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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와 사랑이 신앙입니다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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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사랑이 신앙입니다 (요 12:1-8)
   
오늘은 “감사와 사랑이 신앙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감사는 사랑에 응답하는 사랑이라” 합니다. 감사는 성숙한 신앙의 표지입니다. 감사, 사랑, 헌신, 이런 것을 진실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오늘 감사하고 사랑하고 헌신하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1) 나는 과연 주님을 사랑하는데, 이 여성처럼 사랑하고 있는가? 2) 나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데, 나는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3) 주님께서는 나의 사랑을 진심으로 기뻐하시고 있을까? 이런 것들을 생각을 하면서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물론 예수님이 등장하시고, 마리아와 그의 언니 마르다, 죽었다고 살아난 나사로, 그리고 마리아를 질책하는 가룟유다가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신 날이 유월절 엿새 전으로, 이 날이 니산월 8일이었고, 지금의 금요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떠나서 베다니에 도착하신 날이 유월절 엿새 전이고, 금요일이고, 다음 날은 토요일 안식일로 하루를 조용히 보내셨으며, 토요일 저녁에 시몬의 집에서 마련하는 잔치에 참석하시고, 이튿날에 베다니를 출발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바로 그 이튿날은 종려주일이 됩니다. 유대인의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생각하면서 금요일에 베다니에 도착하셨고,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고, 안식이 끝나는 시간 토요일 저녁에 잔치에 참석하시고, 그 다음 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이르셨는데, 이곳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곳이었습니다. 베다니라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위치에 있었고, 나병환자들이 집단적으로 살았던 성 밖의 동리였습니다. 잔치하는 집안은 나병환자였던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사를 종합해보면 잔치하는 집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었고, 나사로를 살려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 시몬이라는 사람은 과거에는 나병환자였는데, 예수님으로 인하여 고침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시몬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일과 나병환자였던 자신을 고쳐주신 사랑에 감사한 마음으로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시몬이라는 사람에 대한 다른 기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만 추측할 뿐, 정확한 가족관계나 그의 형편에 대하여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죽었던 나사로는 예수님 곁에 앉아있었고, 마르다는 이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로와 시몬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 시몬과 마르다와의 관계는 또 어떤 관계인지, 아주 가까운 집안으로 보이지만 꼭 집어서 이런 촌수의 집안이라고 말하기도 조심스럽습니다. 

유명한 주석학자인 렌스키박사는 나병환자 시몬은 마르다의 남편이었고, 죽었던 처남 나사로를 주님이 살려준 일을 감사하여 잔치를 준비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참고할 것이요, 시몬이란 사람과 마르다는 아주 가까운 관계임에 틀림없습니다. 한 동리의 가까운 이웃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잔치의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은 역시 일 잘하는 마르다였습니다. 마르다는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일을 본다”는 말은 음식을 준비하고 상을 차리고 시중드는 것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언제나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 분주하신 분입니다. 이런 여성이 없으면 일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마르다는 언제나 조연에 충실한 여성입니다. 항상 주연으로 나타나는 여성은 동생 마리아였습니다. 

이 잔치가 단순한 음식을 먹는 일로 그쳤으면 성경에 기록될 일도 아니었습니다. 한참 식사하실 때였는데, 한 여자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고, 또 발에도 부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고, 오늘 본문 요한복음에서는 발에 부어드리고, 마리아가 엎드려 그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으로 인하여 온 집안이 아주 좋은 향기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한 사람의 나쁜 행위로 악취만 풍기는 시대에, 한 사람의 귀한 헌신으로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최선의 헌신으로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마리아가 드린 향유는 매우 비싼 향유로 순전한 ‘나드’라는 이름의 향유였습니다. 그것도 옥합에 담겨 있었는데, 한 근이나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드라는 향유는 인도북부의 ‘나르도스타키스자타만시’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채취되는 것으로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부자들은 이러한 고가의 향유를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향유는 부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한 근이라고 하면 현재의 중량으로 환산하면 340g 정도였고, 값으로는 300데나리온 나가는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이런 향유는 고대 로마 사회나 유대인 사회에서 시신에 발라 악취가 나는 것을 방지하였고, 귀하신 손님이 방문하면 그 손님의 머리에 발라드려 환영을 표시하였습니다. 

