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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정하기-권력을 버리고 사랑을 택하라! (빌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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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하기-권력을 버리고 사랑을 택하라! (빌 2:5-8)

[빌립보서 2장 5-8절]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랑에는 기쁨이라는 힘이 있습니다.
반면에 권력은 힘이 있을지 모르지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지난해 인도네시아에서 참 인상적인 단어를 하나 들었습니다. “트리마 까시” “감사합니다.”라는 말인데 “사랑을 받았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나의 삶에서 혁명일 뿐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권력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선한데, 세상의 권력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셔서 주셨을 텐데 뭔가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권력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는 이유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이죠.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권력과 법의 기능이 무엇일까요? 사실은 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힘이 필요하고, 억울한 사람을 위해 법이 필요했을 텐데 언제부터인지 잘못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죠.

어떤 기업인과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이 힘든 이유가 무엇인가? 대기업들이 어려운 기업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것이죠. 모든 것을 누릴 힘, 즉 돈을 가지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려는 마음이 없어서 하청업체들에게 어음을 주고, 고통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요.

이분은 정말 어렵게 중소기업을 하면서 대기업과 싸워야 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지금은 본인의 사업과 연관된 하청업체들에게 자기가 당한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청업체라는 말보다는 동반 성장을 생각하며, 대금을 무슨 일이 있어도 1주일 안에 현금으로, 그리고 일을 나누어 줄 때는 15% 정도의 이익을 낼 수 있도록.
그러면서 참 놀라운 일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관계가 좋아지다 보니 흔히 발생하는 법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더라는 것이죠.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류 역사가 증명합니다. “행복은 마음대로 사용할 힘을 누군가를 위해 사용할 때”라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기업의 생리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돈 있는 기업이 다른 사업에도 다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도덕이 있습니다. 내가 충분히 잘하고 성공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그 능력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계적이고 권력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자신의 이득을 채우는 권력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큰 기업을 부러워할지 모릅니다. 큰 부자를 부러워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많이 가지므로 누군가가 힘들어지는 것은 잘못 사용하는 권력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한과 엄마의 파워가 있습니다. 지위를 유지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가정을 행복하게 하라고 주신 것임을 알 때, 사랑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너희가 자유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너희를 위하여 그 자유를 사용하지 말고 서로 섬기라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잘못된 사랑이 무엇인가요?
자기중심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 뭐 그런 거죠. 자신에게는 분명한 즐거움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픔이 되는 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는 “사랑”이란, 내가 느끼는 것을 넘어선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주는 그런 사랑을 말하죠.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사랑”인가요? 아니면 “권력”인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철저한 권력이었습니다. 당시 세상에 퍼져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잠재우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죠.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권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패배하는 것 같았지만,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뭐라 증언합니까?
사람들이 조롱하며 하나님의 힘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지만, 주님은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라!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조금 더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운전하며 도로를 달릴 때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요? 미국에 있을 때는 교통경찰이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섭습니다. 고속도로나 혹은 stop sign이 있는 곳에 숨어서 단속을 합니다.
일단 걸리면 용서가 없습니다. 함부로 차 밖으로 나와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 권총을 들고 있는 권력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권력”이란 눈에 보일 때, 그리고 강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권력에 복종하지만, 자발적이지 않고,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깨닫게 된 것은 미국 사람들이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라 법이 무서울 뿐입니다. 벌금이 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영향, 우리를 사랑하시는 부모님, 헌신하셨던 분들의 사랑입니다. 종종 그분의 사랑과 헌신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 할 때, 그 기억이 우리의 삶을 아주 강력하게 지배합니다.

만인 우리가 하나님을 권력 지향적으로 믿는다면 아주 잘못 믿는 것입니다.
마치 권력이 미치는 범위에서는 순종하지만, 권력을 벗어난 곳에서는 불순종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중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사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그것이 훨씬 더 강력하게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사랑

빌립보서 2장 5-8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세상을 바꾸고, 구원을 이루셨던 예수님의 능력은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기 위해 그분이 하셨던 것은 “비우는 일”이었습니다. 무엇을 비우셨나요? 당신이 가진 모든 권력을 비우셨다는 말입니다. 비웠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일에 쓰임 받을 때, 그분은 우리의 손을 비틀어 억지로 따르도록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자발적인 것을 원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능력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을 사랑해야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므로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가 권력으로 세워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입니다.

