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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고난과 가까우면 보상과 가깝다 (벧전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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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가까우면 보상과 가깝다 (벧전 2:18-25)


고난 주일입니다.
먼저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면서 말씀을 열겠습니다.

독일이 낳은 유명한 음악가가 있습니다. 하이든입니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어느 날 많은 예술가들이 모였습니다. 주제는 고난이 닥칠 때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 때 하이든이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작은 골방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고난이 올 때마다, 마음이 외로울 때마다 골방에 들어 갑니다. 골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주님이 주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나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 옵니다.”

고난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주일입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주일 다음에 고난 주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고난 주일 다음에 부활주일이 있습니다. 일없는 상없고, 상없는 일없습니다. 땀없는 면류관 없고, 면류관 없는 땀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난당하기를 싫어합니다.
고난과 가까우면 보상과 가깝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십니다. 특별히 고난의 모범이십니다.
예수님만 닮는다면 무슨 일에나 실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더 나아가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만을 깊이 생각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히 무슨 일에든지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특별히 고난에 대하여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신앙생활에 모범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먹고 자고 같이 지내면서 예수님의 고난의 성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0일 정도 같이 성지 순례 여행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을 같이 붙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두를 본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잘 기록하여 주고 있습니다.

1. 애매히 고난당하여도 참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애매히 당하는 고난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하는 애매한 고난입니다. 사실 억울하여 정말 못 참을 때 참을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참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공연히 비난받고 이유없이 애매한 소리를 들을 때 참을 수 있는 것이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애매히>라는 원어는 <아디코스>인데 이는 부당하게 라는 말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면 참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19-20)

<애매히> 고난받는 것도 하나님을 생각하면 참을 수 있다는 것이 베드로의 확실한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참으시는 분인지 성경은 누누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도 120년을 참으셨습니다. 지금도 끝까지 참으시는 분이시라고 베드로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사람들은 자기 경험 이상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면서 애매히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종종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참으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참으니까 그 결과가 참으로 좋았음을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베드로 마음속에는 겟세마네 동산의 추억이 자리잡고 있었는 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밤에 잡히셨습니다. 온 무리들이 예수님을 몽둥이를 들고 잡으러 왔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칼로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고쳐 주셨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당하여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아름답다고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애매히 고난을 당하여도 참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고난받으신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고난의 본을 보여주신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고난의 완전 본보기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

본이라는 원어는 휘포그람모스입니다. 이 말은 붓글씨를 배우는 이들이 모두 한결같이 보고 쓰는 글씨 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학생들은 이 글씨와 똑같이 써야 합니다. 

나는 월남 전에 참가하였었습니다.
월남에 도착하자 말자 훈련이 있었습니다. 실전의 훈련이었습니다. 이 때 베트콩 시체 한 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두 편으로 나누었습니다. 한 편은 이 쪽에 한 편은 저 쪽에 두고 그 시체를 운반하는 훈련이었습니다. 먼저 조교가 시범을 보입니다. 그처럼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 조교처럼 달려야 합니다. 조교처럼 던져야 합니다. 아니면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본대로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군대에서는 시범이라고 말합니다. 조교가 시범을 보여 준대로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하여 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으시게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넷째날 계절 모에드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레위기 23장에서 모에드를 공포하게 하셨습니다. 유월절에 예수님이 죽게 예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양은 예수님입니다(고전 5;7)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은 초막절에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갈릴리 주변에서 일하게 계셨습니다. 초막절에는 모든 백성들이 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 절기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요 7;1-2)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요 7;8)

그리고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요 7;14)

예수님은 갈릴리에 머믈러 계시면서 편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받으시러 올라가셨습니다. 
올라가기 싫지만 하나님의 뜻이 올라가는 것이니 올라가셨습니다. 고난당하실 것을 아시고 올라가셨습니다. 자초한 고난입니다.
내 뜻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고난이었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보범입니다. 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곳이라면 고난을 당하더라도 가야 합니다. 바울처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야 합니다.

지난 주간 150만명이 보는 넷향기에 <장수는 전쟁터에서 죽어야 합니다>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넷향기 가족 여러분 그 동안 편안하셨나요? 갈보리 교회 강 문호 목사입니다. 

