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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처럼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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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처럼 (행 3:1-10) 
 
교회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생활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주님이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기도 하지만 혹 환경이 변하지 않아도 마음이 변합니다. 마음이 변하면 삶도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환경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여 어둡게 살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소망이 넘치고 밝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의 간증이 잡지에 실렸습니다. 그 장로님은 평소 늘 전도하는 분이신데, 어느 날 택시를 탔습니다. 기사분이 젊은 나이인데 얼굴이 너무 어둡고 말도 퉁명스럽게 하더랍니다. 이야기를 걸어 전도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데,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자기는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사연이 있나 살살 달래면서 이야기를 걸었습니다. 

마음이 서서히 열리며 자기 사연을 말하는데, 정말 자살할 생각을 가질 만했습니다. 큰 교통사고가 나서 누워있는데 부인이 도망을 갔답니다. 그리고 누님은 중풍으로 누워있어 대소변을 받아내야 되고, 여동생은 정신 이상으로 격리 수용되어 있어서 조금만 틈나면 면회 가서 돌봐줘야 하고... 당장 죽고 싶어도 자기가 죽고 나면 누님과 동생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면 차마 자살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장로님은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집 나간 부인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누님의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동생의 정신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 하셨는지 솔깃해져서 말씀을 다 듣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교회 못 가요! 먹고 살아야 되는데 시간이 있나요? 게다가 헌금할 돈도 없어요!” 그 말을 듣고 장로님은 교회 가고 헌금 하는 게 당연하고 좋은 일이지만, 교회 못 나가고 헌금 못 해도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방송을 듣고 설교 테이프 들으면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주소를 묻고 설교 테이프를 보내준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지난 어느 날 택시를 잡으려고 길가에 서있는데, 멀리서 택시가 총알같이 달려와 끽~하고 서는 것입니다. 보니까 그 기사분입니다. 택시를 탔는데 영 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는지 물었더니 모든 환경은 그대로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자기 마음이 왠지 기쁘고 평안하니까 너무 좋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요즘은 손님들에게 전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때로는 예수 믿어도 주변 환경이 바뀌지 않고 문제가 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변화되면 그 어떤 고난도 이기게 됩니다. 
   
본문은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굉장히 극적인 변화입니다. 40이 넘도록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걸인 이야기입니다. 그는 늘 성전입구에서 구걸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들어가는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무엇을 얻을까하여 베드로를 바라봤습니다. 베드로는 그를 향해서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걸인은 베드로의 말을 듣고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는 평생 구걸하기 위하여 성전에 왔다가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을 만났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본문을 가지고 앉은뱅이 걸인에 초점을 맞춰서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앉은뱅이를 일으켰던 베드로에게 초점을 맞춰서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설교 제목은 “베드로처럼”입니다. 
   
세상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지만 베드로처럼 주님의 임재를 실감나게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본문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그 일로 솔로몬 행각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거 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생활은 살아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주님이 증거 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변화되고 주님에게 돌아오는 신앙생활입니다. 말세를 사는 우리들에게 베드로와 같은 역동적인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럼 본문을 통해서 베드로의 살아있는 신앙생활의 비결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정시기도입니다(1절). 
   
베드로가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정시기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입니다. 베드로도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제9시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도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하게 기도하는 베드로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본문의 기적이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기도회가 있습니다. 다양한 기도회를 만든 이유는 몇 사람이라도 베드로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를 바라는 저의 소망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규칙적인 기도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규칙적인 제사를 드리도록 규정해 놓으셨습니다. 민 28장에 보면 매일 드리는 상번제가 있습니다. 상번제는 하루에 두 번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매일 두 번에 걸쳐서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 규칙적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 3번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기도하면 사자굴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하루 3번의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다윗은 시 55:17에서 자기는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다윗도 정해진 시간에 정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병사가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그 병사를 구해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 때 동료 병사가 시계를 쳐다보더니 부상당한 병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그 모습을 본 지휘관이 놀랍니다. 지휘관은 두 명의 병사를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상당한 병사를 동료병사가 구출해 내는 겁니다. 두 병사가 모두 살았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지휘관이 총에 맞은 병사를 구출해 온 병사를 불러 물었습니다. “자네는 전투 중에 왜 시계를 보고서 병사에게 달려갔는가?” 

