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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 (행 2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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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그냥 남이 잘되면 기분이 좋지 않은 인간의 잘못된 심성을 말하는 것이지만,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왜 하필이면 ”사촌“인가? 왜 형제도 아니고 육촌도 아니고 사촌인가? 형제는 한 집안식구이지만 사촌은 친척이지 한 집안식구가 아니다. 그러니까 친형제가 잘되면 내 일처럼 좋아하고 축하할 수 있지만 사촌의 경우는 한 핏줄이면서도 다른 집안 식구이기 때문에 은근히 우리 집과 우리 집안 식구와 견주는 경쟁심리가 있다. 

그러면 사촌이 땅을 샀는데 “배가 아픈가?” 이 말은 속이 편치 않고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인데 왜 그런가? 그가 “나보다 먼저” 땅을 샀으니까 배가 아픈 것이다. 그가 “나보다 많이” 가졌으니까 기분이 나쁜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심리를 가진 사람의 경우 만약에 내가 먼저 땅을 사면 당연히 그에게 으시대고 자랑할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이런 것을 벗어나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런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 이민사회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 자기보다 미국에 늦게 온 사람이 자기보다 가게를 먼저 여는 것을 보고 배가 아프고 괜히 미운 생각이 든다. 자기보다 미국에 늦게 온 사람이 영어를 더 잘 하는 것을 보고 괜히 속이 상한다. 자기보다 가게를 늦게 시작한 사람이 자기보다 집을 더 먼저 사는 것을 보고 배가 아프고 화가 난다. 

나보다 못난 줄 알았던 사람이 나보다 결혼을 먼저 하고 더 좋은 사람하고 했다든가, 나보다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던가, 나보다 돈을 더 잘 번다든가 하면 갑자기 아침 먹은 것이 올라오려고 하고 실제로 갑자기 아랫배가 살살 아파서 화장실을 가야 한다. 심하면 가슴이 송곳으로 콱 찌르는 것 같이 아프고 머리까지 깨지듯이 아프다. 갑자기 손발에 힘이 쫙 빠지고 어지럽고 밥맛도 없어지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진다. 우리들의 심성에서 이런 것을 벗어버려야 함께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

신앙생활에도 그런 경우가 많다. 나보다 늦게 예수를 믿고 나보다 늦게 세례를 받았는데 나보다 먼저 은혜 받고 나보다 먼저 복을 받는 것을 보고 속이 상한다. 나보다 더 열심히 봉사하고 나보다 더 목사님께 인정받는 것 같고 나보다 더 헌금을 잘하고 더 전도 많이 하고 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보고 속이 별로 편하지 못하다. 더구나 나보다 못난 것 같고 나보다 잘나지 못한 것 같은 사람이 나보다 먼저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잠을 못 이룬다. 그래서 지금은 잘 못하면서 옛날에 열심히 잘했던 이야기를 자꾸만 늘어놓아서 자기를 좀 내세우고 상대를 깎아 내리고 내 배가 아프고 속이 아픈 것을 고쳐보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만족시키려는 것이 나의 목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과 삶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야 하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만족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것이 제대로 풀리기 시작한다.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런 것을 버리고 이런 것을 믿음으로, 말씀으로 기도로 이겨야 신앙이 자라고 신앙생활에 기쁨이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오늘 본문 22절을 보면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갑자기 옷을 벗어던지며 먼지를 날리면서 “이런 놈은 세상에서 없애버리자. 살려둘 수 없다”고 하면서 달려들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의 말에서 무엇이 그리 큰 문제인가?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사실이 17-21절에 나오고  있다. 특히 21절에서 “하나님이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내셨다”는 대목이 그렇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그들의 선민의식이 문제였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 장차 올 메시야 왕국은 그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짐승같이 여겼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민인 그들이 기분 나쁘지 않게 해주려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먼저 전한다고 하니까 그만 자존심이 상하고 큰 모욕감과 분노를 느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만 사랑하시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모범으로 삼아서 다른 모든 민족들도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들로 하여금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어느 한 민족만을 사랑하시는 편애와 편견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된 선민사상과 특권의식이 신앙을 떠나고 양심을 마비시키고 죄를 저지르게 하였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나만이 잘 믿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잘못 믿는다는 식의 생각은 큰 교만이다. 우리 교회만 제대로 믿는 것이고 우리 목사님이 제일 목회를 잘하고 다른 교회는 무언가 잘못되고 다른 목사님은 무언가 부족하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면 안된다. 우리 교회를 사랑하고 내 교회 목회자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좋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잘못하면 문제를 일으키고 덕을 끼치지 못한다. 그리고 잘 믿고 있는 다른 교회 교인들을 빼앗아 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잘못된 신앙을 가진 집단들이 기성교회와 기성목회자는 다 틀렸고 자기들 집단에만 구원이 있다고 사람들을 현혹한다. 

