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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기쁨을 소유한 자의 모습 (빌 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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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쾌락’, 즉 ‘재미’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재미, 눈으로 보고 느끼는 재미,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음으로 느끼는 정신적인 재미에 이르기까지 모든 재미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재미가 보장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쾌락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고, 우리를 유익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들은 곧 싫증이 나게 될 것이고, 더 큰 재미를 추구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를 영원한 파멸로 몰아갈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기쁨과는 거리가 멉니다. 
재미와 기쁨, 이 두 가지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재미는 감각적이요 순간적이지만 기쁨은 전인적이요 지속적입니다. 
재미는 선과 악, 목적과 동기와는 상관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기쁨은 오직 선한 일에서 바른 목적과 동기를 가질 때에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재미에는 중독성이 있어 결국은 파멸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합니까? 기쁨보다는 재미를 추구하는 문화로 가득합니다. 무엇이 선하고 유익한 것이냐 보다는 오직 무엇이 재미있고 기분 좋게 하는 것이냐가 판단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재미 있어야 좋고, 설교도 재미 있어야 듣고, 성경공부도 재미 있어야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조차도 진리를 가르치고 그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하기보다는 오직 교인들을 재미있게 해주려는 데에만 관심을 쏟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위험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성도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참 기쁨이란 과연 어떤 것입니까? 그 기쁨을 소유한 성도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는 주일은 교회가 추수 감사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한 해의 추수를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또 물질로 헌신하는 날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주님 주시는 진정한 기쁨을 가진 자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수록된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입니다. 저자인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거듭 권면합니다. 이 짧은 편지 속에 기쁨에 대한 표현이 무려 열일곱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은 ‘성도는 참 기쁨을 소유한 자여야 한다’ 는 점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참 기쁨을 소유한 자의 모습이 어떠한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함 (= 구원, 위로, 상급의 기쁨)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10절=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참 기쁨을 소유한 성도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 안에서’(엔 퀴리오)는 주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장차 나타날 영광을 생각하면서 기뻐하라는 권면일 뿐 아니라,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 가운데서 기뻐하라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주님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 결코 기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기쁨은 주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쁨, 위로의 기쁨, 상급의 기쁨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은 다름 아닌 바울 자신이 본을 보인 삶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경우에도 기쁨을 잃지 않은 참 기쁨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괴롭힐 목적을 가지고 순전치 못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했을 때 바울의 반응을 보십시오. 

빌 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는 복음을 전하다 빌립보의 지하 깊은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기쁨 가운데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그리고 오늘 본문의 기뻐하라는 권면도 그가 로마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성도에게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는 자에게 있어서 기쁨은 명령이자 동시에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주 안에’ 있다는 말은 주님과 연합된 우리의 구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주 안에서’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입니다(롬 8:1,2). 
주 안에서 기뻐하라! 이 말은 기쁨의 범위를 제한하는 말일 수도 있고 기쁨의 질을 제한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 말이 기쁨의 범위를 제한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라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는 삶을 살되 주님을 믿는 가운데서 주님과의 관계를 견고히 유지하면서 기뻐하라’ 는 말을 한 것입니다. 
만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는 말이 기쁨의 질을 제한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라면 ‘기뻐하는 삶을 살되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주님이 주시는 특별한 기쁨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라’ 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울의 ‘주 안에서 기뻐하라’ 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기쁨의 범위를 제한하는 말로 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기쁨의 질을 제한하는 말로 보아야 할까요? 우리는 두가지 모두를 제한하는 말로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기쁨의 범위와 질을 모두 제한하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섬기는 가운데,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주님 안에서의 특별한 기쁨을 인해 기뻐하라” 고 명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누려야 할 참된 기쁨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누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 위로의 기쁨, 상급의 기쁨은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가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교회를 새로 정해야 하겠는데 아는 데가 없어, ‘어떤 교회든지 발길이 이끄는 대로 가리라’ 생각하고 한참을 가다가 한 경찰관을 만났습니다. 근처에 갈 만한 좋은 교회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경찰관은 선뜻 조금 멀리 떨어진 한 교회를 소개해주었습니다. 그 성도는 가다가 다시 돌아와 그 경찰관에게 왜 그 교회를 소개해 주었는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교회를 안 다녀봐서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잘 모릅니다. 저는 단지 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너무도 평화롭고 기쁨이 가득차 보여서 그 교회가 좋은 교회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도 언젠가 그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주 안에서 기뻐하는 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기쁨, 주님 주시는 위로에서 오는 기쁨, 그리고 장차 받을 상급을 소망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죄악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살게 됨 (= 경건한 삶의 기쁨) 

8절=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참 기쁨을 소유한 성도는 죄악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면서 뒤이어 본절에서 신앙생활 일반에 관한 실제적인 덕목 8가지를 제시합니다. 이것들은 경건한 삶의 요소들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 기쁨을 얻은 성도라면 자연스럽게 죄악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본절에서 ‘무엇에든지’(호사) 가 6회나 반복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원형(호소스)은 ‘~하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라는 의미의 복합관계대명사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본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 속에 품으십시오.” 

