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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이 있도다 온유한 자여! (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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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있도다 온유한 자여! (마 5:5)


마태복음 5장부터 6장, 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말하는데, 이 산상수훈은 기독교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마태복음 5장 첫머리에 있는 여덟 가지 복, 여덟 가지 인격은 기독교, 기독교 신자의 특징을 무엇보다도 잘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여덟 가지 복에 따르는 인격을 보면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세상 사람들은 더더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을 해석하여 조금 더 적용하게 되면 이런 말씀까지 됩니다. ‘세계를 정복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온유한 사람들이 세계를 정복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은 누구인가?’ 온유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면을 본다면 사람들은 잘 믿지 않지만 ‘세상의 부는 어떤 사람이 차지하는가?’ 온유한 사람이 소유한다고 말씀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토지는 어떤 사람이 소유하는가에 대해서도 주님께서는 토지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내용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토지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저는 산이나 들, 자연을 참 좋아해서 갈 때마다 유심히 살펴봅니다. 그래서인지 TV의 NGC라고 하는 National Geography Channel을 보면 항상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여러분, 동물 보호론자들이 보호하자고 하는 동물들은 어떤 동물인가요? 토끼를 보호하자고 하던가요? 약한 동물은 없습니다. 전부 다 강한 동물입니다. 아주 거칠고 힘이 있는 동물들을 보호하자고 합니다. 땅을 차지하고 있는 동물들만 보아도 아무 힘이 없는 약한 것들입니다. 

중앙공원에 가면 토끼들이 있는데 우리 아이가 토끼를 좋아하기 때문인지 그냥 다니고 있는 토끼들을 보면 걱정이 많이 됩니다. 토끼들이 공원에 그냥 다니면서 무슨 소리를 하면 무슨 소린가 하여 쳐다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것들이 땅을, 세상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말씀은 여기까지 포함됩니다. 부유함도 온유한 사람들의 것이다 즉 차지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공격적인 사람, 아주 집념이 강한 사람, 정복력이 있는 사람, 집념을 가지고 자기 꿈을 추구해나가는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차지한다고 말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인간경영에서는 그렇게 들으셨고 배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아십시오. 우리 기독교의 주님, 우리 세상의 주인이라고, 역사의 주인이라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라고 믿고 있고 우리가 고백한 우리 주님은 아주 분명하게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시편 37편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그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할 바, 기독교인들이 소원해야할 바가 바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자들을 가리켜서 -이때 기독교 신자들은 무늬만, 그냥 출석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실로 그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새 것이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 즉 New Born Being 라고 말합니다.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옛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래 부모로부터 태어난 자연인 그 사람은 없어지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새것이 되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만 살았던 사람들, 이 세상에만 살고 있는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기독교 신자가 만일 주변의 세상 사람들, 비기독교인들로부터 저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이다, 무언가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신자라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무언가 좀 달라야합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은 더하겠지만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가기 때문에 무언가 다릅니다. 그리고 신앙 경륜이 더해 가면 더해 갈수록 점점 더 다르게 됩니다. 

현대 교회나 현대 기독교 신자들 중에 필요하다면 교회는 교회의 권력과 교회의 재력과 교회에 있는 인적 자원들을 동원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들이 힘을 합해 기독교의 힘을, 교회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모일 때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모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와 달리 온유한 자가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온유한 자는 자신의 능력이나 권력이나 재력이나 조직적인 힘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영적인 방법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적인 방법은 자기가 가진 돈, 가진 권력, 가지고 있는 인적자원으로 우리가 이런 조직이라고 드러내려고 하지만 우리 주님은 정반대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기드온의 삼백 용사였습니다. 미디안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상당히 어렵게 했습니다. 참으로 심하게 수탈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굶어죽기 바로 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미디안과 전쟁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군사를 모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드온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열심히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하여 3만 2천명을 모았습니다. 그래도 미디안 군사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은 족탈불급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얘야, 군사의 수가 너무 많다. 군사 숫자는 세상적인 방법이니 그 숫자를 줄여라.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돌아가게 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입니다.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억지로 일시키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두려워하는 사람들,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다 돌려보내니 3만 2천 명 중에 2만 2천명이 돌아가고 만 명이 남았습니다. 기드온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그 숫자로는 미디안 군사를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딴 소리를 하셨습니다. 그것도 너무 많다고 말씀하시면서 저 사람들을 데리고 강가에 가서 물을 마시게 하라, 엎드려서 꿇어 앉아 입을 물에 대어 마시는 사람과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사람을 나누어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천 칠백 명이 무릎을 꿇고 입으로 물을 마셨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사람은 삼백 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백 명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왜 삼백 명이었을까요?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사람은 조심스런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숫자가 적은 쪽을 고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영적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숫자로, 돈으로,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방법이고 우리는 영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십시오. 우리는 그저 이렇게 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세상적인 방법에 얼마나 오리엔테이션이 많이 되어있는지 모릅니다. 생각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선택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꾸 성경을 보아야합니다. 

