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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백향목 (겔 17: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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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향목 (겔 17:22-24)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7절입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즉 모세와 선지자의 글에 메시아의 예언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도 언 듯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지만, 선지서에 나타난 많은 메시아 예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상징적인 언어로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17장 2절입니다. "인자야 너는 수수께끼와 비유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베풀어" 저는 어렸을 적에 수수께끼가 참 재미있었습니다. 문제를 드립니다. 굴이 두 개 있는데, 기차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이들 코 흘리는 것입니다. 또 흰 여자가 소복 입고, 머리 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답은 연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수수께끼와 비유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직설적인 언어로 말씀하지 않고, 수수께끼와 비유로 말씀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숨겨야 할 자(Conceal)에게는 숨기시고, 깨닫게 해야 할 자에게는 드러내기(Reveal)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0절과 11절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비유로 말하면 모르는 사람은 들어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은 정확히 알아듣습니다. 군대 가면 암호를 사용합니다. 그 이유는 아는 사람끼리 통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장교가 순찰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교의 집안 내력은 발음 중에 “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보초 서는 병사가 “암호?”라고 외쳤습니다. 이날 암호는 “고구마”였습니다. 이 장교가 대답하기를 “고구미”라고 답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죽으면서 오늘 암호가 “김진기(감잔가) 아닌가?”라고 말하고 죽었다는 확인이 안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유나 수수께끼는 통하는 사람끼리는 통하고, 통하지 않는 사람은 통하지 않기 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17장의 수수께끼는 대단히 어려운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이 급하셨는지 해설을 모두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 17장의 수수께끼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사건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바벨론 왕인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3차에 걸쳐서 침공했습니다. B. C 605년 여호야김이 왕일 때에 1차 침공을 하여 다니엘과 젊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은 폐위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야김은 바벨론 왕의 속국 노릇을 해야 하는데 배반했습니다. B. C 598년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2차로 침공했습니다. 2차 침공 때에는 여호야긴 왕을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일만 명 이상 유다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유다에는 천민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에스겔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에스겔은 B. C 598년 포로가 되어 5년 뒤인 B. C 593년에 예언을 시작하고, 22년 동안 예언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여호야긴의 숙부인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잘 드리면 살 수 있는 것인데 바벨론에 반역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애굽의 도움을 청해서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려고 하다가 느부갓네살 왕이 언약을 배반한 시드기야를 B. C 587년에 3차 침공하여 완전히 멸망하고, 시드기야 왕은 아들이 죽는 것을 봤고, 자신은 두 눈이 뽑혔습니다. 두 눈 뽑힌 채로 끌려가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에스겔 17장에는 2,3차 침공 때의 사건들이 수수께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독수리와 포도나무와 백향목의 비유입니다. 에스겔 17장 3절로 4절입니다.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채색이 갖추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취하되 그 연한 가지 끝을 꺾어서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고의 성읍에 두고” 큰 독수리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의미합니다. 느부갓네살이 레바논의 백향목 높은 가지를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성전을 지은 나무입니다. 그리고 유다의 왕궁을 지은 나무입니다. 이것은 유다의 왕가를 뜻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왕가는 다윗의 가문입니다. 즉 레바논의 백향목은 다윗의 가문을 의미합니다. 

4절의 연한 가지는 B. C 598년에 포로로 끌려간 여호야긴 왕을 말합니다. 백향목의 연한 가지를 꺾어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고의 성읍에 두었다는 말은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에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즉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다윗의 가문 중에서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겔 13장 3절로 4절의 수수께끼의 해답입니다. 

에스겔 17장 5절로 6절입니다. “그 땅의 종자를 취하여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가에 심더니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의 아래 있었더라”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가면서 유다 땅에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포도나무는 시드기야를 말합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 밑에 있어 속국 노릇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형벌로 정하신 것입니다. 

8절입니다. “그 포도나무를 큰 물가 옥토에 심은 것은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포도나무를 이루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그리고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어 바벨론에 조공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다른 독수리가 한 마리가 나옵니다. “또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큰 독수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 독수리에게 물을 받으려고 그 심긴 두둑에서 그를 향하여 뿌리가 발하고 가지가 퍼졌도다” 7절의 독수리는 애굽을 말합니다. 시드기야 왕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데 배반을 하여 애굽에 도움을 청했다는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배반하자 느부갓네살 왕이 화가 났습니다. 

