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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그는 죄가 없도다 (요 1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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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죄가 없도다 (요 19:1-16)

보라 이 사람이로다

일차 심문에서 빌라도는 무죄를 선언한바 있습니다. 그는 곧 유월절 특별사면으로 예수를 놓아주자고 제안했습니다. 무죄를 선언했으면 당연히 놓아 주어야지 놓아 주면 어떻겠느냐고 묻는 것은 또 무슨 재판장입니까? 어쨌든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의 비위를 맞추어가면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특별 사면 대상자로 예수를 택하지 않고 민중봉기의 주동자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브라이도리온으로 들어가서 예수를 채찍질 하게 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1) 당시의 채찍은 무서운 고문이었습니다. 가죽 끈 끝에 쇠붙이를 달아 때릴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당시에 아나니아의 아들이었던 어떤 예수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알비누스 앞에서 채찍에 맞아 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보였다고 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보면 폴리캎 시대의 어떤 순교자는 채찍에 맞아 정맥과 동맥이 보일 정도로 패이고 내장이 다 보였다고 합니다. 채찍에 맞는 도중에 죽는 일도 흔히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지 6시간 만에 돌아가신 까닭도 심한 고문의 후유증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채찍질 후에 군병들은 가시로 관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손에 갈대를 들려주었습니다.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2-3) 가시관은 왕관을 대신한 것이요, 자색 옷은 왕복을 대신한 것이요, 갈대는 왕의 홀을 대신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왕권을 조롱하자는 짓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침 뱉고 얼굴을 때리고 절하며 조롱했습니다. 
  
채찍질 후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리고 브라이도리온 밖으로 나와 대제사장들과 군중들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리들에게 말했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4-5) 

빌라도의 채찍질에 대해서는, 상당 수 사람들이 선의(善意)로 해석합니다. 즉,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조롱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시기심을 누그러뜨리고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했다는 뜻입니다.(눅23:16) 빌라도는 예수를 끌고 나오면서 “보라, 이 사람”이란 말을 반복했습니다. “사람”(a[nqrwpo")이란 말을 강조했습니다. “봐라! 너희가 왕으로 고발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나에게 충분히 매 맞고 대항도 못했다. 그러니 놔 주자!”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6) 이때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무리는 대제사장들과 그 하속들입니다. 아마 일반 군중들은 예수님께 대한 한 가닥 동정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약한 대제사장 무리는 앞장서서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발끈 화가 났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작자들은 저렇게 무죄한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가?  빌라도는 보다 강력하게 말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6) 나는 이 일에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다. 너희가 죽일 수 있다면 데려다가 죽여 봐라! 빌라도는 예수로 말미암는 재판에서 손을 떼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겠다는 결의를 표명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한 구체적 죄목을 대기 시작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한 죄목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7) 레위기 24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예수가 이 조문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하나님의 친 아들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신성 모독 죄가 성립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 하는 사실 여부에 달린 문제입니다. 만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신성 모독죄로 처벌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신성 모독 죄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오히려 고소하는 자들이 천벌을 면지 못할 것입니다.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나오니까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바로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신의 아들이라면 얼마나 겁나는 일입니까? 당시 로마인들의 神觀을 보면 빌라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보면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에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준 적이 있습니다.(행14:8-10) 

그 때에 성중 사람들이 떼를 지어 바울과 바나바가 머물던 집에 나타났습니다. 제우스 신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이 소를 잡아 가지고 화관들을 들고 왔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빌라도 역시 신은 언제나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란 사람이 바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그 때에 빌라도의 아내는 재판석에 앉은 빌라도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마27:19) 

예수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그 꿈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좌우간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에 대단한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께 묻습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9) 이 말은 세상적인 출신을 묻는 말이 아닙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요,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식의 신분은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의 말은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두려움의 질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잠잠하셨습니다.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는 이미 충분히 밝힌바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말한다 해도, 神과 인간이 雜婚(잡혼)을 하는 로마식의 神觀(신관)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됐든 빌라도는 예수님의 침묵에 대하여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변변찮은 자기 지위를 내세웁니다. “내게 말하지 않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0)  
  
권세 말이 나오니까 예수께서 한 말씀 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11) 주

님의 말씀은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로, 권세는 위에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로 그 권세를 잘못 사용함에 있어서 안나스와 가야바는 빌라도보다 더 악하다는 말씀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정말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를 골고루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인으로서, 민족의 지도자로서, 재판관으로서 범죄에 앞장섰습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전혀 무죄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았습니다. 어리석은 군중을 선동해서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유대인의 왕”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 알면서도 일부러 로마법으로 덮어 씌웠습니다. 마침내는 빌라도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서 잘못된 재판을 하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양심의 가책을 표시한 적이 없습니다. 무죄자에게 극형을 가하면서도 최소한의 동정심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감정이 다 망가진 인생들입니다.  
  