향유는 무려 300데나리온이나 나가는 고가품이었습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장정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 옛날의 품삯을 오늘의 노임과 같이 놓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의 하루 노임을 오늘과 같이 많은 돈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하루에 장정이 와서 10만 원 정도는 받아야 겨우 자기 가정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라면 안식일을 제외하고 거의 일 년 일하고 모아야 하는 상당한 금액이었습니다. 

이렇게 비싼 향유가 있을까 하는 의심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가장 의심이 가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여자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유를 부어드린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정말 그렇게 비싼 향유가 있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예, 충분히 있었습니다. 향유를 바른다고 하여 배부르거나 귀한 신분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옛날 그 당시에는 값진 향유를 발라서 땀 냄새를 없이 해주고, 잘 사는 사람들이 한껏 멋을 낼 수 있는 것이 비싼 향유를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때는 이 순전한 나드 향유 원액에 포도주를 타서 희석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저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차와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커피라면 어떤 커피라도 잘 마십니다. 차는 우리나라의 보성녹차나 제주 설록차를 즐겨 마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윈난성에서 생산된 보이차도 마십니다. 

보이차를 알고 마시면 좋습니다. 2012년에서 2010년까지 최근 2-3년 전에 나온 차를 신차 또 햇차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값이 쌉니다. 가짜여서 싼 것이 아니라, 이런 차를 마시면 목이 따갑고 속이 메스껍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를 헐값에 사다가 몇 년 잊어버리고 묵혀두었다가 마시면 좋습니다. 보이차는 시간에 지남에 따라 발효되는 차이기에 때문에 햇차를 마시라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햇차를 대접하면 상대를 무시하는 결례가 됩니다. 

중국 윈난성 하관차창이 내어놓은 보이차가 36,000원 위안 우리 돈으로 6,400,000원이었습니다. 신문에서 보았는데, 보이차를 경매하는데, 100g에 2,300만원에 팔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100년 이상 된 복원창원차라는 보이차는 중국에서는 억대 나간다고 합니다. 아무리 몸에 좋은 차라고 해도 그렇지 억대가 나간다고 하면 믿을 것입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300 데나리온의 향유, 오늘의 가치로 약 3000만원이 나간다고 하면 조금은 과장된 것 같지만, 그렇게 좋은 향유라고 하면 당시에 시세에 밝은 가룟유다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언제 이런 값진 향유 원액을 가질 수 있었는지, 주경학자들은 마리아의 어머니가 딸이 결혼하면 선물로 주려고 마련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처녀인 마리아가 이렇게 값진 것을 준비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가지만 어머니가 물려준 것이라고 하면 이해가 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그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것은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옥합을 깨뜨렸고, 한 근의 많은 양을 단 한번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향유 냄새가 온 집 안에 가득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그의 머리털로 발을 씻었습니다. 자기 집에 찾아오신 손님의 발을 씻는 것은 하급 노예나 하는 일이었는데, 이렇게 향유로 발을 씻어드리는 일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의자에 기대어 비스듬히 반은 눕다시피 하여 음식을 먹었기에 발에다 향유를 붓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여성이 엎드려 그의 머리털로 발을 씻는 것은 보기에도 그렇게 좋은 모습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마리아의 마음을 깊이 읽어보았습니다. 순수한 헌신은 순수한 마음으로 보아주어야 합니다. 순수한 헌신인데, 이상하고,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위한 것인데, 순수한 헌신입니다.

1) 사랑의 보답입니다. 

가장 귀한 것은 가장 귀한 것으로 보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생각하기를 자기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요일3:1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비싼 것을 드림으로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린다는 표를 삼았습니다. 더 값진 것이 있었으면 그것을 드리고도 남았습니다. 사랑의 보답입니다.