오늘은 장수는 전쟁터에서 죽는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장수는 전쟁터에서 죽어야 영광입니다. 소방 수는 불 끄다가 죽으면 영광입니다. 기자는 취재하다가 죽으면 최고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후지산이 폭발할 때 기자 한 명이 근접 촬영을 시도하다가 용암이 흐르는 것을 피하지 못 하여 용암에 덮침을 당하며 죽었습니다. 그의 품안에는 최후까지 몰려오는 용암을 생생하게 찍은 사진기가 안겨있었습니다. 
그 카메라를 꼭 안고 죽었기에 그 안에 생생한 사진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도 촬영할 수 없는 사진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기자는 현장에서 죽으면 길이길이 남는 죽음입니다.

고상돈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히말라야 산을 처음 등반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등반하다가 그 산에서 죽었습니다. 제주도가 고향입니다. 한라산 1100고지 위에 무덤이 있습니다. 산 사람이기에 산에서 죽어 산에 묻혔습니다. 장수는 전쟁터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한 분이 댓글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어디에서 죽어야 하나요?”
나는 쇠뭉치로 얻어 맞은 것처럼 띵하였습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장수는 전쟁터에서 죽어야 하는 데 나는 어디에서 죽어야 하나?”
어디에서 죽을이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조용히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나는 어디에서 죽어야 하나요?” 주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죽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무슨 일을 하였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일하다 죽어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복음위하여 일하다 쓰러지고 싶습니다.
바울은 지금 받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난과 가까우면 보상이 가깝습니다.

파도가 무섭게 몰아 치던 밤이었습니다.
주민들은 초조한 심정으로 바닷가에 모였습니다. 마을 배 한 척이 파선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조대가 구조하러 나갔습니다. 한 참만에 돌아 온 구조대장이 말했습니다
“청년 한 명을 미처 구조하지 못 하고 돌아 왔습니다. 누군가가 나와 함께 바다로 나가야 합니다.”
그 때 한 소년이 같이 나가 구조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소매를 꼭 잡으면서 만류하였습니다.
“얘야! 가지 말아라. 네 큰 형도 몇 일전에 실종되었는 데 너마저 그렇게 되면 난 어떻게 하니?”

그러나 그 소년은 말했습니다.
“지금 누군가가 희생이 필요해요.”
그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몇 시간 후에 그 소년은 실종된 청년을 구조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머니! 그 실종되었다는 이가 바로 우리 둘째 형이었어요.”
사랑하면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를 위하여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면 가족을 위하여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면 나라를 위하여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욕을 받으셔도 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욕하는 자들을 향하여 같이 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였습니다.로마 병정들은 예수님을 못박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심지어 침을 뱉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리고 도리어 기도하여 주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분명하게 목격한 베드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23)
이것이 성숙한 자세입니다.

방울뱀은 몹시 화가 나면 제 몸을 물어 제 몸에 상처를 주는 동물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가 나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것같지만 사실은 자기 몸에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화병>은 모든 병의 화근이 됩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이해심이 적은 사람입니다. 경험이 많고 깊은 사람일수록 화를 적게 냅니다.

danger(위험)에서 d를 빼면 anger(화)가 됩니다. 화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분노가 있는 곳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욕을 한다고 고 할 지라도 화를 내지 말고 조용히 결과를 기다려야 합니다. 욕을 받을 때 같이 욕하고 같이 화내면 결국은 자기 손해입니다.
욕을 받아도 욕하지 않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이것에 예수님의 고난의 특징입니다.

인도 선교사 한 분 이야기입니다. 자녀의 눈이 하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눈 하나를 잃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선교사가 대답하였습니다.
“인도에서 선교할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선교사 자녀를 붙잡아 나무에 매놓고 왜 피부색이 다르냐, 눈색갈이 왜 우리와 다르냐 하면서 눈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 선교사는 눈물을 흘리며 인도를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저런 사람들을 위하여 살 필요가 없다. 저런 사람들의 생명을 위하여 일하기가 싫다.” 
그리고 가족이 인도를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짐을 쌌습니다. 그 때 눈 하나를 잃은 자녀가 말했습니다.
“아빠! 가지 말아요. 나는 커서 아빠처럼 선교사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어요.”

