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은 우리의 참 친구이십니다 (요 15:13-17)

  • 잡초 잡초
  • 923
  • 0

첨부 1


예수님은 우리의 참 친구이십니다 (요 15:13-17)
   

월남 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있었던 실화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군대의 작전이 아주 불리하게 작용하면서 베트콩에게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명령에 따라 작전상 후퇴하고 있었는데, 한 병사가 베트콩이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전 병사들이 안전지대 참호로 대피하였는데, 한 병사가 후퇴하던 중에 총에 맞아 쓰러진 것입니다. 

다른 한 병사가 중대장에게 나와 말하였습니다.  “중대장님, 총에 맞은 저 병사는 제 친구입니다.  제가 구출하러 가겠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데 총에 맞아 쓰러진 친구를 구출하려고 그 지옥 같은 전방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중대장이 말렸습니다.  “안 돼, 그러다가는 너도 죽을 수 있어.  위험해. 내가 망원경으로 보니 그 친구는 벌써 죽었어.  무모한 짓 하지 말라.”    

그럼에도 이 병사는 중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구출해야 한다고 전방으로 달려갔습니다.  한참 만에 그 병사가 나타나는데,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친구를 등에 업고 참호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상한 대로 그 친구는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중대장이 말했습니다.  “그것 봐라. 자네 친구는 이미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나? 왜 쓸데없이 고집을 피우고 그래. 하마터면 너도 죽을 뻔 했잖아?”라고 야단쳤습니다.    

하지만 그 병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제 친구는 제가 등에 업고 이리로 올 때에 내 등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올 줄 알았다.  네가 반드시 올 줄 알았다. 너와 같은 친구가 있으니 정말 행복하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하고 죽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중대원들은 숙연해졌습니다.  그 후 그 부대는 전우애로 뭉쳐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친구 하나 있어야 합니다.  ‘너 같은 친구가 있어 죽어도 좋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그런 친구가 있어야 하고, 그런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값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받을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죄인이었고, 하나님과 원수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람이 없나니”(13)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반드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겠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시겠다,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겠다, 가장 큰 사랑으로 구원하겠다는 의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잘 사는 사람들, 교권을 가진 사람들, 정치적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 당시의 로마의 관리들을 찾아가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 유대교에서 가장 소외된 창기와 세리들,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태복음11:19에서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은 정말 예수님도 하류민이요,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친구를 보면 그의 신분이나,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이 “너희는 내가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4)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하면서 당신이 명하는 대로 준행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대신 준 친구의 말을 잘 들어줄 때에, 진정한 친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옛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의 벗,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곧 야곱의 자손들을 부를 때에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사야41:8에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의 사랑하는 벗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감히 사람이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여러분,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   “친구, 친구야 많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입니까?   진정한 친구라고 하니,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다는 이들도 있을 것이요,  나는 진정한 친구가 한 명은 있다고 하실 분도 있을 것이요, 나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없다고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친구가 없다면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아내는 누이요, 친구요, 애인이 됩니다. 

스티븐 존슨 박사는 진정한 친구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금방 부를 수 있는 친구, 당장에 달려올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까?  없다면 당신은 친구가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참 설명해야 하고, 간곡히 부탁하면 마지못해 와줄 친구는 있어도,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올 그런 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내가 곤경에 빠졌다고 하면 은근히 고소하게 생각할 친구도 없지 않습니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정말 미흡하기만 합니다.  내가 먼저 그런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였으니, 할 말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내가 기뻐할 때에 어떤 사족을 달지 않고 함께 기뻐해줄 수 있는 사람, 나는 정말 기뻐하는데 나의 기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친구가 기뻐하니 함께 기뻐하고, 친구가 어려워하니 함께 어려움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친구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울 때에 선뜻 돈을 빌려주고 내가 그런 돈이 없으니 보증을 서주면서 융통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쯤 할 수 있어도 두 번 세 번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    지금 당장 달려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그런 친구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예수님은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정말 감동이 됩니다.  감격입니다.  너무나 고마우신 말씀이기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이라도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말입니까?  

친구는 과연 어떤 사람이 친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런던타임즈가 친구의 정의에 대해서 현상 모집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1, 2 3등이 나왔습니다.  3등으로 당선된 사람의 정의입니다.  “내가 기쁜 마음을 가지고 만나면 기쁨이 배가 되고, 내가 고통스러울 때 만나면 고통이 반으로 감해지는 사람이 친구이다.”   2등은 “너무 괴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할 때, 그 말 없는 말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1등입니다.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 그 때 찾아와 주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잠17:17)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18:24)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친구사이를 말할 때에 다윗과 요나단, 다윗과 후새를 들게 됩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들의 친밀한 우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삼상20:17)  삼상18:1에도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생명같이 사랑하였다”는 말은 몇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친구 다윗을 좋게 말하다가 아버지로부터 욕을 먹었습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삼상20:30) 이런 말은 권면이나 충고하는 말이 아니라, 지독한 욕입니다.  그래도 요나단은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이렇게 말씀드리니, 왕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요나단은 심히 분노하면서 식탁을 떠났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아버지가 미운 나머지 식탁에서 떠나고, 둘째 날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는 것을 보고 슬퍼하였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요나단이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사1:26)라고 슬퍼하였습니다.  

