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잘못된 재판 (마 27:11-26)

첨부 1


잘못된 재판 (마 27:11-26)


일전에 동아일보가 오늘 본문과 관련된 흥미로운 칼럼을 기사화한 일이 있습니다.(2000.12.19) 바로 오늘날의 형법 체계로 본문의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평가한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서기 33년 12월 어느 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예수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먼저 ‘피고인 예수’에 대한 인정신문이 진행됐다.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갈릴리 사람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난 33세의 젊은이. 그는 가룟 유다의 고발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체포영장 제시도, 진술거부권 등을 알려주는 ‘미란다 원칙’ 고지도 없었다. 
공소장에 기재된 혐의는 성전모독과 조세(租稅)거부, 메시아 참칭(僭稱) 등. 검찰석에는 70여명의 유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줄지어 앉았다. 변호인석은 비어 있었다. 국선 변호인도 선임되지 않은 것. 

빌라도 재판장은 고민에 빠졌다. 예수의 범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증인 몇 사람이 법정에 섰다. 이들은 “예수가 가이사(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도록 했다”고 거짓 증언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예수의 혐의는 종교 국가가 아닌 로마에서는 중죄(重罪)에 해당하지 않았다. 빌라도는 “채찍 몇 대의 형을 선고하겠다.”며 일어섰다. 제사장들이 발끈하며 공소장 변경을 요구했다. 왕의 이름을 사칭한 혐의를 추가하겠다는 것이었다. 로마에서 ‘왕명(王名) 사칭’은 ‘국가원수 모욕’으로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중죄.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 된 것이다. 

재판장이 선고를 망설이자 유대 방청객들이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예수를 사형에 처하라”며 아우성쳤다. 이성을 잃은 방청객들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던 빌라도는 결국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결국 이 칼럼은 예수의 재판은 잘못된 재판이었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재판인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첫째 억지 혐의 적용, 둘째 법적 절차를 무시한 재판 진행, 그리고 셋째는‘마녀 사냥’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휘둘린 재판부의 무리한 판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 본문의 예수님에 대한 재판은 잘못됐습니다. 오늘의 잣대로 보면 분명히 잘못됐습니다. 그리고 역사 불변의 재판 원리로 볼 때도 분명히 잘못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이 재판이 잘못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무지한 재판

본문 11절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총독 빌라도가 재판관이 되어 예수님을 죄인으로 세워 심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총독이니 최고의 재판관으로서 사형에 관한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 산헤드린 공회를 통해 공식적 절차를 거쳐 고소된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빌라도가 재판관이고, 예수님이 죄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장면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심판주가 아니십니까? 장차 우리 모두가 이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할 처지입니다. 당연히 빌라도도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합니다. 그래서 재판관은 예수님이시고, 빌라도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적반하장(賊反荷杖)식의 사건이 벌어졌을까요? 한 마디로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하니까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재판대에 세웠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하니까 죄인인 자신이 재판관 자리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은 감히 하나님을 재판대에 세웁니다. 마치 자기가 재판관이나 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듭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빌라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메시야이신 예수님, 장차 심판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분과 마주하며 심문하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빌라도에게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 18:35 이하에 본 재판도중 있었던 빌라도와 예수님 간의 대화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분명히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재판은 일반 재판과는 다른 재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재판은 영적 사건에 대한 재판이요 진리에 관한 재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빌라도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닫혀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재판의 본질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세워 재판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들을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상황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도 재판관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 판단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부당하다고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엘리 위젤이라는 사람이 쓴 희곡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재판]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현대판 욥기’라 불리는 희곡입니다.

