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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이신 그분 안에 거하십시오! (히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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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이신 그분 안에 거하십시오! (히 13:5-6)

히브리서 13장 5-6절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거한다!
“참 별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원하는 것들이 특별한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 특별한 날들이 모이고 나니 그저 보통의 일들입니다.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을 보면 언제나 누군가에게 아니면 어떤 일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우리를 지배해 나갑니다. 걱정에 사로잡히는 순간 모든 일이 근심과 걱정으로 어두워집니다. 심각한 것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인데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에 매달리는 경우입니다.

신유의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 늘 하나님은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십니다. 언제까지 병을 고쳐줘야 하는지 모르지만, 병이 낫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게 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떤 사모님이 교인들을 모아놓고 기도를 시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방언’이 터질 때까지 가운데 놓고 기도합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이 거짓으로 방언하는 경우도 봅니다.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현상 중의 하나인 ‘쓰러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쓰러질 때까지 밀고, 결국은 민망해서 쓰러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상을 쫓아다니는 신앙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쓰러뜨리는 사역에 관심을 가지다가 하나님께서 갑자기 그런 마음을 주셨답니다. 
“목사가 교인을 세우는 일을 해야지 매일 쓰러뜨려서야 되겠는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 모든 현상을 뛰어넘는 훨씬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정확하게 끊어서 보겠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왜냐하면,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왜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나요?
왜 우리가 있는 것에 족할 수 있나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서 붙들어 주시겠다.”라고 말입니다. 
왜 우리는 돈을 사랑하려고 하나요? 돈이 우리에게 주는 안정감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을 살아가는데 돈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그런데 문제는 돈을 가져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돈은 없어서도 불안하지만, 있는 것이 없어질까 봐 불안하고, 돈이 있어서 만족한 것이 아니라 더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불만족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돈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한 우리 삶에 만족감과 행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우리 삶에 최고이신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기들은 엄마를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의식 속에 늘 엄마가 있습니다. 뿌리 깊은 그 의식은 아이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생각하지 않고 주저함없이 엄마를 찾습니다. 저절로 엄마를 찾는 것이죠. 그리고 그 엄마의 품 안에서 평안함을 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현상에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 하나님을 향한 의식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이죠.

19세기 초의 복음 전도자이자 목사인 윌버 채프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가 가라앉는 이유는 배가 물속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물이 배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것이 위험한 일이다. 
초대교회는 그들의 전략을 축복해 달라고 간구하지 않았다. 교회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들이 필요하지 않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열정적으로 전파하고, 정말로 그 진리대로 사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주변의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원초적 행복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삶과 세상을 보는 ‘프레임’입니다. 프레임 바뀌지 않는 한 이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프레임에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프레임으로 인생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 안에 거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4장 이하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이 하나 등장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납니다. 그리고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베드로가 주님께 말합니다.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마14:28)

풍랑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간 베드로가 경험한 기적입니다. 그렇죠? 문제 가운데서, 풍랑 가운데서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풍랑이 일어난다고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풍랑 가운데서도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의 눈이 자신이 처한 형편과 처지로 향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마태복음 14장 30절입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실제 우리 삶에는 늘 바람과 풍랑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많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당신의 시선이 주님을 떠나게 되고 점점 가라앉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며 열심히 산다는 것과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아주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할 말을 전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입니다 .
“순종의 모조품은 열심이다!”

자기 멋대로 자신을 희생시키는 마음 상태입니다. 이러한 열심이 종종 영적 분별을 대신하곤 합니다. …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으로 당신의 삶 속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자신을 희생시키는 그 어떤 위대한 열심보다 훨씬 귀한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진정한 순종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거창하게 주를 위해 “죽는 것”을 생각하기도 하지요. 
제가 어렸던 시절 주일학교에 가면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특히 한국 전쟁 때 순교한 목사님들의 이야기, 그리고 주기철 목사님의 이야기와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그때 참 많이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도 과연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죽을 수 있을까?