온유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잘 드러내는 것이 다른 사람이 나를 자극할 때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여러분 스스로를 비추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자극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여기에 따라서 그 사람이 온유한 사람인지 아닌지 나누어지게 됩니다. 나를 모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럴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억울하고 저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때 나도 어떤 사람이라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모든 인간들의 기본적인 마음입니다. 이럴 때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이 그 사람을 무시하고 할 말을 다하고 맞서서 이런 저런 일을 다 하는가 아니면 온유함으로 대하는가 여기에 따라서 우리가 온유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나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어떻게 사셨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온유한 사람으로 살았습니까? 아니면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까? 만약 아니라면 오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여러분들은 심각하게 들으시고 받아들이실 필요가 있습니다.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온유한 사람인지 성경의 예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위대한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보겠습니다. 조카와 함께 살아가는데 각각 식솔들이 많아져서 함께 살아가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갈라져야했습니다. 할 수 없이 땅을 이편, 저편으로 나눌 수밖에 없었는데, 조카 롯도 아브라함도 어느 땅이 좋은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실 것이지만 나이가 들면 용기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런 면에서는 욕심이 좀 더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세대가 다른 조카이므로 좋은 땅을 삼촌이 차지해야할 것 같지만 삼촌은 조카 롯이 좋은 땅을 얼마나 선망하고 가지고 싶어 하는지 알았기에 양보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부부간에 의논할 때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의견이 다를 때가 있는데 미안하지만 여성들은 종합적이 되지 못하고 부분적이며 섬세합니다. 아주 세밀하고 구체적인 면은 잘 하지만 종합적인 면에서는 아무래도 남성보다 떨어집니다. 이것은 무엇이 좋다 안 좋다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위대한 지휘자, 위대한 작곡가 그리고 세계적인 요리사 중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본래 남자 여자는 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의논할 때 여성들은 세미하고 부분적인 것에 좀 치우치기 쉬우므로 남편 생각에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될지라도 아내가 이것은 꼭 좀 이렇게 해야겠다고 말할 때, 절대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아내의 의견에 따르는 사람이 온유한 남편입니다. 저 사람의 생각에 35% 동조되고, 내 생각에 65% 동조될 때에도 큰 탈이 날 일 아니면, 절대적인 문제가 아니면 서슴없이 양보하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회의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여겨지지만 다른 사람이 꼭 그렇게 주장하는 경우, 그것이 절대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똑똑함이 세상을 잘 만들어가는 경우가 없습니다. 세상을 잘 만들어 가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평화를 염원하는 것입니다. 똑똑한 대통령이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사람들이, 덕이 있는 가장들이 평화로운 가정, 좋은 가정을 만들어갑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이제 모세를 보겠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온유함에 대해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라고 아주 극도로 치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칭찬하셨는데. 어떨 때 이 말씀을 하셨는지 잘 보아야합니다. 

아론과 누나 미리암 두 사람이 모세를 비난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에디오피아 여자와 결혼하였는데 이것을 비난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모세가 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세를 비난할 때 이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는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12:2)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에디오피아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핑계 삼아 모세의 지도자됨을 비난한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모세가 그들로부터 비난을 받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도자역할을 같이 하다 보니 자기도 최고의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란 처음에는 겸손하다 나중에 한없이 올라가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브가 결국 어디까지 갔습니까? 이브는 하나님처럼 눈이 맑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 한계를 잘 지키는 사람이 정말로 현명한 사람인데 이브는 결국 선악과를 따먹어 눈이 밝아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습니까? 한계를 잘못 지키면 그런 문제가 생겨납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가 상당히 당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다 못해 일어서셨는데 그것을 성경은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민12:4)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12:8) 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많이 참으셨던 것 같습니다. 모세가 아무 항변도 못하고 너무 당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모세의 비난에 앞장섰던 누나 미리암에게 문둥병을 주셨습니다. 미리암이 그 자리에서 하얗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잘못이니 누나 미리암을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사정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당신이 보기에 저들이 너무 심하니 일주일 정도는 문둥병에 걸리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당해도 괜찮습니다. 그것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자꾸 괴로워합니다. 자존심이 인간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압니까? 가장 바보 같은 노릇입니다. 