선교사는 그 아들을 붙잡고 싫컷 울고 나서 짐을 다시 풀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이런 고난이었습니다. 욕을 받아도 욕하지 않았습니다. 눈을 빼도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아도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때까지 묵묵히 고난을 당하셨던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모델입니다. 고난과 가까우면 보상이 가깝습니다.

4.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위협한다는 말은 원어로 아페일레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경고하다, 애매히 고난받을 때 “너 그러면 나중에 재미없어!” “하나님이 그냥 놓아 두지 않을 것이다” “악인의 종말은 하나님이 치신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23)
구약에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는 법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갱신하셨습니다. 더욱 성숙한 단계로 발전시키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최소한의 분풀이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위대한 점입니다.

우리는 밤하늘에 북두칠성을 볼 때가 있습니다.
서울에서 살면서 하늘에 무감각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시골에 내려가서 밤하늘을 바라보면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 북두칠성은 확실히 볼 수 있는 별입니다. 꼭 국 주걱같이 보입니다. 북두칠성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이야기입니다. 가뭄이 극심하였습니다. 풀들이 다 타버리고 나무가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동물들도 목말라 죽어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병중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딸은 바가지를 들고 어머니에게 드릴 물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워낙 가뭄이 심하여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쳐서 쓰러졌습니다. 깨어 보니 바가지에 물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물을 마시려다가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일어나서 급히 가려다가 앞에 앉아 있던 개에게 걸려 넘어졌습니다. 이상하게도 바가지 물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자기 발에 차여서 아빠하는 개에게 바가지 물 한 줌을 떠서 마시게 하였습니다. 좋아하는 개를 보며 바가지를 잡는 순간 바가지가 은 바가지로 바뀌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바가지 물을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받지 않으면서 말했습니다.
“딸아! 나는 이왕 죽을 몸이니 안 마시겠다. 살아있는 너나 마셔라.”
그리고 은 바가지를 딸에 주는 순간에 금 바가지로 바뀌었습니다. 그 순간 갈증을 견디다 못 해 쓰러지듯이 들어 온 노인이 집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물을 요구하였습니다. 딸이 그 노인에게 바가지를 내미는 순간 갑자기 바가지 속에서 다이아몬드 7개가 튀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맑은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모두 흡족하게 물을 마셨습니다. 두고 두고 흘렀습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7개가 하늘로 올라가 하늘을 수놓으면서 북두칠성 7별이 되었습니다. 

고난을 참고 고난을 이기면 반드시 상급이 있습니다. 보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받으실 때 고난을 주는 사람들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린 양같이 받으셨습니다. 고난받을 때의 모델을 보여 주셨습니다. 

5. 공의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는 모습을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23-25)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실 때에 공의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부탁한다는 원어는 파레디두인 데 이는 위탁하다, 넘겨주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기가 심판하고 자기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은 고통만 당하고 판단과 결과는 모두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줄 믿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참 믿음이요 참 성숙입니다.

나는 우리 감리교 강 병훈 목사님의 간증을 기억합니다.
그는 세례를 일생에 두 번 받았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이 천석 목사님에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번은 교회에서 어떤 권사가 장로 안 시켜 준다고 물을 한 통 가지고 와서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때 강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시원해?”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다르시군요.” 

그 후 그 권사님은 착실한 교인이 되어 교회를 잘 섬겼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을 때 공의의 하나님께 맡기고 참을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조용히 살면 모든 것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주시고 해결시켜 주십니다. 시간은 제일 좋은 재판관입니다. 더 좋은 재판관이 있으니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가 고난당하였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애매히 고난당할 때 참는 것이 참 참음입니다.
2.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신 본이 되셨음을 알면 참을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욕을 받으셔도 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4.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5. 공의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거드리라는 분이 한 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고난 받는 것을 무서워 말라. 죄를 짓는 것을 무서워 하라. 만일 당신이 이 둘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가장 작은 죄보다도 가장 큰 고난을 선택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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