다윗은 후새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후새가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차지한 아들 압살롬에게 들어갔습니다.  압살롬은 후새가 아버지의 친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후새가 아들 압살롬을 찾아와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니 압살롬이 후새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후새는 압살롬을 안심시키며 자기는 여호와 하나님과 온 백성이 택한 그 사람과 함께 할 것이라고 하면서,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라고 압살롬을 왕으로 추켜 세워주며 충성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을 위하여 압살롬에 들어가서 당대 최고의 모사요 전략가인 아히도벨이라는 말하는 계략을 뒤집어 놓고 다윗으로 승리하게 하였습니다.  후새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좋은 친구를 두고 있었고, 변함이 없었습니다.  요나단과 후새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다윗의 위대함은 그런 친구를 둘 수 있는 인간성에 있습니다.  

친구를 주제로 설교하는 많은 목회자들이 인용하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그 시는 함석헌 선생님이 쓰신 시입니다. 

제목은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는 시입니다.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눈을 감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런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고, 그런 친구를 사귈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그런 친구를 찾아볼 수 없고, 나 역시 그런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불행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모른다고 하지 않고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겠다고 자원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종의 의식, 노예의식으로는 창의성이 없고, 또한 책임성도 없습니다.   그냥 시키는 일이나 하고, 명령이 없으면 앞에 놓여 있는 밥도 먹을 수 없는 것이 종된 의식입니다.  주인이 시키지 않는데, 일은 왜 할 것이며, 공연히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이나 만들고 있다고 야단을 맞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종으로 평생을 살다보면 오로지 한 가지만 시켜야 마음이 편하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골라서 하라고 하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고, 선택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종이라는 말을 들어도 황송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종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친구로 대해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장신대 71기로 졸업하였는데, 저의 동기들 중에는 힘들게 목회하신 동문도 있지만, 한국교회를 대표할만한 훌륭하신 동문목회자도 계십니다.  교단 총회장이 3분이나 나왔습니다. 

78년 1월에 장신대를 나와 한해도 거르지 않고, 동문수련회를 개최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저희 동문들은 동문들의 자녀가 장신대를 들어가면 전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무슨 돈이 남아서 준 것은 아니고, 아버지를 뒤 이어 목사가 된다는 것만 해도 자랑스러워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홀로 남으신 홀사모들이 20여명이 됩니다.   그만큼 목사님들이 많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도 연말이 되면 남은 목사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홀사모들에게 100만원 정도는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신대 71기 동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27: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이 말씀은 친구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자랑하고 서로 이끌어주고 서로를 높여주면서 함께 성장한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으로 랍비이신 마빈 토케이어는 탈무드를 현대인들에게 알기 쉽게 풀이하여 ‘몸을 굽히면 진리를 줍는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보면 ‘개와 놀면 이가 옮는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을 요약해보면 “완전한 친구를 원하는 사람은 한 사람의 친구도 없다. 좋은 것은 오랜 친구와 오래된 술, 나는 거기에 늙은 아내와 늙은 개를 더하고 싶다. 좋은 친구를 가지면 자신도 저절로 발전한다. 오랜 친구 한 사람은 새로운 친구 열 사람보다 귀중하게 알라. 친구가 없는 사람은 한쪽 팔이 없는 인간과 같다.  철새와 같은 친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계절이 바뀌면 날아가 버린다. 개와 놀면 이가 옮는다.”라고 했습니다. “오랜 친구 한 사람을 새로운 친구 열 사람보다 귀중하게 알라. 친구가 없는 사람은 한쪽 팔이 없는 인간과 같다” 탈무드에는 주옥같은 말씀들이 많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으로 많이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사람이 죄인과 친구가 되면 죄인 취급받게 되어 있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시려고 죄인의 모습으로 오시고 보니, 죄인 취급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더러운 정욕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타락하여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우리를 건져내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죄인이 지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로 부르면서 몇 가지 당부하셨습니다. 

첫째는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친구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열매를 맺어달라고 하십니다.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열매를 맺으라고 친구로 부르셨습니다. 종의 의식을 가지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기에 친구로서 일하여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로는 기도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도를 응답하시겠다고 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려고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과 우리 사이가 주인과 종의 관계라고 하면 주인은 종의 말을 다 들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친구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세 번째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17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 안에서 형제요, 참된 친구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 형제요, 자매가 되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친구와 같은 교제여야 합니다.  우리는 다 같은 주님을 모셨고, 한 자리에 앉아 있으며, 우리는 다 죄인이었다는 점이 같습니다. 진정한 형제애를 가져야겠습니다. 

여러분 산다는 것을 “Live”라고 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Love”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원은 같다고 합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가장 사랑할 대상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했는데 친구란 누군가가 먼저 주도적으로 출발을 해야 됩니다. 모든 사람이 내게 친구 되어 주기만을 바라고 기다리면 죽을 때까지 친구를 사귈 수 없습니다.   내가 좋은 친구가 먼저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 주도적으로 내가 너를 사랑했다. 택했다. 먼저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모임에 적극적으로 나가서 친구를 사귀고 만들어야 합니다.  집안에만 들어 앉아 있으면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 주님이 우리를 종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주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믿음의 든든한 동역자들이 되시고, 서로를 이끌어주는 친구가 되시고, 참 친구이신 주님을 모시고, 열매맺으며 기도 응답을 경험하시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