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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회복해야 할 십자가의 신앙 (갈 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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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해야 할 십자가의 신앙 (갈 2:20-21)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위해 어린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옷을 펴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고 주님을 환영한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함과 동시에 이번 한 주간은 고난 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여정을 더듬어 보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주간을 말합니다. 

중앙일보 종교담당 기자로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모아 ‘현문우답’이란 책을 발간한 백성호 기자가 전 세계를 다니며 종교지도자를 취재하면서 이들이 과연 어떤 성경구절을 좋아 하는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취재가 끝날 쯤에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그가 만난 신학자, 목회자, 설교가, 부흥사, 영성가, 선교사, 영적인 지도자들이 거의 대부분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백성호 기자는 신구약 성경에 수많은 말씀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대변할 말씀으로 한결같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을 놀라운 톱뉴스라고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참 자유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으로 “자유의 대헌장”이라고도 말합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통해 사람이 죄와 사망과 사단으로부터 어떻게 자유하게 되었는지를 확실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십자가 밖에서는 ‘구원’이나 ‘참 자유’ 그리고 ‘은혜’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서 출발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신 곳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것을 믿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따라서 십자가 없는 기독교 신앙이나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십자가의 신앙을 가지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핵심이요,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핵심이며, 성경말씀의 핵심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능력의 최고 최대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정작 십자가의 참된 신앙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 교회와 성도들이 십자가의 신앙을 잃어 버렸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십자가를 외면한 교회, 십자가를 들을 수 없는 설교, 십자가가 빠진 신학, 그리고 십자가 없는 신앙 등이 현대 기독교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분명히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영생 그리고 부활에 대한 보증수표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은총이 아니면 영생이 없으며,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결국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만이 신앙의 생명을 되찾는 길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도 십자가에 있습니다.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십자가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신앙입니다.

본문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비장하면서도 가슴 뭉클한 표현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죽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장차 십자가의 자리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못 박힐 예정이다" "못 박히려한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수동태 완료형입니다. “이미 못 박혀 죽었고, 지금까지 못 박혀 왔고, 현재도 못 박힌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미 죽었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입니까? 바울의 “옛사람”입니다. 

옛사람이 무엇입니까? 옛사람은 나의 옛 본성을 말합니다. 이전에 바울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해 자기 열심과 성실과 힘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그는 의롭게 되고자 율법의 엄한 교훈을 지키려 몸부림쳤었고, 이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절망하고 고통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의와 교만에 빠져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열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했습니다. 감정과 혈기를 부리며 내면에는 평화가 없었고, 영혼은 곤고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찾아 나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고 믿음의 낙오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예수를 믿기 이전의 옛사람 그대로를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먼저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뜻대로 살아온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서는,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내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을 계속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성화와 성결을 방해하는 부패성을 십자가에 못 밖아 죽여야 합니다. 악한 생각을 못 박아 죽여야 하고, 세상을 좋아하는 방탕과 쾌락과 육신의 정욕을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천국 가는 생활을 방해하는 세상 것들을 모두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과 함께 죽는 십자가의 생활입니다. 이렇게 옛사람을 죽인 사람은 신앙생활이 달라지겠지만,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밖아 죽이지 못한 사람은 세상사람 그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분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롬 6:3-4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세례란 한마디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나를 못 박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의식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세례 받으신 분들은 오늘이 장사지내는 날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새롭게 태어나는 날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으신 분들도 날마다 이것이 삶을 통해 반복되는 것입니다. 나의 과거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장사지내고, 주님과 함께 새롭게 부활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죄에 속해 있었던 옛사람을 이처럼 십자가에서 못 밖아 죽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십자가의 신앙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우리 가운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사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확신하며 오늘 20절 중반절에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것은 자신은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므로 내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만 살아 계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은 우리가 이제 예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관하는 예수 성품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마음속에 주인이냐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주인은 무엇이고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영국을 최대의 강국으로 번영시킨 여왕이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어떻게 그가 영국을 해 가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습니까? 믿음으로 영국을 통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빅토리아 여왕이 이렇게 믿음이 좋아지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여왕이 가난한 여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여왕이 친히 방문해 주니까 너무 황송해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여인에게 여왕이 묻습니다. “아주머니, 이제까지 이 집을 찾은 손님 중에 가장 고귀한 손님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저에게 가장 소중한 손님은 여왕 폐하시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여왕은 “예수님이 아주머니를 찾은 가장 고귀한 손님이겠지요”라고 말하자, 그 이 여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폐하, 예수님은 손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저의 주인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여왕은 아주머니의 훌륭한 신앙을 칭찬하고 왕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궁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나는 오늘 여인의 집을 위로 차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천사였습니다. 나의 주 나의 왕 예수여, 이 나라에 세세토록 주인이 되시고 이 궁실의 주인이 되소서. 그리고 제 생전에 강림하시어 이 왕관을 주의 발 앞에 드리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의 생명도 주의 것이요, 나의 사업도 주의 것이요, 나의 자녀도 주의 것이요, 나의 재산도 주의 것으로 고백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을 나그네로 모셔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나의 집에 잠시 다녀가시는 낯선 분으로 영접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모든 삶을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통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어주신 주님을 나의 삶에 주인으로 모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0절 하반절에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 안에서”라는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생애는 자기만족과 자기명예와 육신적인 소망을 이루는 일에 분주했으며, 그 같은 목적을 가지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생애의 목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 감독인 폴리갑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도록 충성한 제자였습니다. 주후 155년 빌라델비아의 성도 11명과 함께 불에 타 순교했습니다. 순교 당시 폴리갑은 “로마의 황제가 주님이다”라는 고백을 강요당했습니다. 그러나 폴라갑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투기장에 끌어다 놓고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서머나 총독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단 한번만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그를 모른다고 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86년 동안 나에게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고, 한 번도 나를 배신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그 분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결국 폴리갑은 끝까지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불에 타서 장렬하게 순교했습니다. 

폴리갑은 폴리갑을 사랑하사 그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위대한 순교적신앙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대체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인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예수중심의 삶과 자기중심의 삶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삶의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중심입니까? 아니면 자기중심입니까?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를 위해서 살다 간 예수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가 일생동안 자랑한 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예수님 자랑이었고 십자가 자랑이었습니다. 사실 그에게는 자랑할 조건들이 이 땅에 너무나 많이 있었습니다. 순수한 혈통을 가진 유대인이며,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며,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또한 그 시대에 얻기 힘든 로마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삶을 살 수가 있었고, 엄청난 자랑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님을 알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영접한 후에 더 이상 세상 것들이 자기의 자랑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난이후 예수 안에서만 기뻐하였고, 세상의 모든 욕심을 버리고 예수로 자족하였으며, 예수라는 분에게 자기 전 생애를 완전히 바쳤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오직 주님만 사랑했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일생이 그토록 위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에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십자가는 많이 있지만 진정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그 의미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없지만 진정 십자가의 사랑이 살아있는 교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교회 종탑이나 제단에, 십자가 마크가 선명하지만 나의 마음, 나의 가정, 나의 교회 생활에는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이 진정 숨 쉬고 있습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향한 감격을 잃고 있다면 영적인 깊은 질병이 들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없으면 죄 사함도 부활도 없고,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사순절이나 고난주간, 성찬식 때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십자가는 핍박과 고난과 환난의 상징만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더 깊은 곳에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 있고, 부르심의 사명이 있고, 생명과 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항상 지고 가야할 삶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하여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십자가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해보시고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신앙으로 사는 성숙한 성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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