그런데 요즘 깨닫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버리라고 하시기보다는 주님을 위해 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 내 삶을 내려놓으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깨닫게 되는 것이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말입니다. 
순종이 어려운 것은 순간의 열심이 아니라 계속되는 내 삶의 내려놓음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분 안에 산다는 것은 그런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결코…

그럼 그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 중의 가장 강조한 부분이 오늘 본문에서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3장 5절을 보세요. 두 개의 문장인데, 하나는 “버리지 아니하고” 다른 하나는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버리지 않겠다는 말씀 가운데는 우리가 버림 받을 만한 짓을 했는데도 버리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행동과 관계없이 방치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돌아오면 언제고 받아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 이기심, 고집스러움, 탈선, 부끄러움에도, 언제나 주 안에 거할 기회가 없어지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셨다는 느낌을 받으시나요?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려울 때’ 보다는 ‘지겨울 때’가 아닌가요? 오히려 고난 가운데서 더욱 친밀함을 느끼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만, 지루한 일상이 계속되고, 우리 인생의 비전도 사라지고, 도전하지 않을 때의 지루함 말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가장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때”가 아닐까요?

결국, 우리 신앙의 도전은 특별한 때가 아닌 일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위기 가운데서 증명되는 신앙은 빛이 납니다. 그러나 그 빛이 유지되는 것은 일상입니다.

그러면 그 일상이 어떻게 유지 될 수 있나요? 늘 그분 안에 거할 때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미 이 영화를 보신 분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이 되는데, “보호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죠. 

존 오트버그의 책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랑 이야기」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세 자녀에게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돌보심 안에서 살 수 있는지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베어(Bear)>라는 영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엄마를 잃은 아기 곰이 겪는 모험 이야기입니다. 

엄마 곰은 죽고 아기 곰은 살아남지만 보는 이들은 그 아기 곰도 머잖아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덩치가 무지 큰 코디엑 곰이 이 작은 아기 곰을 제 새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관객은 이를 보고 희망으로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어느 날 이들은 서로 떨어지게 됩니다. 아기 곰은 아무리 둘러봐도 아빠 곰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때 호시탐탐 아기 곰을 노리던 쿠거란 녀석이 조용하고 민첩하게 다가와 아기 곰 앞에 섰습니다. 아기 곰은 몸을 일으켜 세워 앞발을 들고 으르렁거려 봅니다. 하지만 녀석이 낸 소리는 낑낑 겁먹은 소리였죠. 그런데 쿠거의 얼굴에 갑자기 두려움이 떠올랐습니다. 녀석은 으르렁거리던 것을 멈추고 몸을 돌려 슬금슬금 그 자리를 떴습니다. 그때 카메라는 관객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아기 곰 뒤에는 커다란 아빠 곰이 서 있었습니다. 그 거대한 몸으로 한 방에 아들을 구해 낼 자세를 취하면서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당신과 내게도 해당하는 진리입니다. 때때로 두려움이 들 때 우리는 혼자라는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결코 그분의 돌보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 비유”보다 더 정확하게 “그분 안에 거함”을 잘 설명하는 것은 없을 듯합니다. 아버지는 농부, 예수님은 포도나무, 그리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농부이신 아버지의 돌보심을 받고, 포도나무에 연결되어 있는 가지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단지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가지는 나무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나뭇가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연결되어 있으면 됩니다.

문제는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서 꺾여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잠언 17장 22절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나뭇가지가 꺾여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분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욕심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말했으며, 골로새서 3장 5-6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참 신기하죠? 목회를 잘 하던 목사님들에게 명예에 대한 욕심이 생기면 하나님의 뜻이 보이지 않습니다. 음욕 역시 욕심이죠. 빠지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해야 축복인데, 하나님이 마음 중심에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를 짓습니다. 
“욕심”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던 생명력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는 바로 표시가 나지 않지만 서서히 말라갑니다. 결국에는 누군가 던져서 불에 던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분을 떠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피폐해 질 수 있는지를, 세상 사람이 얼마나 쉽게 이 마른 가지들을 멸시하는 지를 보지 않습니까? 나무에서 떨어져 생명력을 잃은 가지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 열매를 맺을 때 귀한 것이지, 말라버린 가지는 비참한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보세요.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기독교가 훨씬 먼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던짐을 받고 짓밟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개화 초기 중국에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아편 장사를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교회에 있었습니다. 돈에 욕심을 가진 영국의 제국주의와 함께 중국 교회는 탐욕으로 섞어 있었습니다. 아편을 팔아 돈을 번 사람들이 교회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거룩한 척을 해도 이미 생명력을 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징계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게 되죠.