아우슈비츠와 같은 죽음의 수용소에 유대인들이 포로로 수용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파리 목숨처럼 떼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어 봐도 하나님은 꿈쩍도 하지 않으시고 깊은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다.
수용소 안에서 유대학자 세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며칠 밤 재판을 벌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인간들의 재판정에 피고로 세운 것입니다. 인간들의 증언을 듣습니다. 증거를 취합합니다. 재판을 마치며 판결을 내립니다. 만장일치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피조물들과 인류에 대한 범죄들에 대해 방조한 책임이 있다는 뜻에서 ‘유죄’를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다급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했는데 응답이 더딜 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때로는 자기가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어갈 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마치 자기가 재판관인 양 하나님께서 이러실 수가 있느냐고 원망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뜻 가운데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함부로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 성급하게 단정해서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2. 불의한 재판

오늘 재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재판 절차가 정상적으로 잘 진행되었습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시행되던 재판 절차를 따라 공평한 입장에서 심문하려고 했습니다. 
먼저 빌라도는 고소자들로부터 사건의 경위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피고에게 질문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피고에게 그 고소건에 대해 변론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빌라도는 피고인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2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는 예수님께서 악한 일을 하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힐 정도의 죄를 범한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풀어줄 수 있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마침 빌라도는 전례를 알고 있었습니다. 명절 때 무리의 청원이 있을 경우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이 전례를 통해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뜻 밖에 군중들이 예수님 보다는 극악무도한 죄수인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청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을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말했습니다. 법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으로 사형에 처할 수가 없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그 때 군중들이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가 당황했습니다. 이러다가 민란이 일어날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24절을 보면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벌입니다.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그리고는 십자가형을 선고하고 형을 집행토록 했습니다.

재판은 의로워야 합니다. 죄가 있으면 벌을 주고, 죄가 없으면 풀어주어야 합니다. 오직 재판은 죄를 밝혀내고 그 죄에 합당한 벌을 줄 때 의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재판관이 처벌의 결과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따라 판결을 내린다면 의는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재판은 빌라도가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고도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무죄를 선고하면 민란이 일어나 자신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재판은 정말 불의한 재판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빌라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빌라도는 사건 전모를 파악한 뒤에 재판관으로서 명확한 결론을 가지게 됐습니다. 예수님은 무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무죄 석방했다가는 민란이 일어날 상황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통치하고 있는 이 유대지역은 로마제국 내에서도 가장 소란스러운 곳이어서 로마 황제가 늘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자칫 민란이라도 일어난다면 자기 자리가 위태롭습니다. 아니 자기가 로마황제로부터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군중들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빌라도는 깊은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무고한 죄인을 살릴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내 살길을 택할 것인가?”그러다가 결국 자기 살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비겁하게 이 재판 결과에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 선언해 버리고 맙니다. 재판관이 재판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없다는 말은 무엇입니다. 
그렇습니다. 공의는 자기 살길을 찾는 사람들로는 지켜질 수 없습니다. 자기 희생을 각오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지켜지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공의는 순교의 각오로 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지켜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빌라도처럼 고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공의를 세우는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내 살 길을 찾을 것인가?” 공의를 세우는 길로 간다면 내가 큰 희생을 치러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살 길을 찾는다면 공의를 버렸다는 무거운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고 더더욱 하나님 앞에서 깊은 죄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이 때 어떤 선택을 해 오셨습니까? 

사도신경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체포된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가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처형하라 명한 것도 아닙니다. 군중들의 반란이 두려워 정치적인 판단을 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이 일에 책임이 없다고 선언한 바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다고 못 박으신 것입니다. 그 잘못된 재판 때문에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잘못된 판단과 결정 때문에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 살겠다고 의를 저버릴 때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희생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등 질 때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지한 재판 때문에 죄인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아니 영원한 재판관께서, 죄인으로 재판을 하셔야 할 분이 재판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반전시킬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죄인의 자리에 서계셨습니다. 모욕을 당하셨고 가장 극심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하여 죄인의 자리에 서셔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셔야 했습니다. 증거가 없습니다. 증인도 다 조작됐습니다. 재판관이 불의를 저지르며 정치적 재판을 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불의를 바로 잡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을 묵묵히 다 견뎌내셨습니다.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이런 상황을 예언해 놓았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의 말씀대로 이 잘못된 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가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고난주간입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잘못된 재판까지 받으셨던 주님의 저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