마태복음 4장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려는 예수님께 사단이 다가와 시험을 하죠. 세 가지의 시험은 철저하게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힘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그 기적을 보고 모든 사람이 따르게 되리라는 것이고, 사단에게 절만 한다면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것이죠.
권력을 사용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사탄은 베드로의 입을 빌려 세상의 방식으로 권력을 사용해 그분의 나라를 세우자고 유혹하죠.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예수님을 조롱하는 자들의 입을 빌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힘을 사용하라고 유혹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가 똑같은 유혹을 받습니다.
정치적인 힘을 가지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종교적인 이름으로 공직에 나가 선출된다면 그 힘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 어떤 정치적인 힘도, 힘의 원리를 가진 세상과 싸워서 이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힘과 싸우기 위해 하나님의 원리가 아닌 세상의 원리로 맞서다가 똑같이 타락하는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그렇게 핍박받던 때, 목숨을 걸고 순교하며 전도하던 때 보이던 신앙의 열정은 온 세계가 기독교 국가가 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황제가 십자가를 수호하는 자가 되었을 때, 십자가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십자가를 앞세우고 누군가를 짓누르는 무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위 종교적 우파들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다면 우리가 정계에 진출한다면 낙태와 동성연애를 막을 수 있을 텐데.”

소위 종교적 좌파들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다면 가난을 종식시킬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나 많이 경험해 왔습니다.
어떤 권력을 사용하는 것도 예수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권력만 있으면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권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토니 캠폴로의 [끝까지 사랑하라] 에 나오는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기독교 봉사 단체와 함께 일하면서 나는 일라이어스 산타나라는 한 청년 의사를 알게 되었다. 그는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어떤 권위가 생겨나는지, 또 하나의 예를 보여주었다.
똑똑하고 활발한 크리스천인 이 청년은 의대를 졸업하고 시카고에서 살면서 중류층 미국인들을 돌보는 병원을 차려 쉽게 상당한 재산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성령의 확신 아래, 고향인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돌아가 기독교의사회 도미니칸 지부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일라이어스는 정기적으로 고향에서 푸에토리코까지 여행하면서 그의 의료 행위에 값비싼 비용을 치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진료를 해주었다. 그러고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푸에토리코에서 번 돈으로 의료 물품들을 샀다. 그다음 산토도밍고의 빈민굴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물품들을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어느 날 나는 하나님의 종인 이 청년과 함께 그 도시에서 가난한 빈민굴 중 한 곳에 갔다. 나는 종일 그의 옆에 서서 그가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봉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값비싼 약품들을, 그것들을 살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희생적으로 실천하는 하루를 보낸 후, 일라이어스는 자신의 트럭 위에 올라가 그 동네 사람들에게 모여보라고 외쳤다. 나는 그가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께 내어드리라고 요청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군중 한 쪽에 서 있던 나는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한 청년을 보았다. 그는 산토도밍고 주립대학 내의 좌파 학생 단체인 체게바라회 대표였다. 소크라테스는 마음씨 좋은 청년이었지만 잘못된 이념을 따르고 있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고국에 정의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방법은 권력을 이용해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우고자 혁명을 원하는 사람들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나는 소크라테스 옆으로 다가가 장난스럽게 그를 쿡 찔렀고, 트럭 위에 서 있는 일라이어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크라테스! 일라이어스가 회심자들을 얻고 있군! 이대로 간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크리스천이 되겠는걸, 마르크스 이념으로 돌아설 사람이 남아나지 않겠어.”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결코 잊지 못할 대답을 했다. 그는 이를 악문 채(화가 나서 그랬는지 감탄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말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일라이어스 산타나는 사람들에게 그의 말을 들려줄 권리가 있어요.”

