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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웃을 불편해 하는 시대 (마 5:3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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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불편해 하는 시대 (마 5:38-48)

 
저는 한동안 마음속에 큰 의문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의 행위에 간여하실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실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궁금한 면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인데 인간의 작은 행위, 인간 마음속의 작은 생각까지도 왜 간섭을 하실까? 우리가 땅에 개미가 기어가는 것을 볼 때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집니까? 개미의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인 판단을 내립니까? 그렇지 않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인간은 개미보다도 작은 존재인데 왜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은 관심을 갖고 도덕적은 판단을 내리신다는 말일까? 저는 이렇게까지 생각했습니다. ‘원래 도덕과 윤리를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고 사람이 만든 것인데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안 지킬 것 같으니까 하나님이 만든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사람이 만든 율법에 구속력을 더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끌어들인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사기극이 아닌가?’ 이것은 저에게 위험한 생각이었고 저의 믿음에 도전이 되는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의문을 가지신 적이 없습니까. 그런데 저는 해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에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귀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에게 잘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그냥 넘어가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점을 간과하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개미도 사랑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우리도 사랑하시고 개미도 사랑하시고 참새도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요구사항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벌써 몇 주째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유심히 읽어보면 하나님에 대한 말씀보다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 더 많아요. 하나님을 이렇게 섬겨라 저렇게 섬겨라 하는 말씀보다는 서로에게 사람에게 이렇게 해라 하는 말씀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더 어렵습니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의무만을 말했다면 단순할 것입니다. 하나님만 잘 섬기면 됩니다. 그럼 우리의 의무는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에게 어떻게 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더 복잡하고 더 성가시고 교회 문을 나간다고 우리 신앙적인 의무가 끝나지 않고 예배가 끝났다고 우리의 의무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웃을 마주칠 때 어떻게 하는가 하는 조사가 실렸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웃을 마주칠 때 모르는 척 한다고 했습니다. 인사를 해도 받지 않고 얼굴을 찡그린 체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그걸 가리켜 소가 닭 보듯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무조건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때는 농경사회였고 이웃이라는 개념이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원치 않지만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모여서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귀찮은 존재에요. 이웃이라는 단어는 실종됐고 서로에게 귀찮은 존재가 됐습니다. 위층에서 나는 소리는 반가운 이웃의 목소리가 아니고 소음이에요.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는 반가운 이웃이 아니고 내 가는 길을 막는 귀찮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이 막힐 때마다 불평합니다. 저 사람은 왜 집에서 밥하지 차를 몰고 밖에 나왔을까. 

은행이든 병원이든 관공서에 줄 서 있는 사람은 나의 반가운 이웃이 아니고 나를 기다리게 만드는 귀찮은 사람들이에요. 학원가를 가득 메운 학생들은 귀여운 어린이들이 아니고 장차 수능시험 볼 때 내 아이의 잠재적인 경쟁자들이에요. 사회가 각박하다느니 경쟁위주의 사회가 되어서 그렇다느니 라는 진부한 말은 우리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을 귀가 닳도록 들어왔지만 그것이 우리의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화시킬 것 같지 않아요. 우리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도시화와 인간 소외화는 더 가속되면 됐지, 역행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현상이 지속될 것을 전제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귀중한 것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냐. 이웃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이냐.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이냐.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이냐.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면 어디에서도 해답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을 위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이웃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특별히 무슨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요. 남을 위하지도 않고 해를 끼치지도 않습니다. 그냥 같은 공간에서 공존하는 것뿐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첫 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이웃에 대한 의무를 알고 그 수준까지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바로 누가 오리를 가자하면 오리를 가주고 누가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속옷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상한 성경구절입니다. 속옷을 달라는 사람은 뭐고 주는 사람은 뭡니까. 오늘날 이같이 하면 오해받습니다. 아무튼 두 번째 부류만 돼도 대단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바른 사람, 모범적인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그 이상에요.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는’ 이것이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주일학교를 초등학교 3학년부터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주일 학교 때 배운 것을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당시 저는 아직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주일학교 때 배운 것이 한 귀로 들어가서 다른 귀로 나왔습니다. 그 당시 제가 제일 기억하는 것은 출석을 부를 때마다 오늘 헌금 얼마 했느냐 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왜 그런 것을 묻는지. 그건 기억나는데 선생님들이 가르친 것은 하나도 기억 안나요. 그런데 하나 기억나는 것은 어느 날 장로님이 오셔서 분방공부를 맡으셨는데 바로 오늘 본문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그분이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을 돌려대라 이 말씀을 가지고 말씀하시기를 사람들 대부분이 오른손잡이인데 오른손잡이가 뺨을 치면 왼쪽 뺨을 맞을 텐데 왜 예수님은 누가 오른편 뺨을 때리면 이라고 말씀하셨을까. 그래서 그분이 뭐라고 해석하셨느냐면 우리가 누구를 업신여길 때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오른뺨을 때리지 않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왼뺨을 때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른손잡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때리기 때문에 오른편 뺨을 맞는다는 얘기입니다. 나중에 부르스 리 영화를 보니까 정말 그렇게 때리더라구요. 