그러자 병사는 대답합니다. “예, 제가 전쟁터에 나가려고 할 때에 어머니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매일 12시가 되면 정기적으로 기도를 할 테니까 안심하고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시계를 보았을 때가 바로 12시였습니다.” 병사는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어머니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고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도 동료를 구하러 갔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루 중 언제 기도하십니까? 저는 강단에서 기도를 강조하는 목사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교인 중에 소수의 사람만이 정시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살아있는 신앙생활,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원하시는 분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할 때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는 평신도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전제 되어야 합니다. 기도 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을 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가 커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강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2. 성전 중심의 생활입니다(1절). 
   
두 번째 베드로에게 배워야 할 것은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전'이라는 말이 다섯 절에 여섯 번 나옵니다(1,2,3,8,10절).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사와 이적은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해서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당시에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던 때라 초대교회 기독교인들도 성전을 찾았습니다. 세월이 좀 지나고서야 교회당이 세워지고 교회당 중심이 되었지 그 당시는 성전중심이었습니다. 그 당시 성전중심은 지금으로 보면 교회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영국인들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6-70%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2-3% 뿐입니다. 그러니까 영국 도심의 그 큰 예배당들이 주일날이면 노인들만 5-60명 나오고 여행객들을 포함해서 100여명이 예배드리는 실정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몇 천 명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에 몇 십 명 혹은 100여명 모여서 예배를 드리니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그 결과 교회들이 유지가 어려우니까 교회를 파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극적인 것은 교회가 때로는 카페로 팔리고 또 회교도들에게 이슬람 사원으로 팔려나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일이 한국에도 곧 일어날 것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의 특징 중에 하나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중심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에 모이는데 관심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 모임이 약해지는 이유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져서 그렇습니다. 
   
시84:1,2에 보면 시편기자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주의 전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쇠약해졌다고 말합니다. 시 84:10에서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이라고 고백합니다. 시편기자는 주의 전에 있는 것을 그만큼 가치 있게 여겼던 것입니다. 
   
교회 가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교회 안에 매를 맞으면서 교회에 다니는 분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매를 맞으면서도 교회를 다녔는데 요즘은 조금만 바쁜 일이 있어도 예배를 빼먹습니다. 그리고도 전혀 불편함이 없이 살아갑니다. 저는 이것이 이 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는 청년 때 휴가를 쓰지 않고 모았다가 여름에 수양회 가고 성경학교 하는데 사용했다고 합니다. 휴가를 수양회와 성경학교에 맞추는 것이 쉽지 않으니 철야기도도 하고 금식기도도 했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제 아내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전국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만큼 교회를 사랑했던 것이고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신앙이 뜨거웠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오늘날 한국을 이만큼 축복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3.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입니다(4절). 
   
베드로는 구걸하는 거지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보라는 말은 사역자에게 집중하라는 의미입니다만 저는 여기서 베드로의 자신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를 보라고 할 정도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보고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요즘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우리를 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모습이 많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는 거의 한국에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영향력은 그 건물만큼 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목사님들이 바로 살지 못해서 그렇고 성도님들이 바로 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는 한국회가 세상을 향해서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어느 신문에 났던 이야기입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부정과 부패가 심했습니다. 지방관리들까지도 횡포가 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지방관리로 파송되는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곳은 교회가 왕성한 지역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많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은 고작 1∼1.5%정도였습니다. 그래도 탐관오리들에게는 교회가 무서웠습니다. 교회가 왕성한 곳에서는 부정을 저지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방 후에 김구 선생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경찰서 백 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가 너무나 부끄러워졌습니다. 목사님들이 잘 못 살아서 그렇습니다. 성도님들이 잘못 살아서 그렇습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총장을 지내신 임택권 목사님의 설교 중에 어느 식당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개했습니다. 임목사님이 식사를 하기 위해 뷔페식당에 갔는데 아이들이 식당 안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난장판을 만드는데도 부모들이 한 번도 제지하질 않더랍니다. 심지어 한 아이는 감기로 기침을 하는데 음식 앞에서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침이 음식 안으로 들어가고 그 음식을 젓가락으로 뒤적이기까지 하는데도 부모들은 전혀 개의치 않더랍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부모가 대부분 교회 직분자였습니다. 집사님들이 자리를 잡고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오기까지 기다리면서 하는 말이 과관이더랍니다. “아직 아무개 목사 안 왔어?” 목사님도 아니고 그냥 목사라더랍니다. 

