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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하나님 (요일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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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 (요일 4:7-12)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시든지 사랑으로 행하십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에 대한 징벌을 내리시는 중에서도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 대신에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고,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이 죄악 세상을 속히 심판하지 않고 오래 참아주시는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사랑으로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은 해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에게 다 같이 비치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 비를 똑같이 내려 주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인생들이 고생하며 근심하면서 사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지 아니하신다면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본문에 이르기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은 곧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사랑의 근원이 되시고 출처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쓴 것인데, 헬라어에는 네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육친의 사랑인 스톨게, 친구간의 사랑인 필리아, 이성간의 사랑인 에로스,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가 그것입니다. 아가페를 제외한 세 종류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제 자식이고, 친구이고, 연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인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 아가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원수를 사랑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가페입니다. 

골로새서 1장 21-22절에 이르기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원수되었던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한 것을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물 많은 우리에게 이 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사랑의 동기로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합니다. 성도님들의 삶이 형통할 때뿐 아니라, 역경에 처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릇된 길로 행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라도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6-7)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고 아들처럼 대우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무수히 많은 사람 가운데서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선민의 조상으로 삼으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아무런 결함이 없는 완전한 사람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을 읽어 보면 그 역시 인간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그 땅에 큰 기근이 들자 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내 사라가 너무나 아리따운지라 혹시라도 애굽인들이 사라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애굽인들에게 사라를 아내라 하지 않고 누이라고 말했다가 애굽 왕에게 사라를 빼앗길 뻔 했습니다. 이 같은 아브라함의 태도는 비굴하고 정직하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아브라함이 신앙적으로 결백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유사들 앞에서 이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4,15)

여기서, 여호수아는 그들의 조상 역시 우상을 숭배했었다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유브라데스 강 저편에 살았던 조상이라면 아브라함과 그의 부친 데라를 말함인데,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숭배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이 우상 숭배자들 가운데서 선택 받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신명기 10장 15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역시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7절에서 이르기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저와 성도님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주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어쩌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이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말씀하기를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고 하였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실에 대하여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피상적이 아니고 실질적이며 실천적인 사랑입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법인 율법에 의하면 우리 인생들은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죄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인들은 영원한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만 죽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지옥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들이 처해있는 운명은 실로 절망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셔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종교들은 나름대로 인생의 비극적인 실상을 파악하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모든 죄는 하나님께 범한 것이든, 사람들에게 범한 것이든 결국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므로 죄의 청산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도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방법에 의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고, 생명은 생명으로만 속할 수 있으며,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하심도 없습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깨달음, 수양 따위는 죄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하면 죄인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공의의 심판 앞에서는 어디에고 하소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을 당할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삼 일 만에 무덤에서 살리심으로 죄인들의 구원을 완수하셨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그리하여 이제 죄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믿는 자만 구원을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는 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이 때 임금이 베푼 잔치에 참석해서 대접을 받은 것은 순전히 임금의 호의이지, 그들이 임금의 초대에 응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이치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우리는 그저 믿음으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 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아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할 바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일전에 조총련 간부였던 사람이 50년 만에 고향을 방문해서 105세 난 노모를 상봉하는 장면을 티비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십대에 집을 떠난 아들이 칠순이 넘어 돌아와서 보니 옛날의 곱던 어머니의 모습은 다 사라지고 여의고 쪼그라들고 앉아 있기조차 힘든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자 상봉의 광경은 여느 이산가족 상봉보다도 감동적이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칠순의 아들은 어머니를 껴안고 “어머니, 제가 왔어요”라고 통곡했습니다. 50년의 세월도, 공산주의, 민주주의의 이념의 차이도 어머니와 아들의 혈육의 정 앞에서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와서 아들이 어머니에게, 또는 어머니가 아들에게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늙으신 어머니에게 재산이 있습니까, 명예가 있습니까? 그런가하면 아들은 또 무엇으로 어머니에게 진 빚을 갚을 것입니까?

두 사람이 바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는 어머니, 사랑하는 아들을 만난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사랑을 확인하는 것으로 지난 50년의 아픔을 위로 받았을 것입니다. 이들의 상봉이 애처롭고 감동적인 이유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너무 늦게 만났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하나님과 성도들이 바로 사랑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달라고 하실까요? 온 우주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무엇이 부족하셔서 그런 것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솔로몬처럼 일천번제를 드리기를 원하실까요? 들과 산에 거하는 모든 짐승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신명기 10장 12절로 13절에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에도 사랑의 동기에서 섬겨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바칠 때에도 의무감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서 바쳐야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헌신과 봉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동기로 해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을 어느 정도 사랑하는지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신명기 6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줍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되고, 부모나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도 안 됩니다. 물론, 직장이나 사업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하셨는가 하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신 대로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기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처럼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상이 무엇입니까? 숭배할 목적으로 나무나 돌로 무슨 형상을 만들어 놓은 것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족이 우상이 될 수도 있고, 재물이 우상이 될 수도 있고, 그 외에도 우상이 될 만한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것이 되므로 절대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우상 숭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따릅니다.

다윗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라고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를 사랑하셔서 한없는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풍성한 복을 주십니다. 신명기 5장 10절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셨고,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예배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성도들의 믿음 성장은 예배에 참석하는 빈도에 정비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고백은 거짓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을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다음 순서로 형제를 사랑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 사람의 고백은 신용할 수 없습니다.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손등과 손바닥과 같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가지고 형제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마음을 열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게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거든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섬기면 영육 간에 복을 주시지만, 복 받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차적인 목적이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우리에게 배풀어주신 사랑에 감동해서 온전한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며, 무슨 일을 만나든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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