저는 그 당시에 어린 나이지만 장로님의 말씀을 듣고 장로님이 오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력은 가상한데 본질을 비껴갔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의 오류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오른편이냐 왼편이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장로님의 논리라면 오른편 뺨을 맞은 사람은 계속 오른편 뺨을 돌려대야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똑같이 때립니다. 

사람이 오른쪽 왼쪽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이 충격이 될 것을 아셨어요. 충격을 받기를 원하셨어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어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이 구절은 들어서 알고 일평생 잊지 않습니다. 그만큼 충격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한 구절 때문에 일평생 고민합니다. 내가 남에게 내는 화에 대하여, 분노의 감정에 대하여, 예수님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아마 여러분 저에게 물어보고 싶으실 것입니다. 목사님은 왼쪽 뺨을 돌려댈 수 있습니까. 한번 때려보세요. 그러면 알게 되실 것입니다. 만일 누가 정말 저의 뺨을 때렸다면 그건 제가 맞을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제가 좀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아마 묵묵히 맞을 것입니다. 맞을 일을 했기 때문에. 

제가 캐나다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체육시간에 한번은 운동을 못하는 여학생을 큰소리로 놀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학생이 씩씩대면서 저에게 와서 뺨을 때렸습니다. I hate you 라면서. 저는 묵묵히 맞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학생은 바르게 반응한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울분을 마음속에 감추고 있으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저도 저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맞을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누가 때렸다면 생존의 차원에서 반응할 것입니다. 호신의 차원에서 생각할 것입니다. 저 사람이 계속 때릴까, 내 몸을 어떻게 보호할까, 그래서 도망가든가 아니면 설득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말로 하시라고. 그러면서 누가 동영상으로 이 장면을 찍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나중에 법적으로 소송할 때 필요하니까. 그게 아니고 만일 누가 제 보는 앞에서 제 아이의 뺨을 때렸다면 사람들이 말려야 될 것입니다. 그때는 제 눈이 뒤집어져서 저의 모든 무술 실력을 동원하여 응징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흥분이 가라앉으면 후회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비상식적인 것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에요. 도둑이 들어왔을 때 이것도 가져가라, 그걸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게 아니에요. 남의 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어서 오십시오, 이걸 말씀하시는 게 아니에요. 만약 국가의 지도자가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여러분, 우리 왼쪽 뺨도 돌려댑시다! 이렇게 말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탄핵해야 됩니다. 그걸 말씀하시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세 가지를 말씀하려고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는 악의 문제입니다. 39절에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번역에는 ‘악한 자’라고 하지 않고 ‘악을 대적지 말라’고 했습니다. 악을 대적하다가 우리도 악해집니다. 분노한 자를 대적하려다가 우리도 분노합니다. 폭력을 대처하려다가 우리도 폭력을 씁니다. 죄인을 대처하려다가 우리도 죄인이 됩니다. 악으로 악을 대처하는 것이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만일 세상의 악이 나를 악한 자로 만들어버린다면 악이 이긴 것입니다. 그것이 악의 전략이에요.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멀쩡한 사람이 세상의 악에 대처하려다가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으로 악을 대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선으로 악을 이기느냐? 왼쪽 뺨을 돌려댐으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둘째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랑. 사랑이 없어도 누가 오리를 가자고 할 때 얼마든지 오리를 가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도 얼마든지 법을 지킬 수 있어요. 사랑이 없어도 얼마든지 모범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에요. 아내 되신 분들, 사랑이 없어도 얼마든지 남편 밥상을 차려드릴 수 있습니다. 또 남편 되신 분들, 사랑이 없이도 얼마든지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갖다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혼생활에서 바라는 것은 그냥 밥상 차려주고 월급봉투 주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의무 그 이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오리를 가자고 했을 때 십리를 가게 되면 오리까지는 억지로 가는데 오리를 벗어나는 순간에 사랑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누가 속옷을 빼앗으려 할 때 속옷을 줄때까지는 이를 악물더라도 겉옷까지 줄 때는 사랑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의무까지만 해서는 늘 빼앗기는 마음이고 마지못해 하는 것인데 그것을 벗어나서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 해주게 되면 그때부터는 우리 마음속에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45절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불공평하지 않느냐. 불공평하다고 여기시는 분은 스스로를 선인으로 여긴다는 얘기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선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우리에게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이유는 우리가 선인이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악인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에요. 만일 하나님이 의인에게만 비를 내려주고 햇빛을 비춰주셨다면 우리는 옛날에 말라죽었을 것입니다. 이건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해당하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온전하시다는 말의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시다는 말은 까다롭고 어렵다는 말이 아니고 온전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참고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햇빛을 비춰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온전하시다는 말은 기쁜 소식이에요. 하나님이 온전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고 참아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함을 닮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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