제가 목사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목사는 주의 종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은 목회자를 얼마나 존경하느냐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니 주의 종을 사랑하고 주님이 귀하니 주의 종이 귀한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성경에서는 주의 종을 가볍게 여기던 사람들은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주의 종을 주님 대하듯 하는 사람들은 복을 받았습니다. 성경! 을 아는 사람들은 주의 종을 극진히 대접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대접을 받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제 아내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주의 종을 잘 대접해야 성도들이 복을 받는다” 맞는 말입니다. 성경에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주의 종을 섬길 때는 최선을 다해서 섬겨야 합니다. 자기 수준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 섬기듯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여러분에게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뷔페식당에 있던 교인들은 “아직 아무개 목사 안 왔어?”하더랍니다. 목사님이 아닙니다. 그냥 목사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담임목사님이 오자 태도가 180도로 달라지더랍니다. “아이구 목사님 오셨습니까?” 그리곤 옆자리의 손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가 옆 좌석까지 생생하게 들려오더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화하는데 정신이 팔려 아이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더라는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바로 옆 좌석에서 식사를 하던 50대 중반의 두 신사가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서 “저 예수 믿는 놈들 없어져야 해”라고 하더랍니다. 정말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입니다. ! 우리를 보라고 말하며 주님을 보여줘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며 주님의 얼굴에 똥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리 포스딕 목사는 크리스찬을 둘로 구별하였습니다. 하나는 심미적 크리스찬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크리스찬입니다. 심미적 크리스찬은 감상하고 즐기는 크리스찬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평화를 즐기고 설교를 통해 위로를 받고 흐뭇한 감정에 젖는 크리스찬입니다. 이에 반하여 윤리적 크리스찬은 예배와 말씀을 접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절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윤리적 크리스찬이 되지 못하고 심미적 크리스찬으로 그친다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없이는 세상을 향해서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변화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향해서 “우리를 보라”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교회가 인구의 7%가 성도였을 때 로마황제를 굴복시키고 국교가 되었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이 확실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부끄럽지 않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성도들은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시대는 성적으로 문란한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크리스천을 며느리고 삼으면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고관집에서는 크리스천 며느리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씨앗이 되어 크리스천 자녀들이 고관집에서 태어나고 드디어 로마의 주류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베드로처럼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해서 세상을 향해서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확신입니다(6절). 
   
