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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회개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은혜 (눅 15:1-3, 11b-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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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회개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은혜 (눅 15:1-3, 11b-32)  

<‘회개’와 ‘은혜’로 ‘탕자의 비유’ 다시 보기>

오늘은 사순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이 사순절 한 가운데 들어와서 읽을 만한 가장 아름다운 말씀이 ‘탕자의 비유’입니다. 사실 탕자의 비유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잘 알고 있는 비유이기 때문에 유독 오해가 많은 비유입니다.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섣불리 대하기 쉽고, 또 잘 안다는 생각과 달리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 전달하시려는 핵심 메시지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비유를 ‘회개’와 ‘은혜’라는 두 축으로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모두 세 개의 비유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잃은 양을 되찾은 비유’(4〜7절), ‘잃어버린 동전을 되찾은 비유’(8〜10절), 그리고 오늘 봉독한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비유’(11〜32절)입니다. 모두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기쁨을 강조하는 비유이지요. 

해외에서 여행을 하다가 여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권이 없이는 여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찾고야 맙니다. 마찬가지로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는 4절 말씀 그대로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닙니다. 한 드라크마의 동전을 잃어버린 여인 역시 8절을 보면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습니다. 이와 같이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찾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찾는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비유 속의 주인공은 굉장히 무모한 사람들입니다. 잃어버린 대상이 대단히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불쌍히 여기는 마음 하나로 찾아냅니다. 전혀 합리적이거나 계산하는 사람들이 아니지요. 

이들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다음에 너무 기뻐서 반드시 이웃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입니다. 그 잔치경비가 양 한 마리 값이나 동전 한 드라크마보다 훨씬 더 많이 듭니다. 목자나 여인을 빗대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전혀 계산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냥 불쌍해서 찾는 것 뿐 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비유들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계산하지 않는, 무모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비유와 두 번째 비유에서 결론부는 항상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먼저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비유’의 결론부인 7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회개를 강조하지요. 

그 다음에 ‘잃어버린 동전을 되찾는 비유’의 결론부인 10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여기에서도 회개가 부각됩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 비유인 탕자의 비유에서도 그 중심 메시지는 당연히 ‘회개’일 것입니다. 이제 탕자의 비유에서의 회개 문제는 조금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처음의 두 비유를 ‘회개’라는 주제로 들여다봅시다. 흥미롭게도 양이나 동전은 회개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회개는 ‘잃었다가 되찾아지는 것’(the finding of the lost)일 뿐입니다. 이 경우 회개는 “길을 잃어버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길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our acceptance of being found)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는 비참한 존재였는데 하나님이 길 잃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찾아 살려주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변화가 옵니다. 그런대 그 변화는 길을 잃어버린 우리가 어떤 행동을 먼저 해서 생기는 변화가 아닙니다. 철두철미 길 잃은 우리를 먼저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양 한 마리나 동전 한 드라크마는 본래 주인에게 속했던 것을 되찾은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하나님께 속했는데 하나님의 품에서 뛰쳐나와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함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전에 없었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있었던 관계가 깨졌는데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주심으로 잃어버린 관계가 복원되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회개가 인간 편에서의 능동적인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아지는 데에서 오는 기쁨과 감사라는 점입니다. 
  

<집 나간 아들 집에 돌아오다> 

이제 이런 맥락에서 탕자의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비유의 전반부는 11〜24절입니다. 망나니 둘째 아들과 무모한 아버지가 부각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유산을 물려달라고 요구합니다. 중동지역처럼 가부장제도가 엄격한 사회에서 아버지나 맏아들이 아닌 동생이 제일 먼저 나타나 주제넘게 요구부터 하는 것은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는 유산을 물려받을 수 없으므로 유산을 달라는 말은 아버지가 급사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경우 아버지는 격노해서 아들의 요청을 물리쳐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둘째 아들의 뻔뻔스러움에도 놀라지만 바보같이 이 못된 아들의 요구를 묵묵히 들어주는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더 놀랐을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둘째 아들은 유산을 물려받아 먼 지방으로 가서 13절에 보면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고 말았습니다. 경솔하고 낭비벽이 있어서 재산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 탕진했다는 말이지요. 미래야 어떻게 되든 말든 지금 이 순간만 즐기면 된다는 생각으로 재산을 다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14절에 보면 재산을 다 탕진했을 때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 천재지변이기 때문에 둘째 아들의 책임은 아닙니다. 하지만 낭비벽으로 재산을 탕진한 것만큼은 자신의 과실이기 때문에 탕자의 재난은 인재와 천재가 합해서 일어난 결과이지요! 