2) 감사 곧 보은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신 그 무한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오라버니, 그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부모에 대한 기사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나사로는 그 집안의 가장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어 이미 나흘이 되었고, 사람들은 시신이 부패하였다고 하여도 무덤 문을 열라고 하시면서 나사로를 불러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나 하실 수 있는 일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빠의 생명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부었습니다. 

3) 제자로서의 헌신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드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씻어드리는 것은 주님의 제자로서 존경과 섬김과 순종을 보여주었습니다. 

4) 바른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고백을 무엇으로 표현하느냐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잘 들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발아래에 앉아서 깊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주님에게 어떤 중대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인류를 구원하시러 오신 메시아이셨습니다. 

당시 젊은 여성이 많은 남자들, 어른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 것은 젊은 여성들에게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행동 언어로 자신이 고백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신 메시아, 곧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적어도 한 여성은 예수님이야말로 기름 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가룟유다가 나섰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하였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망할 수 있었고, 그런 고가의 향유를 한꺼번에 사용하고 끝내는 것을 보면서 나무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생각하기를 3000만원을 가지고 쌀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큰 관심과 애정을 가진 것처럼 예수님에게 보여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공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며, 자신의 부정을 감추기 위함이었습니다. 

6절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는 돈궤를 맡고 있으면서 사적으로 꺼내어 쓰고, 훔쳐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룟유다는 며칠 후에 예수님을 팔아먹는데, 한 사람의 노예 값인 은 30세겔을 받고 팔았습니다. 은 30세겔은 장정이 120일 일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은1세겔이 4데나리온이었습니다. 300 데나리온이나 나가는 향유를 부어드리는 마리아를 책망하던 그 자가 은 30세겔을 받고 예수님을 팔다니,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느낍니다. 세상에 이런 자가 제자 중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 예수님은 다른 방법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스승을 배신한 것은 어디까지나 가룟유다의 죄악이요 용서받을 수 없는 최악의 범죄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여자를 괴롭히지 말고, 가만 두라고 하셨습니다. 막14:6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들과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마리아의 헌신에 아주 귀한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드린 것은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드린 것인데, 우리 주님은 당신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미리 준비한 것이 되었다고 더욱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드린 것은 감사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드린 것인데, 우리 주님은 당신의 장례를 예비한 것이라고 칭찬하시면서 더 귀한 의미를 부여해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헌신을 귀한 것으로, 더 귀한 의미를 부여하시면서 받아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좋으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헌신한 것, 결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지금 잔치하는 집에 와 있지만, 우리 주님은 앞으로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실 것을 내다보시면서 향유를 부어드린 일은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감지하지 못하였지만, 이 마리아는 바로 이 순간을 놓쳐버리면 다시는 향유를 부어드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부어드렸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도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해야 합니다. 막14:9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값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선물을 사준다고 백화점 여기저기 끌고 다닙니다. 그런데 값만 물어보다가 비싸서 살 수 없다고 하면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누가 무엇을 사달라고 하였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밖에 없으신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내어주셨습니다. 값없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고 싶으냐?”고 묻고 계십니다. 막12:30에는 “다하라”고 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성경에 다하라는 말을 네 번이나 반복하는 말씀으로 가장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신앙생활은 항상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신앙입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무엇을 좀 챙겨서 더 좋은 것으로 드릴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또 다시 감격스럽습니다. 최고의 것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물질, 건강, 사업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런 성도들의 얼굴이 항상 밝고 행복에 넘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비난도 그의 사랑을 꺾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일언반구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비난받을 각오였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옥합이 있습니까? 그 옥합에 무엇을 담아놓고 있습니까? 우선순위는 예수님이고, 다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우선순위를 모르고 구제를 말하는 사람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항상 그 다음이었습니다. 우리의 헌신을 크게 받으시고 의미를 부여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일생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한번 옥합을 들고 깨뜨려 부어드릴 수 있는 감사와 사랑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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