어제도 결혼식이 있었는데 부부 둘 사이에 자존심을 없애라고 빠지지 않고 당부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못난 남자가 아내 앞에서 자존심 운운하는 남편입니다. 자존심 내세울 때가 없어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할 아내 앞에서 자존심 운운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교회 와서 자존심 운운하고 있습니까?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어떻게 그 앞에서 자존심을 운운합니까? 애통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존심 운운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바보처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서시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이 방법입니다. 우리가 나서면 세상만 시끄러워집니다. 하나님이 나서시면 한칼에 해결됩니다. 이것이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방법입니다. 얼마나 편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다윗을 볼까요? 조국 이스라엘과 자기의 왕이며 장인인 사울을 위해서 얼마나 충성했습니까? 장인이 몸이 좋지 않을 때마다 치료해주었고 아무도 나서지 않는 골리앗과의 전투에 생명을 걸고 나섰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할 그때마다 나가서 조국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에게 수모밖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장인인 사울이 그에게 얼마나 수모를 주었는지 모릅니다. 자기 딸 메랍과 결혼하라고 약속하고도 빼앗아 다른 남자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독입니다. 이렇게 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반감을 가지게 한 후, 그를 처치하려고 그렇게 못된 짓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병들어 죽을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치료해준 다윗이었는데 다윗이 그렇게 열심히 치료하고 있던 중에도 방심하던 틈을 타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던 것이 몇 번이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서서 왕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

마지막으로 신약에 나오는 스데반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광경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온몸이 으스러지고 깨집니다. 정말로 고통스럽습니다. 저도 많이 맞아보았지만 맞는 것은 정말로 힘듭니다. 돌에 으깨어 죽는 스데반에 대해서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스데반은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원망하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보면 됩니다. 성경은 그가 잠자듯이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그렇게 죽지 못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사실 온유하면 자기가 좋습니다. 너무너무 좋습니다. 행복해집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의 온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온갖 희롱을 다 당하셨습니다. 정말 수치를 다 당하였습니다. 수치란 당하면 정말 힘듭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놀리느라 홍포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왕이라고 가시관을 씌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라고 희롱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침을 뱉고 갈대를 뺏어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그렇게 가시 면류관을 치면 피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림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이 광경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우리가 잘 알지만 예수님 당신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얼마든지 천사와 천군을 불러 한꺼번에 손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냥 당하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온유라고 합니다. 

돈을 가지고 있지만 돈 없는 사람처럼 하고, 배울 것 다 배우고, 말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지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배우고 말 못하는 사람처럼 하는 이것이 온유입니다. 

우리가 이 온유함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야할 것은 온유함은 생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천성적인 것은 아닙니다. 본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은 우리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노력하면 조금 더 빠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그 속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진실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점점 더 온유하게 됩니다. 예수님 믿고 세월이 지나가게 되면 온유하게 됩니다. 만약에 예수를 믿은 지 상당히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큰 소리 잘치고 분을 잘 내고, 다른 사람을 잘 비난하고 잘 비판하는 사람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온유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한 번 볼까요? 그가 본래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자기 조카 롯이 그렇게 끌려갔을 때 치욕을 당할 것을 생각하고 자기 집에서 훈련시킨 하인들 삼백 명을 데리고 가서 네 개 나라 연합군과 전쟁했습니다. 얼마나 힘 있는 사람입니까? 본래부터 그렇게 양보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길들어진 것입니다. 힘 있게 나갈 때는 힘 있게 나가고, 연할 때는 연하게 하였습니다. 

모세를 보겠습니다. 자기 형님과 누나에게 한 마디도 대들지 못하였지만 옛날에는 어떠했습니까? 옛날에 에집트 사람과 싸워 죽인 후 땅속에 묻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세가 자기 형님과 누나가 자기가 에디오피아 여자와 결혼한 것은 핑계일 뿐 자기 자리를 가지고 이야기했을 때 자기가 본래 부족하다고 여기고 당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아주 단련된 세련함이 있었습니다. 