이에 비하면 빌라도의 죄는 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빌라도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빌라도 역시 연약한 인생의 표본입니다. 그는 정의를 알았으나 정의를 실천하지는 않았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고민했으나 양심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무죄를 세 번씩이나 선언해 놓고도 예수를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옳은 사람이라고 해 놓고도 채찍질하고 조롱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아내가 전하는 꿈 얘기를 들으면서, 무죄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양심의 소리가 끝없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정의를 따르지 않았고,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대중에게 이끌려 다니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영혼이나, 자신의 인격, 혹은 자신의 모든 가치관조차도 남의 판단에 넘겨버렸습니다. 자기 삶을 상실했어요. 비록 총독의 지위에 있었고, 권력과 명예와 부를 다 갖추었어도, 그는 자기 인생을 자신이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남의 장단에 살다가 남의 장단에 죽은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권력의 남용이나 오용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빌라도는 더욱 두려워하면서 석방 노력을 기울였습니다.(12) 이때에 가야바 측은 최후 수단을 사용합니다.
  
두 번째 죄목, 가이사에 대한 반역 죄목입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12) 

만일 빌라도가 예수를 석방하면, 예수는 물론 빌라도까지 로마 황제에게 고발당할 수 있다는 협박입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 였는데, 그는 의심 많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로마에 사신을 보내어, 로마 황제를 모독한 죄인을 빌라도가 석방했다고 고발한다면, 의심 많은 황제는 빌라도를 소환할는지도 모릅니다. 

빌라도가 두려워 한 것은 예수 사건만이 아닙니다. 뇌물을 받은 것들, 무례함, 폭력적이고 제멋대로 행한 재판들, 심문도 않고 상습적으로 사람을 죽인 일들, 잔인한 행동들 등등. 이런 사실들까지 고발당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간교한 유대의 제사장들은 이러한 빌라도의 약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빌라도의 불충 죄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빌라도가 청백리였다면, 소신 있는 관리였다면, 어떤 협박을 하든지 예수를 석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런 위인이 못 됩니다. 그는 발목을 잡혔습니다. 드디어는 재판석에 앉아 정식 선고를 내릴 준비를 했습니다.
  
이 때에 빌라도가 한 말은 단 두 마디 뿐입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14)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15) 대제사장들은 간교하게 대답합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5) 

실로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런 대답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만을 영원한 왕으로 믿는 무리들입니다. 로마 황제가 새겨진 동전은 성전에 바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반 로마적인 민족입니다. 그런데 가이사 밖에는 우리의 왕이 없다고 감히 외쳤습니다. 거기에 무리들까지 합세해서 외칩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5)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사람들 앞에서 손을 씻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27:24) 유대인들은 감히 대답합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27:25)
  
마침내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 주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이때에 빌라도가 무슨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선고했는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내세운 정치적 반란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밝혀낸 진실

빌라도 자신은 천박한 권력자요, 의지가 박약한 지도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빌라도의 언행에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합니다. 대제사장들이나 율법사들이나 정통파 유대인들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 빌라도의 말에서 진리를 찾게 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 빌라도가 보여준 진리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예수님의 무죄성입니다. 그는 세 차례나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노라고 선언했습니다.(18:38, 19:4,6)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빌라도 재판으로 사형을 당하신 주님이신데, 빌라도 자신은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합니다.  
  