공산주의가 들어왔을 때 가장 핍박을 받은 것이 교회였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이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들은 선한 열매를 맺을 힘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역사가 러시아에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 국가 재산의 3분의 2를 러시아 국교회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성직자가 된다는 것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물질적인 욕심으로 탐욕으로 타락한 그들에게 공산주의 혁명은 좋은 불쏘시개에 불과 했습니다. 그들은 타도의 대상이었고 그 후 70년 동안 러시아에서 교회의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그분 안에 거하지 못함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시나요?

또 하나 “교만”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순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생명줄이 끊어집니다. 
잠언서 16장 5절과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욕망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자신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 말씀을 보세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한번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세요. 여러분은 언제 찬송하시나요? 기쁠 때, 행복할 때 부르는 것이 찬송입니다.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찬송하도록 지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가장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죠.

교만한 자가 왜 행복하지 못한가요? 자신이 최고인 줄 아는 자는 늘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넘어서는 자가 있을까 봐, 삶을 누리기보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합니다.
낮아지기로 결심해 보세요. 얼마나 행복해지는지.

아마도 많은 사람이, 특히 남자들이 그런 경험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어떤 모임에 가든지 자기에 합당한 자리를 앉아야 하죠. 문제는 자신이 자기를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자신을 생각하는 위치가 다를 때입니다. 어떤 행사에 가도 실무자들이 제일 많이 신경 쓰는 것이 자리 배치입니다. 거기에서 한 번 삐치면 다시는 그 모임에 오지 않습니다.

제가 만나 교회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 외부 행사로 시작했던 것이 차병원에서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기도하거나 설교하는 일이었습니다. 순서를 맡아 가면 언제나 어느 의자에 누가 앉는지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차병원에서 가장 귀한 사람은 설립자고, 그 다음은 실제로 경영하는 사람, 그리고 차 의과대학 총장, 의료원장, 병원장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자리가 참 중요해 보였습니다. 내가 어디에 앉느냐에 따라 가치가 정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참 신기하죠? 자리에 연연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그런 것에서 참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가능하면 낮은 자리에 앉아 섬겨야 한다고 의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교만의 한 단면이지 모르겠지만 겸손해야 높아진다고 생각하죠. 결국, 이런 마음조차 극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도 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를 섬기고 자기를 찬양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자기를 자랑하는 교만이 앞서면 패망하고 맙니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교만하고서 영존한 존재는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교만해져서 자기의 지위를 가지고서 성도 위에 군림하려고 하면 결국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당하고 말라버리고 말 것입니다. 

언제나 물은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넘쳐나는 것이지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높아지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서 흘러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낮아져서 하나님께 엎드리면 은혜가 자꾸 채워지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데 또 하나의 장애가 되는 것은 ‘불신앙’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신앙은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돈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에서 끊임없이 양분이 공급됨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할 때입니다. 두려운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도우시는 분에 대한 믿음이 없는 데 어떻게 내가 잡은 손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무더운 여름날 중앙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빌립이라는 아이가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노는데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소리를 쳤습니다. 
“빌립아! 빌립아! 아빠가 시키는 대로 배를 땅바닥에 데고 바짝 엎드려라! 어서!” 

빌립은 영문도 모르고 그냥 땅에 갑자기 탁 엎드렸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다급한 말에 순종하여 그대로 땅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제 아빠가 있는 곳으로 빨리 배로 기어와라! 기어라!” 좋은 옷을 입고 있는데 흙에 기면 옷이 다 더러워지는데 왜 아버지가 기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진흙 속에 그냥 기어서 아버지께로 오니까 아버지가 이번에는 “일어나 뛰어라! 일어나 뛰어라!” 그래서 아버지 말대로 일어나서 쏜살같이 뛰어서 아버지 품에 안겼습니다. 