우리 민족에 대한 잘못된 선민의식도 주의해야 한다. 한국이 세계교회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교회성장의 복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마지막 때에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명을 주신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처럼 선민은 아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특권의식을 버리고 사명의식에 투철해야 한다. 하나님을 널리 전하라는 사명을 떠난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듯이 우리도 사명을 떠나면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특권의식을 버리고 사명의식에 투철한 한국교회, 한국민족이 되자.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화를 낸 또 하나의 이유는 기득권의 문제였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먼저 유대인으로 귀화를 하고 개종을 해야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예수를 믿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으려면 먼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바울의 선교를 방해하고 핍박했던 사람들 중에는 예수를 반대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더 많았고 더 심하게 핍박했다. 이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핍박하기도 했고, 바울이 전도해서 세워 놓은 교회마다 찾아 다니면서 할례도 받지 말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틀렸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그대로 다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율법주의적 신자로서 갈라디아서는 이들이 갈라디아교회에 와서 사람들에게 전한 주장을 사도 바울이 강력한 어조로 반박한 말씀인 것이다.물론 이런 주장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최초의 교회회의에서 바울과 베드로 등의 주장에 의해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잘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과 할례를 무시하고 이방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까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만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난 것이다. 이들의 생각은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했으니 다른 사람도 다 내 뒤를 따라와야 하고 그리고 나는 앞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결코 다른 사람이 나보다 앞서 가는 것은, 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믿는 것은 못 보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더 먼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싫어한 것이다.

이런 자세가 개인의 신앙성장과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큰 방해가 된다. 이런 사람들은 곧잘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기득권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자기를 높여 주고 알아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서 어떤 종류의 충고도 들으려 하지 않고 누구라도 자기가 충고를 하려고 한다. 이것 역시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고 신앙이 앞서가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믿음이 잘되는 것을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진리이다. 먼저 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고 맥을 놓고 있으면 나중 된 사람들이 신앙이 자라서 앞서간다. 그럴 때에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분노하지 말고 함께 기뻐하고 오히려 격려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라. 그리고 자극과 도전을 받아서 나 자신도 다시 힘을 내고 그들과 함께 앞으로 달려나가면 된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신앙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도 자극과 도전을 받지 않는 무감각이다. 남들이 열심을 내는 것을 보고 나도 다시 열심을 내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오는 사람이 어떤 실수를 할 때에 이렇게 말한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면서 그렇게 살려면 차라리 새벽기도를 하지 말아야지!” 그러면서 자기도 안 나온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생활이 달라지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그러면 생활을 고치라고 해야지 새벽기도가 필요없다고 하면 안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하루에 한 끼 금식을 하거나 하루나 이틀 금식을 하는 것을 보고 “금식을 하려면 40일을 해야지 그 정도 하고서 무슨 금식을 했다고 하느냐?”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한 끼도 금식하지 않는다. 단 한 끼라도 지금 실제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지 나중에 40일을 하겠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다른 사람이 믿음에 열심을 내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자극과 도전을 받으라. 그리고 자극과 도전을 받을 때에 잘못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말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라. 용기를 내고 일어나서 앞으로 나가서 함께 주를 기쁘시게 하라.

그 다음을 보자. 바울의 히브리어연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로마군대의 천부장은 소란이 일어나자 바울이 정말로 중죄인인 줄 알고 심문을 해서 자백을 받으려고 그를 결박하고 채찍질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혀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의연하게 채찍을 맞고 고난을 받지 않고 그 자리를 피했는가? 조금 비겁해 보이는 행동은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것이 그의 지혜였다. 그 당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함부로 결박하거나 매질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무나 로마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돈을 주고 사기도 하였다. 바울은 아마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때에 로마시민권을 얻어서 물려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바울은 사도행전 16장에서 보는대로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잡혔을 때에는 왜 자신이 로마시민권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모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는가? 그리고 왜 지금은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혔는가? 우리가 어디까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하고 어떤 경우는 고난을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가? 기준이 무엇인가?

그 기준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가이다. 고난을 피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인가 하나님께 유익인가를 기준으로 결정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께 유익이 되고 교회에 유익이 되더라도 당장 나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피해가 오면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서 지금 다치거나 죽으면 안된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여기서 이 채찍의 고난을 피한 후에 그의 삶은 오히려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죄수로 잡혀서 2년 간 갇혀 있었고 로마에까지 가서 고생을 하다가 결국은 순교했다. 

그는 나의 생명은 하나 뿐이고 언젠가는 주님을 위해 이 목숨을 드려야 할텐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고생을 하다가 목숨을 잃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23:11, 27:24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네가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바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이나 편안을 위해서나 자신의 필요를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과 필요를 위해서 움직인 것이다. 그래서 빌립보에서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대로 채찍을 맞으면서 감옥에 갇혔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고 간수까지 구원하게 되었다. 그리 나중에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혀서 아무도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못하게 되었고 마음놓고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예루살렘에서는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먼저 밝혀서 불필요한 고난을 피하고 있다.

6.25 때 공산당을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온 목사님들이 있었고, 끝까지 교회와 교인들을 지키겠다고 고집하고 남아 있다가 순교한 목사님들이 있었다. 이들 중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이것은 옳고 그른 것의 문제가 아니다. 양쪽 다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주님을 섬겼다. 끝까지 남아서 교회와 교인들을 지킨 분들도 충성한 것이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피난 나온 성도들을 섬긴 분들도 충성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필요를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서 결정하고 행동하는가 하는 것이다.

신앙이 어릴 때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하나님께 복과 은혜를 주시기를 구한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은 이미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사명을 따라 살기 원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한다. 나의 유익과 나의 필요를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유익과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서 산다.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그런 믿음과 삶을 기쁘게 받으시고 길을 여시고 책임져 주신다.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유익과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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