예수님의 무죄성! 이것은 이미 그의 탄생에서 부터 강조된 사항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악 된 본성과 하나님의 아들을 차단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생애 중에 단 한 번도 율법을 저촉한 사실이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에 대하여 겉으로는 물론 심정적으로도 완벽하게 지키고 이행하셨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반포한 이후로 그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분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아담 이래로 하나님의 요구대로 사신 분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바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게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53:7-9) 베드로는 말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예수를 심문했던 헤롯이 무죄를 증거했고, 빌라도의 아내가 무죄를 증거했고, 빌라도 자신이 가장 확실하게 무죄를 만천하에 선언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증거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8:46)
  
예수님의 무죄성은 인류 구원에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결코 남의 죄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흠이 있는 제물은 남의 흠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더러운 지우개로 칠판을 깨끗이 지울 수는 없습니다. 썩은 기둥으로 썩은 기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죽은 송장으로 생명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사형수가 남의 죄를 대신 지지는 못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남의 죄를 대신 질만큼 깨끗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로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지게 하셨습니다. 무죄한 예수님이 죄인처럼 심판 받고 죽으시고 무덤에 던져졌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빌라도는 이러한 예수님의 성결과 거룩을 자신의 입으로 확인해 주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출처를 물었습니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9) 그것은 심문이라기보다 진지한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했다고 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에 오히려 두려워하면서 그것이 사실인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대하여 침묵하셨습니다. 그 침묵은 외교관 적인 침묵입니다. 상대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고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일찍부터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그의 잉태를 천사장이 와서 알려줬습니다. 탄생을 천사들이 찬미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와서 예물을 바치고 경배했습니다. 들의 목자들이 천사들의 소리를 듣고 와서 경배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행하신 능력들은 신성의 표현입니다. 그의 명령에 바다와 풍랑이 듣고 복종하고, 질병이 불구가 고쳐졌습니다. 그의 명령에 죽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단순한 이적이 아닙니다. “신성(神性)의 표현”입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5:18)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10:33) 

빌라도는 예수님의 신성 문제에 관하여 일말의 죄도 성립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알고 행한 것이든 모르고 행한 것이든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왕권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시종 “왕”의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예수님의 왕권을 충분히 이해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예수님의 왕국을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의든 타의든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14)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15) 그는 십자가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그 명패는 히브리어 뿐만 아니라, 당시의 세계 공용어였던 라틴어 헬라어로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고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명패의 문구를 바꾸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란 말 앞에 “자칭”이란 말을 넣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거절했습니다. “나의 쓸 것을 썼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면류관”이란 말(Stevfano")은 흔히 운동 경기의 승리자에게 씌워주는 월계관이란 말입니다. 복음서의 기록자들이 “왕관”(διαδημα )이란 말 대신에 면류관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장소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장소입니다. 모든 사람을 정죄에서 풀어 주는 승리의 장소요,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는 승리의 장소요, 죽음을 이긴 승리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왕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승리한 승리의 왕입니다.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이러한 의미를 생각하면서 면류관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일찍이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1-33) 주님의 왕권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17:14)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19:16) 

바울은 그의 왕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하나님은 빌라도의 입으로 예수를 왕이라 부르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시는 왕이십니다. 영혼과 생각을 지배하시는 왕이시며, 육체와 건강을 지배하시는 왕이십니다. 우리의 의식주와 모든 활동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인류의 역사를 지배하시는 왕이십니다. 우리는 기쁨으로 그 분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진실 앞에 복종하라 

우리는 이 재판이 밝혀낸 진실에 굴복해야 합니다. 빌라도가 비록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 줬지만 그는 재판 내내 진실을 밝혔습니다.  
  
첫째로, 주님의 무죄하심입니다. 주님은 죄 없이 내 죄를 대신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속죄를 받으세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순결하십니다. 그런데도 내 죄를 대신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속죄의 피가 오늘 내 모든 죄를 씻었습니다. 내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세요. 그리고 주님의 속죄를 받으세요. 모든 죄를 고백하세요. 그리고 깨끗이 용서받으세요. 그래서 영혼과 육신이 깨끗하게 치유되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신성 앞에 경배하세요.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항상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세요. 주님은 내 모든 삶을 지켜보시며,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통촉하시고, 은밀한 계획을 다 아십니다.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기도하세요. 매일의 나의 삶이 주님을 향한 경배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주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전 우주의 왕이십니다. 영혼과 육체를 지배하는 유일의 왕이십니다. 내 생애에 치명적이고 전폭적인 영향을 미치는 유일하는 분입니다. 주님의 통치 앞에 무릎 꿇으세요. 항상 그 명령에 순종하면서, 그 다스림을 받으세요. 그것이 내가 지상에서나, 내세에서나 최고의 축복과 행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 우리가 따라야 될 진실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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