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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헤롯의 슬픈 이야기 (막 6: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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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의 슬픈 이야기 (막 6:14-20)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기독교의 복음은 그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 명백한 결심과 분명한 입장을 요구합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어떤 특정한 사항들에 대해서 우리가 명확한 선택을 하도록 촉구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선언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수 24:15=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 시대에 선지자 엘리야의 메시지도 백성들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는 바알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서 주저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담대히 외쳤습니다. 

왕상 18:21=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의 메시지도 그러했습니다. 요한은 세례받으러 요단강으로 몰려온 무리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눅 3:8)고 하며 분명한 반응을 요구했습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억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눅 3:11)고 했습니다.

세리들에게는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눅 3:13)고 했습니다. 군인들에게는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4)고 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복음의 선명성을 강조하십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넓은 길과 좁은 길, 모래 위의 집과 반석 위의 집,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 등은 모두 우리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의 속성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 2:16)라는 말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이 한창 진행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이름은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헤롯왕이 듣고 말하기를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라고 하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14, 16절).

여기 헤롯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헤롯 대왕의 둘째 아들 헤롯 안티바스(B.C. 20~A.D. 39)를 가리키는데,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으로 재직할 당시 아라비아 왕 아레다 4세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자신의 동생인 헤롯 빌립의 처이자 자신의 조카인 헤로디아와 불륜의 관계를 가지다가 마침내 본부인을 버리고 헤로디아와 결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세례요한은 헤롯의 불의에 대하여 책망하며, 헤롯이 불의로부터 돌이킬 것을 계속하여 지적했고, 헤롯은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버렸다가 결국 요한의 목을 베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헤롯의 본처는 고국 아라비아로 가버리고, 그로 인해 수욕을 느낀 아라비아 왕은 헤롯 관할의 영토를 침공하여 헤롯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A.D. 37). 이 사건으로 그의 권력은 흔들렸고, 후일 헤롯 아그립바 1세의 고소 때문에 지금의 프랑스 리용으로 유배 당하여 거기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에게서 회개의 메시지를 수없이 들었던 헤롯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헤롯의 일생 중 가장 구원에 근접했던 때의 이야기이고, 최고의 설교자와 대면할 수 있었던 은총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러면서도 결국 구원의 길에서 탈락하고 말았던 어리석고 불쌍한 헤롯의 이야기입니다.

헤롯의 슬픈 이야기!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주위의 안타까운 사람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기회로 삼기 바랍니다. 

1. 헤롯은 요한의 설교를 번민하면서도 즐겼음 (= 구원의 문턱을 넘지 못함) 

20절=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본절은 헤로디아가 왜 세례요한을 죽이지 못했는가(19절)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헤롯왕은 비록 헤로디아 때문에(17절)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지만,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요한을 함부로 죽일 수 없었습니다.  

한편 ‘두려워하여’ 동사(포베오)는 ‘두려워하다’는 뜻 외에 ‘경외하다’(눅 1:50) 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 볼 때 헤롯은 요한을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요한의 의롭고 거룩한 모습으로 인하여 그를 존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보호하며’ 동사는 미완료 과거시제로 되어 있어, 세례요한을 죽이고자 하는 헤로디아의 계속적이고 집요한 간청이 있었으나 헤롯이 거듭하여 요한의 생명을 보호해 왔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헤롯왕은 요한의 설교 듣기를 번민하며 한편으론 즐겼습니다.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이 말은 헤롯이 헤로디아의 말과 세례요한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라 방황하고 있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헤롯은 요한의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분명한 말씀 앞에서 명백한 결심을 하지 못한 헤롯은 결국 복음 없는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 확고한 결단이 따르지 아니할 때 복음은 전혀 쓸모가 없게 됩니다. 헤롯은 요한의 설교를 즐겼습니다. 감동도 받았습니다. 제법 느끼기도 했습니다. 구원의 문턱에 거의 당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합니까? 불신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만 헤롯이 좀 가엾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현대 교인들 가운데 제2, 제3의 헤롯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별히 포스트모던 시대의 젊은이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자주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자조섞인 어조로 그리스도인에게 날마다 일어나는 세 가지 기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말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둘째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셋째는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헤롯이 이처럼 구원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본문 20절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좀더 살펴봅시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헤롯은 요한의 생애와 인격에 감동되었습니다. 당시의 지도자들 다수가 이것을 몰랐는데도 헤롯은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헤로디아 때문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헤롯은 자주 감옥에 갇혀 있는 요한을 찾아가 그의 말을 들었고, 그의 인격에 매료되었습니다. 하지만 헤롯에게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위대한 사람들의 전기를 읽거나 그들이 쓴 글을 대할 때 그들의 인격에 매료되고 그들의 주장에 감동받기도 하지만, 자신이 직접 변화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까? 

헤롯이 구원의 문턱까지 이르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요한의 메시지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헤롯의 불륜을 담대하게 책망했고,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헤롯의 회개를 촉구했는데, 헤롯은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제시하신 복음의 진리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복음의 원리는 매우 고상하다는 것을 우린 다 인정합니다. 성도가 복음으로 맺어야 할 열매는 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와서 맺는 열매는 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등입니다.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답습니까? 

헤롯 역시 세례요한이 전하는 메시지를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아직 감옥에 가두기 전에 이미 요한의 메시지를 알았고, 그것을 즐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이 허사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혹시 여러분 주위에는 이런 일이 없으십니까?
 