결국 둘째 아들은 선민인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 의탁해야 할 신세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짐승이 돼지인데 돼지치기로 전락했고, 심지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완전히 인생의 밑바닥에까지 떨어졌습니다!

17절에 보면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스스로 돌이켜”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came to himself”,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하는데 한 가지 방법은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 뿐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품꾼들도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품꾼으로 써달라고 빌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도저히 아들이라는 주장은 할 수 없고 품꾼으로 써달라고 빌 각오를 하고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둘째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한 눈에 알아봤습니다. 20절을 보세요.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아들보다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버선발로 뛰어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체면을 중시하고 통으로 된 긴 옷을 입기 때문에 절대로 뛰지 않습니다. 지금 이 아버지는 아버지의 위신이고 체면이고 안중에 없습니다. 아들을 먼저 ‘보았고’, ‘달려갔고’, ‘목을 안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아직 어떤 고백이나 잘못을 빌기도 전에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봤습니다. 먼저 달려갔습니다. 먼저 목을 안고 키스를 퍼부었습니다. 

회개보다 은혜가 먼저 왔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회개를 앞섭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여기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설명이나 죄의 고백이나 용서나 약속을 먼저 구하지 않습니다. 이웃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체면이 구겨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들에게 먼저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을 베풀 뿐입니다! 

21〜22절을 보면 ‘아들’이 아닌 ‘품꾼’으로 그저 목숨만이라도 연명하겠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확실한 ‘아들됨’(sonship)을 회복시켜줍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줍니다. 모두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아들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것이지요!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품는 무조건적인 은혜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서 큰 잔치를 벌이는 것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회개를 앞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회개는 우리를 다시 맞아주시고 깨어진 아들됨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반응하는 것이지, 우리가 먼저 회개했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맞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므로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됩니다. 

뉴욕에서 31세 된 사회복지사 줄리오 디아즈(Julio Diaz)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퇴근길에 늘 그랬던 것처럼 지하철역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을 때입니다. 전혀 생면부지의 십대 소년이 칼을 들이밀며 돈을 요구했습니다. 

디아즈는 즉시 자기의 지갑을 꺼내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지갑을 받아든 소년이 쏜살같이 도망치려고 할 때 불러 세웠습니다. “이보게 소년, 조금만 기다려보게나. 밤 새워 강도짓을 하려면 추울 텐데 내 코트도 벗어줄 테니 입고하면 어떻겠나?” 깜짝 놀란 강도소년은 왜 자기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느냐며 어리둥절했습니다. 

결국 디아즈는 그 소년을 잘 설득해서 근처의 식당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맛있는 저녁을 시키고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참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지요. 칼로 자기를 위협한 강도에게 저녁을 사주다니! 하지만 디아즈의 친절에 강도 소년의 마음은 조금씩 변했습니다. 

드디어 식사비를 낼 차례가 되었을 때 디아즈는 소년을 타일렀습니다. “내가 너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싶은데 내 지갑을 네가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 할 수가 없구나. 내 지갑을 돌려준다면 내가 저녁을 사고 싶은데.” 소년은 순순히 디아즈의 지갑을 돌려줬고 그날 저녁은 디아즈가 대접한 것이 되었습니다. 디아즈는 소년에게 20불을 손에 쥐어주면서 그 대신에 이제 강도짓 하던 칼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소년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자기의 칼을 이름도 성도 모르는 이 젊은 신사에게 내주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회개가 은혜를 불러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서처럼 우리가 먼저 베푸는 하나님의 은혜가 ‘METANOIA’,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회개’를 불러올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탕자의 비유가 꼭 그렇지요. 자기가 죽게 되었을 때 죽더라도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품꾼으로 살다가 죽겠다는 탕자를 아버지는 품꾼이 아닌 아들로 먼저 품어주십니다! 우리의 회개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앞선다는 말이지요!

