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내가 마시려는 잔 (마 20:20-23)

첨부 1


내가 마시려는 잔 (마 20:20-23)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저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More From the Primeval Forest)’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산 중에서 맹수에게 쫓기는 토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토인은 그가 어느 부족에 속하였는지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자기 부족임이 확인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구출하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지만 만약에 다른 부족으로 인식이 되면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철저한 너와 나의 구별이 부족의 한계에서 너무도 선명해지는 것이 아프리카 토인의 당연한 윤리라고 슈바이처는 지적 합니다. 너 없는 나, 나 없는 너. 이것은 외롭고 무기력합니다. 

슈바이처의 아프리카 관찰 중에서 생사의 기로에서 쫓기는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구하는 데까지 부족의 구별부터 한다는 것만으로도 미개한 민족이라는 낙인을 받아 마땅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도 아프리카의 미개한 토인과 같은 생각으로 지나왔던 길목은 없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을 아파하는 인간애의 애끓는 가슴 없이 대수롭지 않게 비극 앞을 지나쳐 버린 무감각한 발길이 우리의 길목에는 남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타인의 아픔보다 오히려 자신의 안일과 출세에 현혹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본문에 보니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예수를 찾아와 절하며 청합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될 때 두 아들을 좌우편에 앉혀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녀의 청이 잘못되었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메시야로 통치하러 나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좌우편에 앉으려고 하기보다 먼저 주께서 마시려는 잔을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출세하려고 하기보다 희생하려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즉 주께서 잔을 보이시며 마시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주의 잔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는 이기적인 자리에 그저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십자가를 지시려는 주님의 아픔에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출세만 구하는 모습은 혹시 아닙니까? 먼저 주께서 마시려는 잔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리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께서 마시려는 잔은 과연 어떤 잔입니까?  

첫째로 고난의 잔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썬다싱(Sadhu Sundarsingh)이 25살 나던 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일름(Ilom) 지역에 들어가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도중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서 갖은 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썬다싱은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기뻐하며 밤에는 날이 새도록 찬송을 불렀고, 낮에는 작은 창문을 통해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재판장이 그를 끌어내어 판자위에다 발과 손목을 묶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시장바닥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와 돌을 던지며 욕지거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승려들이 수 십마리의 거머리를 썬다싱의 몸에 쏟아 부었습니다. 거머리는 썬다싱의 피를 빨아 살을 파기 시작했고 그의 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진저리칠 정도로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썬다싱은 찬송과 복음을 전하여 군중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마시려는 잔은 고난의 잔입니다. 고난의 잔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극히 견디기 힘든 고통의 잔입니다. 

예수의 고난은 채찍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채찍(Whip)은 나무 손잡이에 길이가 다른 세 가닥 가죽 줄이 달려 있습니다. 각 줄에 두 개의 납 구슬과 한 개의 뼛조각이 달려 있습니다. 줄 끝에 달린 납 구슬은 피부를 멍들게 하고 뼛조각은 피부 조직을 파고들어 찢습니다. 가죽 끈은 길이가 달라 한 번 채찍질에도 여러 곳에 큰 고통이 가해집니다. 채찍질하는 목적은 죄인의 몸 상태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가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40번까지만 하도록 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수의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이미 죽을 만큼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온 몸이 채찍질로 피투성이가 된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러한 고난의 잔을 앞두신 예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잔을 피하고 싶어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했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고 성경은 전합니다. 고난의 잔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에 땀이 핏방울 같이 되었습니다. 고난의 잔을 앞두고 고뇌를 겪으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권하시는 잔은 고난의 잔입니다. 쉽게 따라 마실 수 있는 잔이 아닙니다. 마시고 싶지 않은 잔입니다. 죽을 만큼 고뇌하고 피 땀 흘릴 만큼 힘들게 받아야만 하는 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한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리로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희생의 잔