9절입니다. “또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큰 독수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 독수리에게 물을 받으려고 그 심긴 두둑에서 그를 향하여 뿌리가 발하고 가지가 퍼졌도다” 언약을 배반한 시드기야를 포로로 끌고 가서 두 눈을 뽑고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볼찌어다 그것이 심겼으나 번성하겠느냐 동풍이 부딪힐 때에 아주 마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자라던 두둑에서 마르리라 하셨다 하라” 이스라엘에는 동풍과 서풍이 불어옵니다. 서풍은 지중해에서 부는 바람입니다. 아주 좋은 바람입니다. 식물을 살리는 바람입니다. 동풍은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이기 때문에 뜨거운 바람이고, 식물을 죽이는 바람입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는 두 눈 뽑히고, 자식이 죽고,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에서 죽었습니다. 에스겔 17장 1절부터 10절까지는 수수께끼이고, 11절부터 21절까지는 수수께끼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왕가는 영원히 끝나버린 것입니까? 사무엘하 7장 16절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이 다윗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의 사망으로 다윗 왕가가 끝나버렸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어기시는 하나님이신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본문인 에스겔 17장 22절로 24절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Ⅰ. 하나님은 백향목의 연한 가지를 꺾어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신다(Planting). 

 본문 22절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빼어난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하나님이 이스라엘 높은 산에 백향목의 연한 가지를 심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백향목의 가지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큰 독수리인 느부갓네살 왕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하나님은 연한 가지를 취하여 이스라엘의 높고 빼어난 산에 심기 위해서 취하신 것입니다.

백향목의 높은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두머리인 다윗의 왕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윗의 집안을 하나님이 영원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다시 연한 가지(twig, sprig)를 취하겠다는 것입니다. 연한 가지를 취하여 높고 빼어난 산인 시온 산, 예루살렘에 심겠다는 것입니다. 지리적인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B. C 539년 고레스 칙령으로 스룹바벨의 인도를 받아 돌아온 사람들이 다윗의 후손을 중심으로 나라를 재건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이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1절로 2절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다윗의 가문에서 한 가지가 나올 것이며, 이 가지에는 성령이 임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레미야 23장 5절로 6절도 같은 예언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메시아를 가리켜서 다윗의 집안에서 나온 의로운 가지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도 같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 가지로부터 한 연한 가지를 심으시겠다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실 메시아 대한 예언입니다. 메시아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가지요, 다윗의 집안에서 나온 한 의로운 가지요, 백향목 꼭대기에 취한 연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연한 가지입니다. 

22절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예루살렘에 심으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한 연한 가지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학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력서에 쓸 것이 없는 한 연한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이 가지를 통해 세상에 많은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가지로 말미암아 구원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이 있고, 그 선행이 쌓여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면 천국 가고, 선이 모자라면 연옥에 가고, 더 모자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선을 쌓아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자유의지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애굽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힘으로 애굽에 나왔다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벨론에 포로가 된 유다 백성이 스스로 해방되었다는 기록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심으신 백향목 연한 가지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요나 2장 9절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Salvation is of the LORD)” 하나님의 주권으로 구원받는 것이고, 예루살렘에 심으신 연한 가지로 말미암아 사람은 구원받게 된다는 진리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방법을 의지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22절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예루살렘에 보내신다는 약속입니다. 


Ⅱ. 이 연한 가지는 각양 새가 깃들이는 크고 아름다운 백향목으로 성장할 것이다(Progress). 
  
