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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기도해야 하는가? (마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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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도해야 하는가? (마 17:1-8)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일반은혜가 있고, 특별은혜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립니다. 비가 내리면 믿음이 좋은 사람의 밭에도 비가 내리고 믿음이 좋지 않은 사람의 밭에도 비가 내립니다. 해가 뜨면 믿음이 좋은 사람의 밭에도 햇빛이 비취고 믿음이 좋지 않은 사람의 밭에도 햇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반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은혜는 골라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지, 믿지 않는 사람도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가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은혜를 받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더 특별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더 많은 사랑을 받아 더 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구별된 주님의 제자 70명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전도자로 훈련시키셨고 둘씩 짝을 지어서 전도를 내보내기도 하셨습니다. 70인의 제자들 보다 주님과 더 친밀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12명의 제자들인데 우리는 그들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사도들 가운데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주님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주님은 변화산에 오르실 때 제자들 가운데서 그들을 따로 구별시키셨습니다. 1절에 보면 그 세 사람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고 말씀합니다. 마 26장에 보면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을 데리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시고는 역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사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 세 사람을 특별히 구별시키셨고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셨고 그들만을 특별한 장소에 데리고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23억의 기독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허다한 무리들 중에 한 사람인가 아니면 허다한 무리들 보다는 좀 구별된 사람인가. 아니면 나는 허다한 무리들 보다는 좀 구별된 정도가 아니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주님께서 따로 구별하신 주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특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인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나는 어느 정도 주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만약 내가 지난 1주일 내내 주님과 별 상관없이 살았었다면 나는 허다한 무리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 내가 지난 1 주일동안 늘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전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에 몇 번씩 주님을 생각했고 또 주님 앞에 예배드리려고 힘을 썼다면 나는 허다한 무리들과는 좀 구별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과 나의 관계가 특별한 관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지난 1주일 동안 내내 주님을 생각했고 주의 전인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기를 사모했고 무슨 일을 하든지 그분의 인도를 받으려고 노력했다면 나는 구별된 사람들 가운데서도 주님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본문은 주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변모되신 내용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산이 헐몬산이라는 견해도 있고 다볼산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어느 산이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기도하시다가 변화 되셨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났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 나타나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눅 9장에 보니 대화의 내용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졸다가 깨어 그 모습을 보던 베드로가 놀라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보니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왜 산에 올라가셨습니까? 산에 올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에는 산에 오르신 이유가 나와 있지 않지만 눅 9:28에 보니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기도하기 위하여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왜 기도해야 하는가?”입니다. 우리는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앞인 마 16장에 보면 주님께서 자신의 수난에 대해서 첫 번째 예고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바로 뒤인 마 17:22,23에서 자신의 두 번째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주님의 수난에 관한 예고와 예고 사이에 편집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붙잡히셔서 고난을 당하시다가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지만 또 완전한 사람이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수난 앞에서 갈등과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 고민과 갈등을 이기기 위해서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위기를 기도로 극복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간증집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인생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기도 응답으로 위기를 이겨낸 간증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성경에 그렇게 많은 간증을 실어놓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우리도 살다보면 많은 위기를 만날 것인데 그 때 우리도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처럼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이라고 믿습니다.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제가 몇 년 전에 소개한 간증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고 안정되게 사는 어느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망했습니다. 친구의 사업을 보증을 서주다가 그 보증이 잘못되어 있는 돈, 없는 돈 다 날려버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대단히 낙심하며 하루하루 소망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하나님께 매달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안 나오던 새벽기도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가고, 저녁마다 교회에 나와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이 사람은 위기 중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문제를 만나면 그 때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때인줄 아시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 사람 주위에 있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 사람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만약 저 가정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진짜 하나님은 살아계신 거야!” 그는 그 정도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걸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침저녁으로는 기도하면서 자기 집 하나를 개조해서 인형가게를 만들었습니다. 너무나 초라해서 2평도 안 되는 조그마한 인형 가게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네에 있는 여자아이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오고 나중에는 다른 동네 아이들까지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무슨 인형을 사간 줄 아십니까? 굉장히 못생긴 배추머리 인형입니다. 그때까지 인형 하면 머리 길고 피부가 곱고 늘씬하고 옷을 잘 차려입고 뾰족 구두 신은 백설공주 타입의 인형을 생각했는데, 그러한 기준이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것입니다. 

