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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아니지요 (슥 11:12-14, 마 26:20-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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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니지요 (슥 11:12-14, 마 26:20-25,30)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가고 이제는 십자가를 질 때가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과정을 말하려면 반드시 12제자의 역할을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말하다 보면 반드시 거론되는 대상이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 고난의 주역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중심에 서 있던 인물입니다. 유다는 장점이 많았던 제자였습니다. 

야망의 사람

유다는 야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제자들 대부분은 갈릴리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주로 어부 형제들입니다. 세리출신도 있습니다. 대부분 예수께로부터 직접 부름 받아 제자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유독 가룟 유다는 남쪽 가룟 지방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다를 가룟 유다라고 부릅니다. 유다는 북쪽에서 활동하시던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스스로 자진해서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해서 찾아와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보면 유다는 그 시대의 엘리트였습니다. 개척 정신이 있는 젊은이였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다운 청년입니다. 용기도 있고 열정도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인생에 대한 욕구도 있습니다. 젊은이는 이런 면이 있어야 합니다. 도전정신도 있고 야망도 있고 비전도 있고 기대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 회사에서 사원을 채용할 때 이런 점을 본다고 합니다. 젊은이가 얼마나 개척 능력이 있는가, 얼마나 오늘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얼마나 열정과 도전 정신과 개척 정신이 있는가를 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개척능력이 있는 청년입니다. 가능성도 야망도 도전 정신도 있는 젊은이입니다. 

충실한 제자

유다는 예수님 제자가 된 후 3년 훈련 기간 동안 모범적인 제자였습니다. 재정 담당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다른 제자들의 실수 기록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매사 덤벙댔고 실수를 연발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자주 책망을 들었습니다. 야고보 형제는 예수께 이다음 주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하여 제자들로부터 핀잔을 들었습니다. 빌립은 예수께로부터 먹을 것을 준비하라는 분부를 받았을 때 계산부터 해서 3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청구서를 내 놓았을 때 책망을 들었습니다. 

도마는 의심이 많아 예수님께로부터 “왜 믿음이 없느냐”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밖에 바돌로매, 시몬, 다대오 등 무명의 제자들은 무슨 일을 했는지 기록조차도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유다는 실수한 기록이 없습니다. 성경은 유다는 재정을 맡았던 제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자기 일에 충실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유다는 여기까지는 아주 충직한 제자였습니다. 

시험받음

그러던 유다가 마침내 시험받기 시작합니다. 묘하게도 유다가 시험받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이 잘 되면서부터 입니다. 잘됨, 이때가 시험 들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 마다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병자들을 고칩니다. 들것에 실려 온 사람이 회복되어 걸어갔습니다. 나병화자가 깨끗해져서 돌아갔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왔고 박수가 터졌고 환호와 칭송이 주어졌습니다. 제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야고보 형제는 이다음에 좌우에 앉게 해 주세요 하고 청탁까지 하였습니다. 유다는 때는 왔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뭔가 기대대로 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유다도 말은 안했지만 야곱 형제처럼 내심 이 다음 주님이 큰 자리에 올라가면 나는 이 자리쯤 가게 될 것이라고 상상도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런 계산을 합니다. 사람이 시험 들고 바람 들게 되는 것이 실패했을 때 보다 일이 너무 잘될 때가 많습니다. 사업이 너무 잘 될 때. 일이 너무 잘 풀릴 때, 그때가 시험 들기 더 쉬운 때입니다. 

유다가 생각해 보니 지금 상황이 기대했던 것 보다 더 일찍 왔습니다. 성공이 눈앞에 바짝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머릿속으로 성공을 열심히 그리기 시작합니다. 눈앞에 머지않아 큰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주님의 좌우에 앉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야고보 형제가 견제되기 시작하고 라이벌처럼 생각도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환상을 갖게 되고 꿈을 갖게 되고 마음에 바람이 들게 됩니다. 이 지점이 위험할 때입니다. 시험들 때입니다. 유다가 한창 기대에 부풀고 열심히 마음에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자꾸만 죽겠다고 말하고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죽으면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고 머리가 되지 말고 꼬리가 되라고 말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합니다. 자꾸만 알다가도 모를 말만 합니다. 기대는 우려를 낳고 우려는 불안을 낳았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큰 야망을 갖지 않으면 시험이 잘 안 옵니다. 그런데 야망이 크면 클수록 시험도 커집니다. 유다가 순수했을 때는 시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성공이 너무 빠르게 왔습니다. 그러니까 기대도 커지고 야망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배반 