다윗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본래부터 그리고 늘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도 못하고 분연하게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장수들이 아무도 나서지 못했을 때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분연하게 일어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속에 의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래부터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아야합니다. 이런 세련됨이 있어야합니다. 

다윗이 기르던 양이 사자에게 물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냥 보았습니까? 사자와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사자와 싸움을 했겠습니까? 양을 너무너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양은 그냥 동물이 아니라 이름까지 다 지어주었고, 자식과 같았습니다. 다윗이 참지 못하고 사자와 싸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다윗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은 마지막에 잠자듯이 죽어가면서 원수까지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그 공회에서 재판관들에게 큰소리치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법원에 가보셨습니까? 최근 보도에도 판사들이 20%정도가 원고와 피고에게 말을 함부로 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만 그렇겠지만 가보면 별로 유쾌하지 못하고 참 무서운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까지 죽인 그곳에서 스데반은 어떻게 큰소리치고 있습니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행7:51)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아무도 못합니다. 그는 또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7:51-52)라고 말했습니다. 재판관들에게 가장 큰 모독이 바로 이것입니다. 재판관들은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고, 법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에게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가장 큰 모독입니다. 자위적으로 재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죽을 때 천사처럼 온유하게 죽어가지 않았습니까? 

온유는 성령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자꾸 만들어집니다. 예수님이 마음속에 계시는지 자꾸 확인하고 예수님과 함께 살다보면 됩니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을 생각할 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할 일을 하지 아니하는 나태함입니다. 남편이 남편으로서 분연히 일어서야할 때 일어서지 못하는 나태함, 무기력함, 연약함 그런 것들은 온유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타협할 때, 정당하게 타협해야지 좋은 것이 좋다하여 비굴하게 타협하는 것은 온유함이 아닙니다. 또 다른 목적을 위해 정당하지 못하게 타협하는 것, 이것은 온유함이 아닙니다. 또 하나는 사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음에도 겉으로 가장한 온순함은 온유가 아닙니다. 위선이고 쇼입니다. 

온유를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잘 길들여진 야생마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시키는 말을 잘 듣는 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방지축 같은 사람이 잘 길들여진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개 한 마리가 있는데 그 개를 산책시키고 싶은데 우리 속에 가두어두어서인지 잘 안 됩니다. 산책하다보면 작은 개들이 겁이 나서 달려드는데, 좀 봐주면 좋을 텐데 물어버리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작은 개가 물려 죽은 적도 있었습니다. 사람은 물지 않는 훈련은 되어있는데, 다른 강아지한테는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온유함이 아닙니다. 물라고 하면 물고, 참으라고 하면 잘 참아야 합니다. 온유함이란 훈련된 짐승처럼 말을 잘 듣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심령이 가난한 것과 애통하는 마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나는 하나님 없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내 죄, 다른 사람의 죄, 세상의 죄로 말미암아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장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어떻게 주장합니까? 

그리고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방어하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적어도 방어는 하려고합니다. 적어도 방어만큼은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어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보시는 것처럼 모세가 나서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나서지 않으십니까?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방어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늘 배우려는 자세를 가집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알아도 그렇습니다. 어설프게 아는 사람이 자꾸 아는 티를 냅니다. 배워도 어설프게 배우는 사람은 자꾸 배운 것을 티내려고 합니다. 제대로 알면 아직까지 한없이 모자라고 더 배워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꾸 배우려고 합니다. 온유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도 조금이라도 더 배우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바로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항상 만족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만족합니다. 부족해도, 넉넉해도, 얻어도,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겨도 만족합니다. 이것이 바로 땅을 차지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항상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이것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발4:13)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모든 환경, 모든 상황에서 나는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이 진짜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넘쳐납니다. 가졌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상태입니다. 없어도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많이 가져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 한 푼 제대로 쓰지 못하고 벌벌 떠는 사람이 세상에 참 많습니다. ‘좀 없어도 부족하게 살면 되지, 한 끼 덜먹으면 되지’ 이런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넉넉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이 사람들이 땅을 차지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다시 주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복이 있도다, 온유한 자들이여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예수님의 선언이고 하나의 약속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면 내가 땅을 주겠다는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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