성도 여러분! 여기 나오는 덕목들은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의 내용과 유사합니다(마 5:3-10).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세가 농축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이는 예수님의 인격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바울의 권면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도무지 성취할 수 없는 높은 덕목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권면은 그저 원칙론적으로 주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는 이 요구를 이룰 수 없지만 성령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도 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부패한 심령을 새롭게 하여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에 새 힘을 불어넣어 독수리처럼 날게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을 구원의 기쁨으로 가득 채우셔서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어느덧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이처럼 성령님을 의지해서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절대적인 윤리의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을 ‘성화(Santification)' 라고 합니다. 참 기쁨을 소유한 성도는 성화의 과정에서 날마다 진보를 맛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평강의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9절). 

성도 여러분! 본절의 바울의 권면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 안에서의 참 기쁨과 세상이 주는 재미와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재미는 거룩한 삶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의 참된 기쁨은 반드시 악을 멀리하는 경건한 삶을 전제로 합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은 대부분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럽고 추한 것들을 통해 얻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악하고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리는 동성애를 통하여 쾌락을 얻으려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광야에서 모압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가서 바알브올을 섬기며 그 앞에서 음란한 행위를 통해 재미를 얻으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민 25:1-8). 
하지만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언제나 정결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 건축하는 일을 평생의 가장 큰 기쁨으로 삼았던 자입니다. 어떤 성경학자에 의하면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내놓은 자신의 헌물이 지금 돈으로 약 60억원이 넘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신하들과 백성들이 성전건축을 위하여 엄청난 양의 재물을 기꺼이 드렸을 때 그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대상 29:9). 
세례요한은 또 어떠했습니까?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일에 자신이 일조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았던 분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을 시작하시자 요한 자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따라 갈 때, 그는 예수님을 시기하거나 경쟁하지 않고 도리어 이를 크게 기뻐했습니다. 

요 3:29-30=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의인’ 혹은 ‘복 있는 사람’ 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주 안에서 의롭고 거룩한 일을 행함으로써 참된 기쁨을 누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함 (= 환경을 초월한 기쁨) 

11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참된 기쁨은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입니다. 참 기쁨을 소유한 성도는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워가는 자입니다. ‘자족’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자족(自足)이란 ‘환경과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자기 충족감’을 의미합니다. 
자족이란 단어는 절제나 절약이라는 단어 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지난날 IMF 사태로 국가 경제가 어려울 때 하던 ‘아나바다’ 운동을 기억하십니까?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운동’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성경의 개념이 바로 자족함입니다. 
절약은 일종의 인내와 같습니다. 내면에서 상당한 갈등과 고통이 존재해도 참고 아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족은 오히려 마음속에 평안과 가쁨이 있는 상태입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넉넉한 만족의 여유를 갖고 있었고, 그는 이것을 ‘자족함’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 기쁨을 소유한 사람의 특징은 어떤 고달픈 환경 속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본절에서 바울의 고백은 그의 만족감과 감사가 환경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감사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만일(if)의 감사’ 인데, ‘만일 이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는 조건부 감사입니다. 
다음은 ‘때문에(because of) 감사’ 인데, 이것은 좋았던 일에 대해서는 감사하지만 반대로 좋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는 원망이나 애통이 따르는 그런 감사입니다.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감사’ 입니다. 이것은 환경과 상관없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는 감사이므로 참 감사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감사를 드린 사람입니다. 11-12절을 다시 봅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한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는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다. 
주지하다시피 바울의 자족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크고 작은 일, 이런 저런 형편에 처하면서 깨닫고 바로잡아 가는 과정을 거쳤던 것입니다. 그는 마음속에 구원의 기쁨과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자족하기를 배워갔고, 마침내 매우 높은 수준의 성숙한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초반 미국에 예기치 못한 대공황이 찾아왔습니다. 기업체들이 연이어 도산하고 실업자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당시 대로우(Clarence Darrow)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무신론을 선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할 때마다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 사태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 어려운 환경 속에 우리를 두시겠습니까? 이것만 보아도 신은 없습니다.” 
하루는 흑인들을 모아놓고 무신론 강연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꿈도 잃었고 재산도 잃었고 노래까지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때입니다. 한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습니다. “박사님, 저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깜짝 놀란 대로우 박사가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노래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할머니가 분명한 음성으로 대답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저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양쪽에서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참 기쁨은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을 줍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 기쁨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당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존 밀턴을 보십시오. 그는 세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영국의 대 문호였습니다. 그런 그가 50대에 들어서 불행하게도 시력을 잃었고, 자신이 그토록 주장하던 공화제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비참한 시기에 밀턴은 ‘실락원’ 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앞을 못보게 된 그를 향해 사람들은 동정의 눈길로 떠들어댔습니다. “이제 밀턴의 인생도 막을 내렸다.” 
그때 그가 남긴 유명한 명언이 있습니다. “실명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실명을 이겨낼 수 없는 나약함이 비참한 것이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기쁨을 소유한 성도는 날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삽니다. 이 기쁨은 성도에게 죄악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합니다. 경건한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요 우리 영혼에 끊임없이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보배입니다. 또한 이 기쁨은 우리에게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합니다. 
1704년 어느날 벤자민 쉬몰크 목사님 부부가 심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은 완전히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황급히 뛰어들면서 미친 듯이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잿더미를 파헤쳤습니다. 얼마 후 그들은 새까맣게 타버린 어린 두 아들의 시신을 찾아내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삶의 희망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절망적인 상황조차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 부부의 기쁨과 평안을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신앙 고백이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 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우리 모두 주님 안에 있는 참된 기쁨을 회복하게 되기 바랍니다. 그 기쁨은 악을 멀리 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고, 모든 환경을 뛰어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으로 이 땅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참된 만족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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