에게 쓰여집니다(암 3:2, 엡5:31-32).

1) 믿음 안에서의 동거입니다.

에베소서 2:19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들입니다(롬 8:15).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요 1:12-13). 믿음의 동거는 서로의 신뢰를 담보로 합니다. 한집에서 동거하는 부부나 가족 사이에 믿음이 없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없을 것입니다. 잠언 25:24에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전혀 개성이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믿음의 동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2) 사랑을 실천하는 동거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합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성도의 사이를 부부의 관계로 비유하였습니다(고후 11:2). 세상에서 부부의 사랑은 이성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에 근거하지만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인 아가페(αϒαπη)에 근거합니다. 독생자를 화목 제물로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부요케 해 주고 그 사랑을 깨닫는 자로 하여금 감격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요한1서 4:16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먼저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동거가 됩니다.

3) 소망을 굳건히 하는 동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살전 1:3).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연합된 교회야말로 매우 균형 잡힌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죄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소망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8-10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 하였습니다.

3. 축복의 보장입니다.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연합과 동거는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입니다.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고 그의 뜻을 준행하는 자에게 수천 대까지 축복을 약속하였습니다(신 28:1-6).

1) 신령한 축복의 보장입니다.

본문 말씀 2절에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신령한 축복을 상징합니다. ‘보배로운 기름’은 대제사장을 임직할 때 머리에 붓는 향유를 의미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아론과 그 아들들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출 30:30). 이 기름은 값진 향(香)재료로 만들어져 있어서 ‘보배로운 기름’이라고 부릅니다(마 26:7). 대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직분의 거룩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속(俗)된 것과 구별하는 의미가 있습니다(출 30:22-33). 기름 부음은 신령한 축복을 뜻합니다(눅 4:18).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 하였습니다(시 23:5).

2) 세상적인 축복의 보장입니다.

3절에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고 하였습니다. 헐몬은 팔레스틴 북쪽에 있는 레바논 산맥의 최고봉으로 해발 2,850m 높이에 일 년 내내 흰 눈이 쌓여있습니다. 거기서 눈이 녹은 이슬이 남쪽 시온의 산들에까지 내려 메마른 땅을 적신다는 뜻으로 표현된 말입니다. 성경은 ‘이슬’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상징합니다. 옛날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면서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창 27:28).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이슬은 땅을 비옥하게 하고 거기서 풍성한 곡식과 과일을 생산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중심으로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고 건전한 가정을 중심으로 육신의 축복도 보장받고 있습니다.

3) 영원한 축복의 보장입니다.

3절에 “......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복을 현세적인 것으로 맞추어 버린다면 매우 불완전한 것이 됩니다. 이 세상의 것은 잠시잠깐 지나가기 때문입니다(약 1:10).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영생의 축복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까지 누릴 수 있는 완전한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형제의 연합과 동거함을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하시는 이유는 그 안에 사랑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영생의 원천입니다(요 3:16). 요한1서 3:14에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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