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1-8)

첨부 1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1-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누가복음 기자는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인즉 제자들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취임한 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강조한 공약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공약들이 있지만 그 공약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국민 행복 시대를 열어 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국민의 행복을 그토록 강조한 것을 보면 그 동안 우리 국민들은 별로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책임을 지도자들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래도 지도자들에게 전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우리 국민들을 얼마나 많이 실망시켰습니까? 차라리 기대하지 않았으면 실망도 별로 크지 않았을 텐데...

예수께서 사역하시던 당시 사람들의 삶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도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실망이 커서 그랬는지 몰라도 기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낙심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간혹 낙심되는 일이 생기는 정도가 아니라 낙심되는 일이 아주 많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 항상 기도해야 한다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답답한 상황에서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기도뿐이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일찍이 다니엘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흠이 없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혜롭고 또 학문에 익숙했습니다. 바벨론 나라의 왕궁에 설 만한 인재였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비롯한 젊은 청년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도록 지시했습니다. 또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를 공급하도록 했습니다. 나름대로 특별 환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환관장에게 그런 사정을 말했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관리가 되는 것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왕이 공급하는 음식은 거부했습니다. 그는 현실은 인정했지만 그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바벨론 나라에 살고 있었지만 그 나라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다리오 왕 때에 사자 굴에 던져지는 무서운 벌을 받을 줄 분명히 알면서도 늘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의 말씀의 배경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눅 18:2)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대상은 불의한 재판장입니다. 재판장은 사람들 사이의 다툼을 법에 따라 판결해야 합니다. 재판을 통해서 사회 질서를 바르게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인권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권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어떻게 바른 재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재판장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법과 양심이 아니라 형편에 따라 멋대로 재판할 확률이 높았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재판장이 바른 재판을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악인들이 판치는 불의하고 패역한 사회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어서 주님은 과부가 간절히 청원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눅 18:3) 간단히 말해서 과부에게는 원수가 있었고 그 원수에게 매우 억울한 일을 당했기 때문에 그 원한을 풀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이 과부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내세우셨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과부보다 기도 잘하는 전문가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지 않았습니까? 경건한 바리새인들도 있었을 것이고 또 평생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도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이 과부를 내세우셨느냐는 말입니다. 

그 대답은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두 종류의 기도에 대해서 다시금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그 기도는 자신의 행위를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빌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까? 주님은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불의한 재판장을 찾아간 과부를 통해서 성전이 아니라 재판정을 기도의 장소로 설정하셨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재판정을... 예나 지금이나 재판정은 탄식과 분노, 하소연과 호소, 격렬한 논쟁과 절규가 쏟아져 나오는 곳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성전이나 교회를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과부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기도는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삶의 현장에서 외치는 절규와도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이 비유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여간 과부의 끈질긴 호소가 재판장의 마음을 돌이키게 했습니다. 그가 자발적으로 그렇게 마음을 돌이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부가 그를 매우 번거롭게 하니까 할 수 없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에게 인권에 대한 의식이 생긴 것도 아니고 사회 정의에 대한 감각이 생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불의한 재판장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자로서 인권이나 사회 정의에 대한 의식은 전혀 없었지만 과부가 날마다 찾아와서 너무 귀찮게 구니까 그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6~7) 주님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장과 비교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비교가 아니라 대조였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귀찮아서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면 하물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는 것이 말씀의 요지였습니다. 

부르짖음을 통해서 불가능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통로가 기도라는 말입니다. 다만 인간적인 탐심과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올바른 기도는 도저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악한 세상을 변하게 만듭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의 간절한 호소로 세상은 변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들의 힘이 세상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으로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반절) 여기서 믿음이란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불가능이 가능하게 된다는 믿음,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기도로 세상이 바뀐다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세상을 보면 낙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교회를 볼 때에도 더욱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낙심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기도에 매달려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고 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참으로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