2. 요한의 설교가 헤롯에게는 무용(無用)했던 이유

헤롯의 안타까운 모습은 의외로 지금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헤롯들은 교회 예배에 자주 참석하고, 설교에 더러 감동도 받으며, 자신의 부족한 모습에 새로운 결심을 다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런 열매도 없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회개의 세례로 이끌었던 세례요한의 설교가 헤롯에게는 결국 무용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헤롯은 환경의 노예로서, 단지 어떤 느낌만으로 만족해 하는 피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분위기에 쉽사리 휩싸이는 사람이었습니다.  

헤롯은 끝까지 맞서서 정당한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하지 못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에 감동했다가 잊어버리고, 감동했다가 잊어버리곤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복음을 듣고 감동하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결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곤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영원하신 재판장이시고 나는 죄인이다. 내 뜻과 관계없이 나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나는 죄의 책임 때문에 정죄 당하고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양심의 증거이다.

여기 복음의 부르심이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믿고, 주님의 사역, 용서, 생명 주심을 믿고 내 자신을 드려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안전 출구이다. 나는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은혜를 받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간증까지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계속되는 행동은 어떠합니까? 시간이 좀 지나면 감동과 열정을 모두 잊어버리지는 않습니까? 헤롯의 모습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매우 우스꽝스런 모습입니다.   

둘째, 헤롯은 특정한 죄를 사랑했습니다. 헤로디아와의 불륜의 관계를 청산하는 문제는 그에게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그는 번민만 하였지, 결국 그 관계를 놓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헤롯도 이와 유사합니다. 다른 것들은 고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면서, 특정한 죄를 청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온전한 복종, 전적인 헌신을 원하십니다.  

셋째, 헤롯의 주된 관심은 세상적 인기와 평판을 누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만용을 부려 호언장담했던 것에 대하여 부담을 떨어버리지 못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에 현혹되어 경솔하게도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줄 것을 맹세까지 한 그는 그녀가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습니다.  

26절=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안 그래도 그는 세례요한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옥에 가둬놓은 것에 대한 부담감으로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 차에 살로메가 세례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자 맹세를 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요한을 죽일 수도 없는 이중 삼중의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얼마남지 않은 조그마한 양심에서 비롯된 이 고민은 자신이 한 맹세에 대한 부담과 주변 사람들의 이목으로 인하여 한순간에 사그러지고 말았습니다. 헤롯의 관심은 세상적 인기와 평판에 더 쏠려 있었습니다.

세상적 인기가 그렇게 좋은 것입니까? 죽어 썩어질 사람들의 이목이 영원한 재판장의 불꽃같은 눈보다 더 두려운 것입니까? 헤롯은 오늘의 핑계 투성이인 발목 신자들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꽤 괜찮은 신앙인이라 생각하고 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던 로이 로버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탄 전투함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는 동안 동료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하나씩 말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외울 수 있는 구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기억해낸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는데 바로 앞 사람이 그 구절을 말해버렸습니다.  

순간 그는 정신적 공항에 빠졌고 자신이 발가벗고 서 있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날 밤 성령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로버츠, 너는 가짜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You're a fake, You're Nothing).” 

다음날 아침 7시 55분에 그는 전투 대형을 명령하는 배의 경적 소리를 듣고 깨어났습니다. 360대의 일본 함대의 비행기가 그가 탄 배와 다른 군사 시설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료 승무원과 함께 기관총이 장착된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훈련용 가짜 총탄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일본 비행기를 놀라게 하려고 그 가짜 총탄을 목표물을 향해 맹렬하게 쐈습니다. 가짜 총탄을 쏘면서 그는 생각했습니다. 

'로버츠! 이렇게 그리스도를 향해 가짜 총탄을 발사하는 것이 이제까지 네가 살았던 방법 아니었느냐?'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신앙생활을 한탄하며, 일본군의 총탄이 배 위로 퍼부어지는 순간에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곳에서 살아남게 되면 앞으로 남은 인생은 주님을 위해 보다 진실하게 살겠습니다.” 

그후 그는 네비게이터 선교회를 창설한 도슨 트롯트만을 도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헤롯의 슬픈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가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편을 택하지 않는다면, 복음을 통해 우리가 가지는 훌륭한 느낌들, 가슴 뭉클한 감동들, 그리고 우리의 선행들은 결국 무용한 것입니다. 헤롯은 그토록 많은 말씀을 즐겁게 듣고 감동까지 받았지만 결국 요한을 목베는 자리까지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한번 복음을 깨닫고 감동했다면 그 사람의 안식과 화평은 오직 완전한 헌신 후에만이 가능합니다. 한번 주님의 생명에 비침을 받으면 이제 그가 주님의 평안을 누리는 길은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가엾은 헤롯, 불쌍한 헤롯입니다. 그는 요한을 목벤 후에 요한의 망령에 사로잡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한없이 크셔서, 독생자를 원수같은 인류를 위해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려 피흘려 죽게 할 만큼 엄청나게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큰 것 만큼 어린 양의 분노 또한 크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중에 슬픈 헤롯의 이야기 거리를 없애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듣고 한 번 깨달았으면, 우리의 논리의 추적을 끝까지 이어가서, 마침내 완전한 결심, 확실한 전환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표적을 끝까지 주목하여 놓치지 맙시다.

사도 바울의 굳은 결심을 본받읍시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성령님은 확신의 영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할렐루야!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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