회개가 아들됨을 잃고 방황하던 우리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다시 발견되어진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한다면, 이제 하나님이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양을 되찾은 기쁨 때문에 마련한 잔치에, 동전을 되찾은 기쁨 하나로 베푼 잔치자리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행위입니다. 
  

<잔치에 안 들어가겠다고 몽니를 부리는 맏아들>

이제 탕자의 비유에서 후반부를 들여다보면 잔치 자리에 들어가기 꺼려하는 맏아들의 모습이 나옵니다(25〜32절). 맏아들은 등장할 때부터 동생과 다릅니다. 하루 종일 들판에 나가서 일만 하다가 집에 돌아오는 효자요 모범생입니다. 한 번도 자기 집에 없었던 음악소리와 잔치소리를 듣고서는 주인이면서도 어린 종에게 물어봐서 자초지종을 알게 됐습니다. 자존심이 팍 상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잔치에 안 들어가겠다고 떼를 씁니다. 

잔치를 배설한 주인으로서 잔치자리를 뜨는 것은 손님들에게 실례가 됩니다. 벌써 둘째 아들이 집에 돌아올 때부터 실례를 무릎 쓴 아버지는 또 한 번 자기의 체면을 구깁니다. 밖에 나가 맏아들을 설득합니다. 아들은 그동안 속에 담고 있던 불평을 모조리 쏟아냅니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왔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이 모범생이요 효자인 저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의 1/10 가격 밖에 되지 않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 준 적이 없는데 창녀들과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린 ‘이 아들’을 위해서는 잔치를 베풀었다”며 아버지에게 돌직구를 던집니다(29〜30절). 

하지만 아버지는 동생뿐만 아니라 형도 사랑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절).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은 기쁨 때문에 베푼 잔치에 맏아들도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맏아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모시고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고 하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 몰랐다는 것입니다. 집나간 동생을 그토록 되찾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뜨거운 마음을 몰랐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바로 살펴서 ‘자기’와 ‘아버지’의 부자관계부터 다시 정립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아버지의 좋은 아들이 되는 것은 반드시 동생의 좋은 형이 되는 형제관계의 회복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그동안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몰라서 부자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에 형제관계도 뒤틀렸습니다. 집에 돌아온 동생은 자기와 함께 피를 나눈 친동생이 아니라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 즉 아버지에게나 아들이었지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태도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오랫동안 뒤틀어진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가 용서를 빌고 회개하기도 전에 아들로 딸로 받아주십니다. 그 기쁨이 너무 커서 큰 잔치를 베풉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런 꼬락서니로 돌아온 탕자가 저런 잔치를 받을 자격이 있나? 혹시 정죄하며 잔치자리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맏아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그냥 기어 들어와 누더기 헌옷을 입고 헛간이나 사랑방에 숨어서 무릎을 꿇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석고대죄를 해야지 저렇게 즐거운 잔치자리의 주인공이 되다니! 누구나 다 이런 반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탕자의 비유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2절을 보세요. 탕자의 비유를 비롯한 세 개의 비유를 듣는 청중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자타칭 종교 엘리트요,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더러운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다니! 투덜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들으라고 예수님은 세 개의 비유를 나란히 연거푸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회개보다 앞섭니다. 아직 우리가 뚜렷한 회개의 표시도 없을 때 먼저 달려와 새 옷을 입히시고 가락지를 끼우시고 신발을 신겨주십니다. 회개는 이와 같이 먼저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지, 우리의 회개가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은 언제나 죽은 자를 살리시고 잃었던 자를 되찾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7절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하십니다! 

10절 말씀처럼 우리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합니다. 32절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잃었다가 다시 얻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십니다. 

우리 역시 그런 하나님을 본받아 다시 되찾아지는 것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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