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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권념하시는 사람 (창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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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권념하시는 사람 (창 8:1-5)

창세기 6장부터 9장까지의 내용은 외우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6, 7장과 8, 9장이 대칭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6, 7장은 홍수사건이고 8, 9장은 회복사건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6, 7장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파괴하는 사건이고 8, 9장은 재건하는 사건입니다. 얼마나 외우기가 쉽습니까? 

창세기 6, 7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노아와 세 아들이 먼저 소개되고 그들이 방주에 들어간 7일 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서 40일 동안 비가 내려와 150일 동안 땅에 창일합니다. 그러면 창세기 8, 9장의 내용은 어떻게 됩니까?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완전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150일 동안 물이 감하고 40일이 지나서 방주의 창을 열어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는데 비둘기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해 돌아왔고, 7일 후에 다시 내어보내니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어 왔고 또 7일 후에 내어보내니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가족들과 짐승들이 방주에서 나오고 노아의 세 아들이 다시 소개되며 인류가 다시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6, 7장은 망해가는 이야기이고 8, 9장은 흥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중요한 질문은 6, 7장의 망해가던 세상이 8, 9장에서 어떻게 다시 흥하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Ⅰ. 하나님이 권념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창세기 8장 1절은 오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창 8:1). ‘권념하셨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영어로 보는 것이 더 쉽습니다. ‘God remembered Noah’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망하던 세상이 다시 흥하게 된 핵심요인이 바로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억한다고 할 때 이것은 ‘지적인 회상’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40년 전 중학교 동창생을 길에서 만났는데 이름을 몰라 한참 고민하다가 생각났을 때 이것을 ‘기억했다’고 합니다. 제가 고속도로를 운전하며 가다가 익산을 지났는데 익산의 옛날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두 시간 동안 계속 생각하다가 광주에 가서야 익산의 옛 이름이 이리였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기억은 지적인 회상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를 기억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회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는 것은 노아를 잊어버리고 계시다가 1년 만에 생각났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기억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동사는 ‘자카르’입니다. ‘자카르’는 ‘기억하다’ 혹은 ‘생각하다’로 번역되는데, 이 말은 가장 적합한 때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도움을 주시는 자비로운 행동을 의미합니다. 쓸데없는 도움을 주거나 괴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가 근거가 되어 가장 적합한 때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창 30:22). 야곱에게는 부인이 두 명 있었고 첩이 두 명 있었습니다. 첫째 부인인 레아는 자식을 잘 낳았지만 야곱이 사랑하는 둘째 부인 라헬은 하나님이 태의 문을 닫으셔서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레아가 라헬을 업신여겼고, 그녀가 자식이 없어 부끄러워할 때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시니 그 태가 열려 야곱의 아들 중 가장 훌륭한 아들인 요셉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자녀가 없던 사람도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녀가 없는 분은 기도하실 때 “하나님, 나를 기억해주소서. 라헬을 기억하셨듯이 나를 기억해주소서. 창세기 30장 22절에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심으로 요셉이 잉태된 것처럼 나를 기억하시고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창 19:29). 