기대가 커지면 실망도 커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기대가 무너지게 되면 배반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성공의 찬스이고 기회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가만히 못이기는 체 하고 따라만 가면 자연스럽게 왕이 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알다가도 모를 말만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죽으면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말합니다. 제자들의 의도와 너무 동떨어진 발언을 자꾸만 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듣기에 실망감이 증폭되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에게서 배반자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그 배반의 과정이 자세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1주일 전입니다. 6절을 보면 베다니 시몬의 집에 있을 때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향유는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그때 유다가 분개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왜 그 비싼 것을 허비하느냐 가난한 자에게 주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이것은 예전의 유다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께 불만이 많은 배반의 모습입니다. 

또 14절을 보면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가 내가 예수를 팔겠으니 얼마 주려느냐고 흥정합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은 30세겔을 줍니다. 성경은 “그날부터 배반할 기회를 찾았다”고 말합니다. 또 22절을 보면 마지막 만찬 준비를 합니다. 그 자리에 유다가 함께 참여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저마나 나는 아니지요” 하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떡 바구니를 돌리시다가 유다에게 주시면서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그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유다가 말하기를 “나는 아니지요”하고 되묻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배반자가 되면 사람이 이렇게 딴 사람으로 변합니다. 물불 가리지 않습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게 됩니다. 눈에 무엇이 씌우게 됩니다. 천연스럽게 거짓말을 합니다. 사탄으로부터 이렇게 이용당합니다. 그러면 유다의 배반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단호하게 “돈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다가 돈을 좋아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부을 때 “왜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고 허비하느냐”고 불평을 한 것을 요한이 표현하기를 “유다가 가난한 자를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가려 함이라(요12:6)”고 말합니다.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받은 돈이 은 30 세겔입니다. 은 30이 도대체 얼마의 가치입니까. 출애굽기 21장 32절을 보면 당시 황소가 노예를 받아 죽였을 때 주는 배상금이 은 30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돈 몇 백만 원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설마 돈 몇 백만 원 때문에 스승을 팔았을까 하고 생각될 것입니다. 혹자는 너무 비약해서 유다가 예수의 메시아 됨을 흠집 내기 위함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약입니다. 유다는 그런 의식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돈 때문이었다고 단언합니다(요12:6). 그런데 막상 보니 돈 액수가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액수가 너무 적어 배반의 뜻은 없었다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도 모르는 말씀입니다. 뇌물을 먹는 사람은 꼭 액수를 많이 먹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구속되는 정치인들이나 공직자들을 보면 몇 천만 원 몇 백만 원 받고 구속됩니다. 유다보다 큰돈입니까. 배반자는 크게 먹고 배반하는 것이 아니고 적게 먹고 배반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엄청 큽니다. 그리고 평생 쌓은 탑을 한순간에 무너트립니다. 

이 뇌물 받는 것은 습관입니다. 마음에 별로 크게 생각을 안 하고 받습니다. 이 별것 아니라는 마음이 온 땅에 퍼져있습니다. 오늘 관공서는 돈을 안주면 일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관성이고 습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걸핏하면 관행이었다고 말합니다. 아주 정신이 병들어서 죄의식도 없습니다. 이런 관행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은 공직자들이 가끔 잡혀 들어가는 것을 보는데 크게 먹고 이력 있는 사람들은 크게 먹고 잡히지도 않습니다. 누가 잡히는가 하면 처음 먹었거나 조금 먹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입니다. 어쩌다 먹은 것이 걸린 것입니다. 뇌물 먹는데 이골 난 사람들은 잡히지도 않습니다. 유다가 그 꼴입니다. 그리고도 배반자 이름이 나오면 제일 먼저 유다 이름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시대 더 많이 받아먹은 빌라도, 헤롯, 제사장들은 아무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게이트라는 사건이 터져 조사해 보면 피라미들만 걸려듭니다. 몸통들은 다 빠집니다. 여기 유다의 배반 사건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배신의 몸통