아버지가 빌립을 끌어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립아 정말 잘했다. 이제 뒤로 돌아 나무를 한번 쳐다보아라.” 나무를 쳐다보니까 아프리카에서 사람 잡아먹는 거대한 뱀이 꼬리를 나무에 감고 바로 빌립이 있는 자리까지 머리를 내려뜨리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는데 빌립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으면 그는 뱀의 밥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가 엎드려라. 기어라. 뛰어라 하니까 그대로 순종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 그의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참 신기하죠?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하는 자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어떤 역사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나중에야 알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일을 하라고 명령하시는가. 처음에는 알지 못해도 무조건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하고 믿고 보면 나중에 지나고 난 다음에야 “아~ 이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구나!”하는 것을 뒤에야 깨닫습니다. 

사람들은 알고 믿겠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으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믿고 순종하면 나중에 알게 되지, 알고 믿고 순종하겠다면 벌써 때를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부러워하는 ‘여호와 이레’의 축복과 기적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바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경은 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나요? 우리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 안에 안식을 거하는 자만이 누리는 축복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신데 말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해보지 않고는 왜 기도하라고 하셨는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왜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는지,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세상이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왜 봉사라라고 하는지, 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참 많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순종하기에는 너무 두려운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까,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악한 일이나 잘못된 일을 경험했을 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면, 그분은 절대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서움”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문제에 집중할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골리앗을 보고 두려워했던 것은 그의 큰 덩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에 두고, 그 땅을 차지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그 땅 백성의 장대함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자신이 메뚜기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담대해지겠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 늘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며 누리는 축복을 시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편 103편 5절입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독수리의 가장 큰 특권이 무엇일까요? 일반 새들이 날아오를 수 없는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이런 글이 있더군요. 까마귀가 독수리를 괴롭힌다고 합니다. 몸집은 독수리보다 작지만 날렵하기 때문에 방향을 빨리 바꿀 수 있기에 독수리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독수리가 까마귀는 날아오를 수 없는 2만 피트 상공으로 올라가면 따라오지 못한답니다. 독수리는 까악까악 거리는 까마귀와 귀찮게 상대하기보다는 높이 날아 올라가면 되죠.

친밀함이 있겠죠?

시편 25편 14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우리가 친밀함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도 나에게 친한 사람인지 말입니다. 우리는 친밀한 사람에게 우리의 비밀을 다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우리의 비밀을 이야기하고, 기쁜 일이 있을 때 그 기쁨을 알리기 원합니다. 그 표현이 때로는 물질의 봉헌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시간의 헌신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친밀함은 우리의 행위로 보상하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상대방으로부터 비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참 어려운 것 같은데 ‘경외함’과 ‘친밀함’이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경외함은 그분 앞에서 우리의 머리가 숙여지고 명령을 듣고 음성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외함’과 ‘두려움’은 엄격히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두려움은 상대방의 힘에 눌리는 것이지만, 경외함은 그 능력 때문에 감사하고 예배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크면 클수록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그분을 신뢰하고 예배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습니다.
때로 그분이 아주 비밀한 부분을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 가운데서 우리의 세밀한 부분까지 간섭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밀함”입니다.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종과 순종을 통해서 주님의 몸 안에 들어와 있고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에 동부에 있는 사람들이 서부에는 황금이 많이 나온다고 하니까 황금을 캐기 위해서 마차를 타고 밤낮없이 서부로 뛰어갑니다. 한사람보다도 더 앞서가야 황금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지도 아니하고 쉬지도 아니하고 밤낮으로 달렸습니다. 동부에서 서부까지 걸어가면 얼마나 뭡니까? 가다가 말이 쓰러져 죽고 사람들도 지쳐서 병들어 죽고 간혹 서부에 도착한 사람도 너무나 과로했기 때문에 병이 들어 죽곤 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서부에 도착해서 하나님도 잃어버리지 않고 황금도 얻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철저한 청교도 신자들이었습니다. 동부에서 출발해서 열심히 밤낮으로 뛰다가도 주일이 되면 여행을 그치고 말도 쉬게 하고 가족들이 다 모여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고 쉬었습니다

성경말씀에 성수 주일하라는 말씀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토요일까지 열심히 말을 달리다가 주일날은 휴식하고 안식했기 때문에 몸도 쉬고 영도 살찐 꼴을 먹고 심신이 건강해서 서부에 도착해서 신앙도 잃지 않고 그들은 황금도 발견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 순종하면 그 순종을 통해서 은총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믿고 의지해야 예수님 안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순종할 뿐 아니라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고 자꾸 의심을 하고 불신앙을 가지면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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