지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많은 권위를 가지고 발언하지도 못하고, 행동하지도 못하고, 영향력을 주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는 자기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헌금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는” (행 17:24)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건물들을 짓는 데 수많은 돈을 썼기 때문이지요. 교회가 만일 불쌍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으로 그 막대한 자원들을 활용한다면 세상은 상상 이상으로 우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 분명한데 말입니다.


존재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존재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좀 더 명확해질 것 같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것이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 교회 중심적인 교회가 하나님 중심적인 교회와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안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몸 된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우셨다면, 자신의 몸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던 것처럼 교회도 비워내기를 바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심을 받고 존재하는 이유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지금 권력을 사용해야 하는지 사랑을 사용해야 하는지가 좀 명확해질 것 같습니다.
 
토니 캠폴로는 “권력을 사용하는 법"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아주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권력을 사용하는 이유와 사랑을 사용하는 이유가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죠. 권력이 악한 세력을 제어할 수는 있지만, 삶을 바꾸는 영적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 권력을 사용하시지 않고 사랑과 희생을 보여주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이, 힘으로 얻은 것을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조선일보 위클리비즈에 [최철규의 소통 리더십] “상대가 3000달러 달라는데 1만 달러 준다면 형편없는 협상인가”에 나오는 글입니다.
 

#1.   1930년대 초, 미국 연구기관의 원장과 유럽에서 활동 중인 학자가 만났다. 학자를  미국으로 스카우트하기 위해서다. 원장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연봉은 얼마 드리면 될까요?"
학자가 말한다.
"3000달러면 충분합니다. 이보다 생활비가 적게 든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면…."
잠시 고민에   빠진 원장이 제안한다.
"연봉 1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학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2. 승자와 패자가 만났다. 종전협상을 위해서다. 패장이 입을 연다.
"어떤 요구를 수용하면 되겠소?"
패장의 머릿속엔 전쟁 포로, 전쟁 배상금, 전범 처리 이런 단어들이 그득하다. 승자가 말한다.
"요구사항은 단 하나입니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시오. 먼 길이니 타던 말도 그냥 가져가시오. 귀향하는 데 필요한 식량은 우리가 어떻게든 준비해 보겠소."
패장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성공한 협상'이란 무엇일까? 여기 두 가지 협상 사례가 있다. 아래의 협상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어떤가? 3000달러를 요구한 학자에게 1만 달러를 주겠다는 원장.
패장에게 터무니없이 관대한 협상조건을 내건 장군.
이들은 형편없는 협상가인가? 아니다. 이들은 분명 '최고의 협상'을 했다. 왜일까?

첫 번째 사례에서 연봉 3000달러를 요구한 학자는 다름 아닌 아인슈타인이다. 연구밖에 몰라 세상 물정에 어둡던 그는 미국 교수의 평균 몸값(7000달러)을 몰랐다. 그냥 자신이 유럽에서 받던 연봉(3000달러)을 소박하게 요구한 것.
-> 이에 대해 프린스턴대의 플렉스너 원장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최고 대우(1만 달러)를 약속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객관적 몸값을 알게 된다. '1년간 7000달러를 아끼느니 천재 아인슈타인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 낫다'는 게 플렉스너의 판단이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에서 기념비적인 연구성과를 만들어낸다. 그러자 하버드·예일 등 유수의 대학들은 아인슈타인을 '모시고' 싶어 안달이 난다. 1만 달러와는 비교할 수 없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우며….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평생 프린스턴 대학을 위해 봉직한다. 자신도몰랐던자신의가치를인정해준프린스턴대학에죽을때까지의리를지킨셈이다.

두 번째 사례는 남북전쟁종전협상장면이다.