그러면 여기 배반의 몸통은 누구입니까. 여기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고난당하시는데 가룟 유다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아주 미미합니다. 유다가 병졸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가서 예수를 체포하게 합니다. 그 자리에서 유다가 한일이 무엇입니까. 예수께 다가가 입 맞추는 일뿐입니다. 유다가 입맞춤으로 사람들이 극비에 해당하는 예수의 신분을 알 수 있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유다가 입 맞추지 않았어도 군인들은 누가 예수인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유다가 단돈 은 30을 받았는데 왜 이렇게 크게 다루고 대서특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배신의 몸통을 고발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유다가 아니고 그 뒤에 몇 명의 더 큰 몸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일 큰 몸통은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예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예수를 배반하는데 제일가는 몸통이었습니다. 둘째는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예루살렘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가 총독으로 있는 예루살렘이 시끄러우면 로마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고 그러면 진급하는데 지장이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 하나만 제거하면 예루살렘이 조용해지리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고로 예수 배반에 빌라도가 몸통 노릇을 한 것입니다. 

셋째 몸통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야 말로 예수 배반의 대열에서 몸통노릇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것도 면전에서 맹세하며 저주하면서 배반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이 웃으셨습니다. 웃음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기뻐서 웃고 재미있어서 웃고 기가 막혀서도 웃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웃으신 예수님의 웃음은 기가 막혀서 웃으신 웃음입니다. 이 베드로의 배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고 또 나머지 제자들에게 흩어지게 만드는 충격도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후 베드로는 대 사도로 계속 칭송을 받았는데 왜 유다만 배반자가 되었습니까.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는 실수한 후에 계속해서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실수한 후에 새로 일어나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수난도 받았고 핍박을 받았고 마침내 순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한때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였지만 주님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용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배반 직후 교회공동체를 떠나버렸고 곧 자살해 죽어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베드로의 배반보다 유다의 배반과 자살이 더 엄청나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영 죽을 놈이 되어버렸고 배반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의 결정적인 용서받을 수 없는 배반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본문 25절에 나오는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만찬 장소에서 예수님이 “너희중 하나가 나를 배반하고 팔리라”고 말씀할 때 다른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지만 유다는 입장이 다릅니다. 유다는 지금 예수를 팔 계획 단계가 이미 지났고 이미 돈까지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실 때 유다는 무릎을 꿇어야 하고 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유다는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말합니다. 이 유다는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유다는 용서가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제자로서 다시 재기하기가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멸망한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죽지 말고 용서를 받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죽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나는 아니지요.” 이러고 유다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유다는 영혼이 타락한 것만이 아니고 영혼이 아예 망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배반자

그러면 본문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지입니다. 무지는 무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배반자로 나타나게 합니다. 유다는 예수에 대해서 깊은 의미를 몰랐습니다. 야망을 이루는 대상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버리고 포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의미를 모르면 쉽게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또 값을 몰랐습니다. 단돈 은 30에 스승을 팔아버립니다. 값을 알았다면 그렇게 팔아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신앙생활의 길에서 이 값을 모르니까 사람들이 너무 쉽게 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 생활하다가 기분만 나빠도 중단을 선언합니다. 포기합니다. 꼴 보기 싫어서 그만두고 더워서 포기하고 추워서 포기합니다. 

스가랴는 기원전 520년 전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이미 예언을 하였습니다. 유다가 그 예언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길의 의미를 알고 실수는 하였지만 후에 알고 돌아와 끝까지 핍박을 감수하면서 교회공동체를 위해서 마침내 순교하여 영광의 지위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비겁한 인류의 배신행위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 배신 속에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배신 속에서 다시 일어나 부활하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마침내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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