존 헤론(John Heron) 선교사는 알렌 선교사와 함께 한국 최초의 병원 제중원에서 의료선교 사역에 힘썼습니다. 당시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헤론은 최선을 다해서 전염병 퇴치에 헌신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고 위생 관념이 희박한 상황 속에서 이질은 급속도로 퍼져갔습니다. 헤론 선교사는 이질과 싸웠습니다. 그러다 자신도 이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내한한지 5년 만에 결국 그는 이질 때문에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조국보다도 한국을 사랑했고, 자신의 가족보다도 더욱 한국인을 사랑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묘비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 자신의 신앙고백을 적어놓았습니다. 믿음으로 선교하다가 주님을 위해 한국인들에게 자신을 주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마시라고 건네시는 잔은 희생의 잔입니다.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다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의 이름으로 남을 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희생의 잔을 마시라 요구하십니다. 희생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예수의 희생이 자발적이었고, 스데반도 스스로 희생당하였고, 열 두 제자들 모두 스스로 기꺼이 희생당하였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통해서 세상이 살림 받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때로 명성이나, 편안한 삶을 포기하기를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세상을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희생이 나의 삶 가운데 메아리치고 있습니까? 희생의 보혈이 나의 몸속에 흐르고 있습니까? 주의 희생만큼 아름답고 귀한 것은 없습니다. 부디 주가 마시려 하셨던 그 희생의 잔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용서의 잔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직전 다른 화가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가 용서를 구하기보다 분노하며 헤어졌습니다. 다빈치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화가 나서 복수를 계획하였습니다. 완전한 계책을 꾸몄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팔았던 배신자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 화가의 얼굴로 그렸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다빈치는 미친 사람처럼 신속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뛰어난 기억력은 원수의 얼굴의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냈고 그것을 유다의 얼굴로 그렸습니다. 

잠시 후 다빈치가 예수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는 데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한 영감이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좌절감에 사로잡혀 붓을 던졌습니다. 곧이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다른 화가의 얼굴을 유다의 얼굴로 그린 자신의 복수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갈등을 하던 다빈치가 진심으로 회개를 한 후 미워하던 친구의 얼굴을 화폭에서 지우고 나자 다시 영감이 떠올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을 완성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용서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마음에, 삶을 통해 그릴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용서하셨습니까? 용서의 잔을 마실 수 있습니까?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음으로 은혜의 통로가 막히고 기도의 문, 전도의 문이 막힌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 발견되기 위해서 용서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남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까지 용서하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용서의 잔을 마시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는 원수들을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용서할 때 상처와 수치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부디 용서의 잔을 마시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용서의 잔을 마실 때 비로소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흑인 노예와 백인이 기차 안에서 싸움을 하였습니다. 성질이 난폭한 흑인 노예에게 백인이 칼을 꺼내 가슴을 찌르려는 순간에 옆에 앉아 있던 백인 목사가 손을 뻗어 칼을 막았습니다. 흑인의 가슴에 칼이 꽂히지 않았지만 백인 목사의 손에 피가 흐르고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자 흑인 노예는 자기 대신 상처를 입고 자신을 살려준 백인 목사의 은혜가 고마워 평생 충성할 것을 다짐하면서 데려가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후 흑인 노예는 백인 목사와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흑인 노예는 거칠고 난폭한 성격을 이기지 못해 좀처럼 옛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툭하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고집을 부리며 성실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은혜도 잊어버리고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럴 때 백인 목사는 조용히 그에게 상처난 손을 보여주었습니다. 흑인 노예는 자신을 위해 다친 칼자국을 볼 때마다 머리를 숙이고 순종했습니다. 그 흑인 노예는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마시려는 잔은 우리가 마셔야 했던 잔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던 것은 바로 나였습니다. 나는 주의 은혜로 사는 자임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 대신 쓴 잔을 마신 주의 은혜를 기억하고 이제 주님이 마시려는 잔을 우리가 마셔야 합니다. 잔을 피하지 않고 마심으로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부디 고난의 잔을 마시기 바랍니다. 희생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의 잔을 마심으로 주의 뒤를 따라가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