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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 5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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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 53:4-8)

: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과 건강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 평화가 넘치는 이 나라, 이 민족, 한반도가 되기를 간절하게 소원합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이 선출되었습니다. 지난달 갑자기 사임한 베네딕토 16세에 이어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분은 아르헨티나 베르골리오 추기경(76세)으로 프란치스코 1세로 불리게 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첫 미사에서 예수와 십자가라는 기본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어디든 갈 수 있고, 많은 것을 지을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인심 좋은 비정부기구(NGO)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새 교황은 “십자가 없이 걷고, 십자가 없이 뭔가를 짓고, 십자가 없이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우리는 주 예수의 제자가 아닌 세속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세속적 가치를 앞세운다면 “우리는 주교일 수도, 사제일 수도, 추기경일 수도, 교황일 수도,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일 수도 있지만 주 예수의 제자는 아니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신앙만큼은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과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떠나서는 교회가 아닙니다. 의식과 형식과 조직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는 바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한 의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싹수가 없었습니다. 볼품이 없었습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고, 버림을 받았고, 간고를 겪었으며, 질고를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4b)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고난을 당한 실상이 공개 됩니다. 그것은 그의 고난이 누군가를 대신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I. 대속
  
여기에서 ‘대속(atonement)’이란 말은 “대신 죽으시다”는 뜻입니다. 이 의로운 사람의 고난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숨겨진 죄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욕을 받고, 고난을 겪은 것은 실상 다른 사람이 앓을 병을 앓아주며, 다른 사람이 받을 고통을 겪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 여겼습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에서 ‘지다[ac;n/나싸]’는 말은 ‘들어 올리다’, ‘나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에서 ‘당하다[lb's/싸발]’ 역시 ‘짐을 운반하다’, ‘나르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질고를 옮겨주기 위하여 대신 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슬픔을 옮겨주기 위하여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1. 우리의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많은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우리의 질고를 지심이었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배우 차인표가 딸 때문에 가슴 아팠던 사연을 공개했습니다.

그의 딸의 눈에 접착제가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딸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그는 생각할 틈도 없이 그대로 안고 병원으로 갔답니다. 마침 차가 막히는 시간이었고 병원까지 가는 한 시간이 정말 너무 길게 느껴지더랍니다. 

그런데 그는 병원을 가는 한 시간 동안을 딱 한 가지 생각으로 버텼답니다. 그것은 “예은아, 예은이가 조금만 더 크면 아빠가 아빠 눈을 빼서 꼭 예은이가 잘 볼 수 있도록 해 줄게. 걱정하지 마!”라는 것이었답니다. 그게 아버지의 마음이더라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병원에 가니 시력에는 지장이 없어서 ‘너무 감사했다’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딸의 눈을 위하여 자신의 눈을 뽑겠다는 것, 혹시라도 딸이 앞을 보지 못하게 되면 그 고통을 자신이 대신지고 딸은 보게 하겠다는 것이 이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모든 아버지들이 같은 마음이겠지만, 모든 아버지들이 모두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의 질고를 지고 슬픔을 대신 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그늘에서 행복과 건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무엇 때문에 겪으신 것이었습니까?
5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5a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의로운 종이 찔린 것은 사람들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사람들의 악함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찔림[ll'j/하랄]’은 ‘구멍을 뚫다’, ‘상처를 입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물[[v'P/페솨]’은 ‘반역’입니다. 사람들의 반역 때문에 몸에 구멍이 뚫어지는 상처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함[ak;D/다카]’은 ‘부스러뜨리다’, ‘으깨다’는 것입니다. ‘죄악[@wO[/아본]’은 ‘타락’, ‘불법’입니다. 사람들의 타락 때문에 몸이 으깨지고 부스러뜨려지는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2.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앞에서 예를 든 배우 차인표의 이야기는 아무 잘못이 없는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의로운 종의 고난은 허물 있는 사람을 위한 찔림이었습니다. 죄악이 있는 사람을 위한 상함이었습니다.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닮은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위하여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게 하셨습니다. 다만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간교한 사탄의 꾐에 빠진 하와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3)고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뱀은 확신 있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말씀을 어김으로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 3:8). 이것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깨어졌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단절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죽음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코로 숨을 쉬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이 떠나심으로 관계가 어그러졌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떠난 이 죽음에서 왔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는 심각한 것이기에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이셨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셔야 하셨습니까?
6절 말씀입니다.