소돔이라는 곳은 동성연애가 심한 곳입니다. 소돔(Sodom)에 ‘y’를 붙이면 ‘동성연애’라는 뜻이고 ‘ite’를 붙이면 ‘동성연애자’라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성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소돔에 하나님은 유황과 불을 비 같이 내려 심판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그의 조카 롯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이 기억하사 애굽 왕 바로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시고 해방시키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출 2:24).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건져내신 사건들을 다 찾아내면 두 시간을 설교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북한 주민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을 기억하사 바로 왕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신 것처럼 북한 주민을 기억해주시고 공산 치하에서 건져내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밥을 먹지 못해 굶어죽고 예배도 못 드리게 하는 나라지만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최적의 때에 개입하셔서 우리 동포들을 해방시키시고 한민족이 다 함께 일어나 신앙의 부흥을 이루고 세계 선교를 감당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셔서 바람을 보내셨습니다. 바람이 불고 땅 속에 있는 물이 막히고 하늘의 창도 닫히자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산꼭대기도 나타나고 육지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사실 한가지만으로도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애 가운데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은혜가 날마다 있으시기 바랍니다. 아주 망한 사람도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그 다음부터 계속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Ⅱ. 노아를 기억하신 자비는 얼마나 큰 것인가?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신 사실은 당연하게 여길 사건이 아닙니다. 그 당시 인구가 약 10억 명이나 되는데 그 중에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건입니까?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셔서 지구표면에 가득한 물을 말려주신 것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여러분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준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피영민 목사님에게 감사한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제 이름을 알고 기억해서 명절에 사과 한 상자를 보냈다면 아마 제가 자랑하고 다닐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을 수천 명 합한 것보다 더 위대하시고, 기업 회장 수천 명 합한 것보다 더 높으신 권능의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사랑해주신다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이것은 엄청나게 큰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시편 113편은 높으신 하나님이 낮은 인간을 기억하시고 돌아보시는 사랑을 찬송한 노래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시 113:5~8).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는 것은 굉장히 낮아지시는 것(condescension)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는 거름 구덩이에 빠져있습니다. 죄악의 거름 구덩이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하나님이 스스로 거름 구덩이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씻어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심으로 지옥에 갈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카락 개수까지도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마 10:30). 만약 우리가 머리카락을 센다면 평생 세어도 다 세지 못할 것입니다. 머리카락을 세다가 헷갈리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세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아침에 샤워하다가 머리카락이 몇 개나 빠졌는지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외면뿐만이 아니라 내면도 아십니다. 우리가 내면으로 두려워하고 외로워하며 슬퍼하고 좌절하는 생각들을 다 아시고 돌보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홍수경험’은 신앙의 시험이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시기 전 노아는 방주에 여러 날 있었습니다. 방주에 있었던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비오기 전 7일, 비가 내린 40일, 비가 땅에 창일한 150일을 합하면 197일입니다. 비가 내린 40일을 150일에 포함해도 최소한 157일 동안 노아는 방주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기간을 계산해보면 복잡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1년과 옛날 유대인들의 1년 계산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산이 맞지 않는다고 고민하지 마십시오. 노아가 방주 안에서 150일 이상 있는 동안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에게 얼마나 어려운 시험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혹시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혹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노아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홍수경험’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노아가 방주 안에 있었던 시간은 하나님이 노아를 가장 많이 사랑하시고 보호해주신 시간이었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죽을 때 노아와 그의 가족만 보호해주셨습니다. 1년이 넘는 세월을 홍수의 위험에서 지켜주셨고 방주 안는 있는 맹수들로부터도 지켜주셨습니다. 질병의 위험에서도 지켜주셨고 양식이 떨어져 굶어죽을 위험에서도 지켜주셨습니다. 갖가지 위험에서 다 지켜주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때로는 홍수경험을 통과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것 같고 나를 잊어버리시고 버리신 것이 아닌가하는 유혹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홍수경험은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홍수경험을 겪은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욥입니다. 욥은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자식 열 명이 모두 죽고, 그 많았던 재산도 다 날아갔습니다. 건강도 잃고 아내까지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기억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욥 14:13). 욥의 기도는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들으시고 욥을 기억하사 두 배로 복을 주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인류역사상 가장 어려운 홍수경험을 겪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5~46).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낮 열두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습니다.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 시간 동안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은 가장 불 붙었을 것이고 가장 뜨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외면하신 이유는 그를 잊어버리셨기 때문도 아니고 미워하셨기 때문도 아니며 괴롭게 하려하심도 아니었습니다.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죗값을 속량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온 우주와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죗값을 인간에게 묻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독생자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비하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변덕스럽고 독재적이며 무자비하셨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고 당신의 택한 백성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숨어계신 것 같아 보이는 순간에도 가장 강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결론

창세기 6, 7장의 멸망이 8, 9장의 회복으로 돌아가는 돌쩌귀(Hinge)에는 오직 한마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더라.” 인간의 삶이 절망과 슬픔과 저주에서 소망과 기쁨과 축복으로 바뀌는 돌쩌귀에는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은혜로운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믿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사랑이시며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주권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를 한 가지만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하나님의 주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모르고 하는 설교는 엉터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 택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구원을 위해 부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죄를 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29~30).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 하나님의 주권교리를 이렇게 간단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습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생각으로 믿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것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기억해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70억 인구 중에 하나님이 특별히 기억하신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설교를 하되 하나님의 주권을 설교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백, 수천 편을 설교해도 그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저는 은사운동이니 성령운동이니 그런 것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모르고 방언이나 예언을 하는 것은 불교도 하고 힌두교도 합니다. 

오늘날 신학계의 문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변두리로 몰아내고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시대 10억 명의 인구가 학문과 능력을 다 합친다고 해도 그 홍수를 막아냈겠습니까? 지금 70억 명의 인구가 모여서 힘을 합친다고 해도 하나님의 불심판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운석 하나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새발의 피(鳥足之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예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어려울 때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회복되는 것입니다. 병이 걸려도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업이 망했다고 “이제 나는 죽었구나!” 이런 소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실 것이니 문제없다.” 이렇게 말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놓고 격려하십시오. “너는 지금 가난하지만 문제없다. 네 아버지가 부자 아니냐? 네가 지금 몸이 아프지만 문제없다. 네 아버지가 만병을 고치시는 대의원이시지 않느냐?” 이렇게 격려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할 때 우리는 다윗처럼 해야 됩니다.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시 25:7).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해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인생살이에 어려움이 있을 때 항상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따라 나를 기억하소서.” 이런 기도를 올림으로 날마다 하나님이 기억해주시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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