베드로는 무엇을 얻을까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앉은뱅이에게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 말을 듣고 앉은뱅이는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 걷고 뛰었습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보물 제 1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보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고 그분 안에 구원이 있고 그분 안에 참된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금과 은은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건물 이층을 세 얻어서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입니다. 오라는 교인은 안 오고 교인보다 걸인이 먼저 와서 구걸을 하더랍니다. 주머니에서 오백 원을 꺼내주었더니 걸인이 섭섭한 표정으로 적다하며 거절을 하더랍니다. 목사님은 화가 나서 걸인을 붙잡고 부엌에 있는 빈 쌀통을 보이며 “이 오백 원으로 라면을 사서 우리 네 식구 저녁 식사할 것을 당신에게 주었는데 적다합니까?”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놀란 걸인은 “미안합니다”고 말하고는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걸인이 저녁 때 쌀 한 자루와 아이들 간식을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걸인 덕분에 온 식구가 당분간 먹는 걱정 안하게 됐습니다. 누가 걸인이지 구분이 안 됩니다. 목사님은 날씨가 너무 추워 걸인을 그냥 보내지 못하고 예배당 문간방에서 자고 가라했습니다. 그랬더니 그해 겨울을 그곳에서 기거했습니다. 걸인도 유니폼 있어 아침에 구걸 나갈 때는 헌옷으로 갈아입고 저녁에 퇴근해 돌아올 때는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간간히 쌀도 가져오고 아이들 위해 먹을 것도 얻어오니 아이들은 걸인 아저씨 기다리는 희망으로 잠도 자지 않더랍니다! . 그런데 봄이 오니 어느 날 걸인은 말없이 떠나버렸습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개척교회의 현실입니다. 교회는 은과 금을 세상에 줄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정말 필요한 것은 금과 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느 전도자가 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걸인에게 돈을 주려고 주머니를 뒤지며 걸인 앞으로 다가갔지만 마침 그의 주머니에는 동전 한 푼도 없었습니다. 전도자는 손을 내밀어 걸인의 손을 따뜻하게 쥐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죄송합니다. 마침 제게 준비된 것이 없군요. 그러나 추위에 차가워진 당신의 손을 잡아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용기를 내어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새 생활을 시작해 보십시오” 걸인은 전도자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나에게 적선한 모든 이들보다 더욱 값진 선물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은과 금을 줄 수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차원에서 보면 세상에서 몇 조 원의 재산을 가진 부자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갖지 못했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영원한 차원에서 보면... 반대로 이 세상에서 남에게 줄 은과 금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유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영원한 차원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에 관심이 많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아이가 스케이트를 타다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다들 구경만 하고 서 있는데 한 아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물에 빠진 아이를 극적으로 구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며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때 아이가 대답하기를 “저 아이가 제 스케이트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아이는 물에 빠진 아이의 생명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스케이트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에게 가장 유용한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은과 금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은과 금이 아닌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름을 사용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류영모 목사님이 아주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부엌에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엄마가 밥을 빨리해야 되는데 부엌을 비울 수 없으니 가게에 가서 두부 두 모만 사와라”, “돈?”, “그냥 가져와”, “돈 없는데 어떻게 두부를 가져와?”, “엄마 이름만 대” 류영모 어머니는 새말댁입니다. 류영모 목사님이 가게에 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새말댁 큰아들 영모예요. 두부 두 모 주세요?” 그랬더니 두말하지 않고 두부를 주더랍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군것질하고 싶으면 어머니 이름만 대면되었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월말이 되면 그것 갚느라 혼이 났구요. 어머니 이름이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인도의 선교사로 잘 알려진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은 69살에 중풍에 걸려서 쓰러졌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데 의사들이 다 말했습니다. “나이가 고령이고 뇌혈관이 터졌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스탠리 존스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믿음의 힘을 믿었습니다. 선교사님은 방에 들어오는 간호원이나 의사들보고 “안녕하십니까? 그런 소리하지 말라. 반드시 나를 보면 제일 먼저 ‘스탠리 존스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의사와 간호사들은 스텐리 존스 선교사가 시키는 대로 그를 볼 때마다 ”스텐리 존스는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탠리 존스 목사님이 중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인도로 돌아가서 20년 동안 더 하나님 사업을 하다가 천국에 가셨습니다. 스텐리 존스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가 사용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스텐리 존스가 사용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의 파워는 사용하는 사람의 믿음과 기도생활 그리고 경건함에 따라서 차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용한다면 그 능력이 눈에 보이게 실제가 될 것입니다. 
   
저는 꿀벌 전도학교 이건희 목사의 간증을 듣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명령기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앞 가로수 때문에 교회가 가려졌습니다. 목사님은 가로수 앞에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가로수야 사라져라”고 명령했는데 다음 날 구청에서 와서 베어버렸습니다. 저는 그 간증을 듣고부터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기 시작해서 많은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여 체험한 기적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간증은 냉장고와 텔레비전과 세탁기가 들어온 사건입니다. 오금동에서 교회를 시작할 때 강단 뒤에 방 하나를 만들어서 생활을 했습니다. 방을 만드는 공사를 하면서 살림살이가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기도를 했는데 제가 명령했던 그대로 공기방울 세탁기와 탱크 냉장고 그리고 개벽 X5라는 텔레비전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교회와 여러분의 생활과 사업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전투적인 기도가 필요한 때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잭 헤이포드 목사님은 더 처치 온 더 웨이(the church on the way)교회를 개척하여 지금 매주 1만 명 이상이 출석하는 대형교회를 이룬 훌륭한 목회자입니다. 헤이포드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헤이포드 목사님이 혼자 예배당에 있을 때면 가끔 강대상 주변에 어떤 이상한 것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작고 거무스름하고 구름같이 생긴 물체인데 곧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헤이포드목사님은 그것이 교회 내에 역사하는 사탄의 세력임을 감지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어둠의 영을 추방하라고 하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주된 무기가 바로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매주 예배당을 거닐면서 음성을 높여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와 영광을 선포하고 그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였습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은 1년 이상 전투적인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 그동안 교회를 억누르던 악령이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이 되자 170명이나 되는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설교는 살아있는 신앙으로 기적을 일으킨 베드로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을 배우고 주님을 더 깊이 경험하므로 승리하시고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1. 정시기도입니다(1절). 
2. 성전 중심의 생활입니다(1절). 
3.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입니다(4절). 
4.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확신입니다(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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