결국 망했던 그 집은 배추 머리 인형의 총판권 덕분에 금방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섰다. 아마도 배추머리가 유행한 것은 저 집사님의 기도 때문일 거야”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살길을 열어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힘든 세상을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으며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2. 변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2절에 보니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변형 되셨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났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가 언제 일어났습니까?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은데 눅 9장에는 기도하실 때 변화되셨다고 나옵니다.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변화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난 후에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바꿔주시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변화입니다.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세속적인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가장 먼저 행하신 표적은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표적이었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맛의 변화요 색깔의 변화요 향기의 변화요 가치의 변화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인이 주님을 만나게 되면 인생의 맛도 변하고, 색깔도 변하고, 향기도 변하고, 가치도 변하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변화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으면 변화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또 교회를 오래 다니면 변화되는지 압니다. 또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이수하면 변화되는지 압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으면 변화된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직분을 받는 것이 변화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변화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영의 변화입니다.
   
이솝우화에 [요술쟁이와 생쥐]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생쥐 한 마리가 요술쟁이의 집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고양이가 있었기 때문에 생쥐는 무서워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요술쟁이는 생쥐를 측은히 여겨 생쥐를 고양이의 모양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개를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개의 모양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호랑이가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실망한 요술쟁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양만 바뀌어졌지 마음은 계속 생쥐의 마음이니 넌 가망이 없다. 다시 생쥐가 되어라”
   
교회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그 생쥐와 같이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의 염려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는 무늬만 교인인 성도들이 많습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에 다니기는 해도 계속 옛날의 마음에 사로잡혀있습니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녔어도 옛날의 마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지만 여전히 두려움과 염려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겉모습은 바뀐 것 같은데 생쥐가 생쥐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교회를 다니면서 종교적인 냄새는 나는 것 같은데 여전히 옛 마음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속이 변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겉만 변한 것입니다. 무늬만 교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임태종 목사님의 글에서 아프리카 선교지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가 원주민 청년을 전도하여 성경의 진리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청년은 모든 걸 암송할 정도로 잘 배웠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선교사는 그에게 세례를 주며 말했습니다. “이전에 너는 이교도였으나 이제 크리스천이며, 이전에는 길고 부르기 어려운 이름을 가졌으나 이제는 사무엘이다.” 그리고 선교사는 사무엘을 그의 요리사로 고용했습니다. 선교사는 사무엘에게 “금요일에는 고기 요리를 절대로 금하고 대신 생선 요리만을 만들어라”고 엄격히 지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금요일 날 집에 돌아와 식탁을 보니 온통 육류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화가 난 선교사는 “사무엘! 금요일에는 고기 요리를 하지 말라고 했잖아!”하고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당당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님, 시장에 갔더니 생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고기를 샀습니다. 그러나 잘 될 거예요. 왜냐하면 고기를 이미 생선으로 변화시켰으니까요” 

선교사는 “바보같으니라고! 어떻게 고기가 생선이 된다는 말이냐?”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사무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염려마세요 제가 물을 떠다가 고기에게 세례를 주며 이렇게 말했지요 ‘이전에 너의 이름은 고기였으나 지금은 생선이라 부를지어다’ 하구요.”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변화는 세례를 받고, 성경공부를 하고, 직분을 받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적인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람의 본질적인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어나지만 생활의 변화는 기도로 주님을 경험하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변화를 경험한 간증하나 나누겠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길거리에서 노숙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때 그 앞으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쑥 지나갔습니다. 청년이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구는 고급차를 타고 누구는 깡통을 차고 다녀야 합니까? 저도 정말 멋진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길에 있는 나무를 붙들고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쓰임 받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이렇게 길에서 나무를 붙잡고 기도하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끈질기게 나무를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3일을 기도하자 이 사람의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어서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사업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없으니까 세일즈맨부터 하겠습니다. 저에게도 성공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때부터 세일즈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일즈의 효율성을 위해 사장들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사장들은 대개 바쁘니까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끈질기게 나가니까 점차 한 사람 한 사람 사장들을 고객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장은 여러 핑계를 대며 계속 그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어느 날, 성경 야고보서 1장 5절을 펴놓고 막 따지듯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구절을 보니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로 되어 있네요. 지혜를 구하면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이 말씀대로 제게 그 사장을 만날 지혜를 주소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려면 이 말씀이 틀린 것이니 성경에서 빼 주소서.” 