 본문 23절입니다.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찌라” 이 연한 가지는 연한 가지로 계속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연한 가지가 자라 열매가 무성하고 각양 새들이 와서 깃들게 된다는 말입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나 목수의 아들로 자라난 예수님은 연한 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조롱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연한 가지처럼 보인다고 우습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연한 가지이고, 사람들이 침 뱉고, 때리고, 모욕하고,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사망을 이기신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사망을 이길 능력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사망을 이기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참된 메시아이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것이 신화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다시 사신 후에 40일 동안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40일 후에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을 세상에 보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받은 것은 이 연한 가지가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 받은 제자들이 설교했더니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왔고, 그 다음 날 이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대역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은 소아시아를 지나 유럽을 건너 신대륙으로 와서 미국에서 동남아시아로, 대한민국에 이르게 되고, 이제는 중국으로, 인도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이방인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연한 가지가 성장을 하여 아름답고 큰 백향목이 되었습니다. 가지가 무성한 나무가 되었고,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고, 많은 새가 날아오게 되었습니다.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 새 중에는 봉황새 만 수 문전에 풍년 새” 큰 백향목에 새가 날아듭니다. 수많은 이방인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의 그늘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 31절로 32절에서 천국을 겨자씨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하나님의 교회는 약하고 작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창대하여 수많은 이방인을 포함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예수를 멸시하고 교회를 핍박합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은 일찍 죽습니다. 

유세비우스가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라는 책을 기록했습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로마 황제 중 교회를 핍박하는 황제치고 일찍 죽지 않은 황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두 일찍 죽었습니다. 연한 가지가 꺾이기는커녕 자신들이 꺾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에서 멸시를 받고 핍박을 받을지라도 우리는 확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연한 가지처럼 시작하지만, 크고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크고 백향목이 될 것이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Ⅲ. 하나님은 연한 가지라도 능히 큰 백향목이 되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Power). 

본문 24절입니다.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연한 가지가 크고 아름다운 백향목이 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는 그 정도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들의 모든 나무는 열국의 통치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주적인 영향(Universal Impact)을 미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외적인 영향(Outward Impact)과 내적인 영향(Inward Impact)을 줍니다. 외적으로 높은 나무는 낮아지고, 낮은 나무는 높아집니다. 내적으로 푸른 나무는 마르고, 마른 나무는 무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높은 나무 같던 바벨론, 앗수르, 헬라, 로마는 모두 낮아졌습니다. 헬라에서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가 철학을 말했습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같은 위대한 문화유산을 세웠습니다. 대한민국은 고조선 시대였습니다. 그리스가 문명을 꽃피울 때에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에 IMF가 찾아왔습니다.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금 올려달라고 시위를 합니다. 높은 나무가 낮아지고, 낮은 나무가 높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나무를 낮추시고, 낮은 나무는 높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푸른 나무도 말리시고, 바짝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만 하시고 이루지 못하는 무능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다윗 왕가가 모두 방해 버린 것 같고, 시드기야 왕이 두 눈 뽑혀 끌려가고,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시온 산에 서시더니 큰 백향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셨기에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당신이 나를 높여 주셨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내가 당신의 어깨 위에 있을 때에 나는 강한 존재가 됩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내가 될 수 있는 가능한 것보다, 당신은 나를 높여 주셨습니다). 

결론 

우리 인생에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첫째, 내 인생을 어디에 깃들일 것인가입니다. 내 인생은 어디에 깃들고, 어느 그늘에 피할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시드기야 왕은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고 했습니다. 애굽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재물, 권력, 쾌락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의지할 것이 못 됩니다.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재물이 그늘이라 믿었는데 사라집니다. 권력과 쾌락이 그늘이라 믿었는데 없어집니다. 

본문 23절 후반에 보면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찌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백향목 가지 그늘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늘에 거하는 사람은 멸망과 지옥의 형벌에서 해방되고, 참 자유와 기쁨과 안식을 누리게 되고, 현세와 내세가 형통 할 줄 믿습니다. 어느 그늘에 거할 것인가는 각자가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낮은 나무와 마른 나무 같은 내 인생에도 소망이 있을까입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하나님의 높이시고, 무성하게 하시는 능력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낮은 나무도 높이시고, 마른 나무도 무성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외적으로 높여주시고, 내적으로 무성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면 크고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입니다. 
 
연한 가지를 심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연한 가지를 큰 백향목으로 성장시키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낮은 나무를 높이시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시는 능력을 갖춘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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