: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습니다. ‘담당하다[[g"P/파가]’는 말은 ‘만나서 중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지셨습니다. 빚을 받으러 간 사람이 빚진 사람의 사정이 너무 딱하여 지갑을 털어주고 오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갑을 털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으로 사람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3.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키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 53:11)는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구속’(redemption)이란 말은 ‘대신 값을 치러주다’는 뜻입니다. ‘대속’(atonement)이란 말은 ‘대신 죽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값으로 지불하여 주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대신 고난 받으시고,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러주시고, 우리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자 정의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자신의 죄를 지고가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누리게 된 은총이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II. 은총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미친 효력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어떤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5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5b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는 우리가 누리는 첫 번째 은총이 있습니다.

1.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의 ‘평화[!/lv/솨롬]’는 ‘행복’, ‘건강’, ‘고요’, ‘안전’, ‘번영’을 의미하는 ‘샬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믿으면서도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건물 높이 올려달았다고 해서, 십자가를 액세서리로 달고 다닌다고 해서 십자가의 뜻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십자가를 끌어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게 되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는 우리가 누리는 두 번째 은총이 있습니다.


2.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나음[ap;r/라파]’은 본래 ‘꿰매어서 고치다’는 의미입니다. ‘치유하다’, ‘건강하게 만들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죽음의 병에서 놓여 건강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영혼이 잘 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여인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하여 영양주사만 맞으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아무리 진찰을 하여도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과에 의뢰했습니다. 정신과에서는 상담을 통하여 그 여인의 과거 문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여인이 결혼하기 전, 순간의 잘못으로 정조를 잃어버렸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점점 신체에 마비 현상이 왔습니다. 기도가 마비되어 숨을 쉴 수 없고, 식도가 마비되어 아무 것도 소화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의 문제를 찾았지만 죄책감을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의사들은 그 병원의 목사님께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여인과 상담하는 중에, 그 여인이 어려서부터 신앙을 가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 여인에게 죄 용서에 대한 말씀을 간략하게 해주시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당신의 죄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예, 압니다.”

“그것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모든 죄는 이미 용서 받았습니다. 용서받은 증거로 성찬식을 행하실까요?”

목사님은 성찬기를 준비하여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살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죄를 씻어 주기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던 여인이 성찬식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녀의 마비 상태가 풀렸습니다. 그 여인은 국과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차츰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죄의 올무에서 그녀를 해방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평화를 누리게 되었음을 확실하게 믿습니다. 그리고 또한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죄와 악이 있더라도 그 짐에서 놓여 자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에는 인간의 머리로 다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가려진, 은폐된 것이 있습니다.

  
III. 은폐
  
이렇게 좋은 일이라면 동네방네 북을 치고 장구를 치며 알려야 할 터인데 사람의 지혜로 알아차릴 수 없게 가려졌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은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1. 침묵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지셨습니다. 총독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말에 “네 말이 옳도다.”고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마 27:11).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총독 앞에서 여러 가지 말로 예수님을 고발할 때, 아무 대답도 안 하셨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말하기를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총독이 크게 놀랍게 여겼습니다(마 27:12-14). 예수님은 심문을 받으시는 자리에서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침묵을 통하여 자신이 죄 없으심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기꺼이 고난을 당하는 자신의 길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 순종하셨습니다.

때로 침묵이 웅변보다 더 많은 말을 합니다. 특히 신앙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웅변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아니 마음이 아니라 영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합니다(요 6:63).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살리는 영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살리는 영의 소리를 듣는 여러분의 영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으로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8절 말씀입니다.

: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오늘 말씀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는 의로운 종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도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2. 생각하지 못한 비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엡 3:8)이었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골 1:26)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드러내어 보여 주시기 전까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비밀이었습니다. 사람이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비밀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그래서 돈을 주고 사고 팔 수 없습니다. 힘으로 빼앗고 빼앗을 수 없습니다. 값으로 흥정하고 거래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나의 죄를 위하여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구해주었습니다. 아이는 그 사람에게 “선생님, 저를 구해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하지요?”하며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소년에게 이렇게 말하였답니다.

“천만에! 다만 한 가지만 언제나 기억하고 살기를 바란다. 너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걸고 구해낼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말고 살아다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까지 사랑하신 귀중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있지 마십시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 시대와 지역 속에서 평화를 이루며 세상을 살리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승리하시기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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