그런 식으로 끈질기게 기도하자 마침내 지혜가 떠올라 사장한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사장님, 저는 날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데 왜 사장님은 한 번도 못 만날까요? 사장님이 하나님보다 높은가요?” 그리고 예쁜 포장지로 포장을 한 상자에 편지와 선물을 넣고 비서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이 편지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마침내 물건을 사주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그런 식으로 30대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가 성공 동기 연구원의 설립자인 폴 마이어 회장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앞으로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까? 혹시 내 생활에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만약 변화를 원한다면 기도생활을 시작하십시오. 

왜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하는 시간은 주님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12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치료가 되었던 것처럼 기도하는 시간은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시간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가 여인이 즉시로 고침을 받은 것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변화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고민하시던 주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주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그들과 주님이 별세하실 것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주님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크게 율법과 선지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과 주님의 별세에 대해서 대화했다는 말은 구약 성경 중 율법이 주님의 별세를 예언하고 있다는 말이고, 또 구약 선지서도 역시 주님의 별세를 예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통하여 구약성경에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재차 확인하신 것입니다.
   
초막 셋을 짓겠다던 베드로는 구름 속에서 들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게 됩니다. 갑자기 빛난 구름이 덮이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기도는 대화입니다. 대화는 기본적으로 2가지가 필요합니다. 말하기와 듣기입니다. 말하기와 듣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전이 앞면과 뒷면이 다 있어야 완전한 동전인 것처럼 기도는 말하기만으로는 부족하고 말하기와 듣기가 함께 있어야 완전한 것입니다.
   
제 아내가 저를 부르면 저는 아내에게 대답합니다. 제가 대답하지 않으면 아내와 저는 대화가 단절됩니다. 제가 대답해야만 우리의 대화는 계속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말을 걸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응하십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대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산 아래로 내려가셔서 담대하게 사역을 하시다가 십자가를 받아드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서 비전을 받게 됩니다. 비전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우리가 비전을 받으면 그 비전이 우리를 움직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김 활란박사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서 비전을 받고 이화여자대학교를 세웠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김활란 박사에게 “여성을 위하여 일하라”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음성이 김환란 박사를 움직였고 그는 한국 최초의 여자 대학인 이화여자대학교를 세운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서 비전을 받았고 그 비전대로 살다보니 아프리카의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거리에서 벌거벗은 흑인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프리로 가라” 그는 그 음성을 통해서 사명을 발견하고 그 길을 간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 남는 위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들에게 힘을 주는 영적인 보약입니다. 지치고 낙망이 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그 음성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힘을 공급해 줍니다.
   
인도에서 선교하던 스텐리 죤스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전도하여도 사람들이 받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답답하여 탈진상태에 빠졌습니다. 급기야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왜 쓰러져 있느냐?”, “아무리 전해도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사과나무를 보아라. 햇빛이 그렇게 뜨겁게 비추고 농부가 거름을 아무리 열심히 주어도 7년 되어야 사과를 맺지 않니? 지금 열매가 없다고 낙심하지 말아라” 그는 그 음성을 듣고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나 일하여 큰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가다보니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성령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역할을 하십니다. 롬 8:14에 보면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마치 목자가 양을 인도하듯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초행길은 네비게이션의 인도를 받습니다. 네비게이션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다보면 우리가 목적하는 곳에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다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은 기도하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참된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말은 어린아이들에게 지혜이듯이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들에게 지혜인 것입니다.
   
인체 수술이 시작된 19세기에 수술환자의 90%가 수술을 받으면 죽었습니다. 그때는 세균이 있는지 없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쓴 칼을 또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쓰고 그 피 묻은 칼을 또 다른 사람에게 쓰고 하다 보니 세균을 전달시켜서 수술을 받았다면 90%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조지프 리스토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소독학의 창시자입니다. 그분이 주님을 잘 믿는 사람인데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환자들이 수술만 받으면 죽는데 살리려고 한 수술이 왜 사람을 죽입니까?” 그러니까 마음속에 조용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칼에 세균이 붙어 있어서 병을 옮기는 수단이 된다. 칼을 소독해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 비웃는데도 불구하고 조지프는 수술하기 전에 불에다가 칼을 소독시켰습니다. 활활 타는 불에 칼을 집어넣어서 칼을 소독시키고 난 다음 수술했는데 조지프가 수술한 사람은 80%가 다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할 때 반드시 수술 칼을 소독해야 된다는 것을 증명을 했습니다. 여러분! 조지프 리스토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으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기도하셨으니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변화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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