북군 총사령관인 그랜트 장군은 남군 총사령관, 패장인 리 장군에게 허무할 정도로 관대한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분명 막대한 전쟁보상금, 관련자 처벌 등과 같은 까다로운 요구를 했더라도 패장인 리 장군이 이를 거절키는 어려웠을 것이다. 협상이 '허무하게' 타결되고 리 장군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북군 진영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진다. 병사들은 연병장에 모여 함성을 질렀고, 포병들은 대포를 쏘아댔다. 이 광경을 본 그랜트는 화난 표정을 지으며 단호히 명령한다. "적에게 승리했을 때 하는 어떤 행사도 당장 중단하라. 반란군은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의 적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다."
왜 그랬을까? 분명 그랜트도 사람인 이상, 지난 5년간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남군을 철저히 응징하고픈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국가적 통합'이 '패자에 대한 복수'보다 더 큰 가치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랜트를 포함한 북군의 리더들이 '통합'보다 '응징'이 더 중요한 가치라고 판단했다면? '피의 복수'가 이어졌을 것이고 아마도 오늘날 미국은 북부 USA, 남부 USA로 찢겨 망국적인 지역감정 싸움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기업 임원들을 상대로 협상워크숍을 진행하다 보면 스스로 뛰어난 협상가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특히 구매 담당이 그렇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면 답은 대게 비슷하다. 상대의 요구(position)를 최소로 받아들이고 내 요구를 최대한 관철시켰다는 것. 한마디로 적게 주고 많이 받았다는 얘기다.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서….
협상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이런 식으로 상대를 '쥐어짜는' 협상은 성공한 협상이 아니다.
-> 그냥 '이긴' 협상이다.

경제적 이익이라는 가치를 순간적으로 극대화했을지 몰라도, 협력업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신뢰', 우리 기업에 대한 '평판'이라는 가치는 모두 내동댕이친 셈이다. 물론 찰나의 경제적 이익이 신뢰나 평판이라는 가치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생각해 볼 문제다. 기업 간 거래라는 게 과연 한 번에 그치고 말 이벤트인지, 아니면 계속 지속될 인연이지.

성공한 협상이란 요구 사항을 최대한 얻어내는 협상이 아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충족시키는 협상이다. 또 이를 통해 더 큰 가치를 만들어 내는 협상이다.

그랜트 장군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국가 통합'이라는 가치, 프렉스너가 중시했던 '천재과학자의 충성심'이라는 가치를 충족시키는 게 진짜 협상이다. 이를 통해 그랜트는 그가 꿈꿨던 '위대한 미국', 프렉스너는 그가 소망했던 '세계 최고 싱크탱크'라는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중요한 협상을 앞두고 있는가? '나에게, 그리고 상대에게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충족시킬까'부터 고민하라. 가치에 집중할 때 협상의 질은 높아진다. '이기는 협상'보다는 '성공한 협상'이 고수(高手)의 협상이다.


송신복 전도사의 간증입니다.

중국에서 일하며 어떤 크리스천 가정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금식”한다고 해서 물었습니다. “왜?”
자신이 교회에 나올 때까지 금식하며 기도하겠다고.
그래서 결심했답니다. “내가 교회 가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결국, 송신복 전도사님이 무너진 것은 7개월 동안 자신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던 사랑 때문에.
우리는 늘 힘이 있어야 무엇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삶을 바꾸는 능력은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사랑으로 되는 것이죠.

그날 참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감옥에서 소리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악물고 기도한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여러분이 소리 내어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느냐고.”
요즘 젊은이들이 왜 이렇게 예배가 많으냐고 불평하지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냐고.

나중에 알게 되었답니다.
한국에서 큰아버지를 만나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7살부터 12살까지 교회를 다니시던 아버지가 1948년 북한에서 모든 교회가 문을 닫을 때, 얼마나 울던지.
위험하다는 생각에 물이 흐르는 강가에서 소리가 묻히도록 데려간 곳에서 3일을 울었다고.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아침 일찍 눈을 감고 중얼중얼했는데 알고 보니 기도하고 있었다고.
‘신복’이라는 이름이 믿을 신(信) 자에 복(福) 자를 썼다는 것이 믿음의 고백이었다는 것을.

북한을 바라보며,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신앙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힘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놓는 것이 소위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그것을 믿기에 우리는 사랑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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