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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호산나의 길과 십자가의 길 (창 35:1-3, 마 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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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의 길과 십자가의 길 (창 35:1-3, 마 21:6-9) 

‘오 형제의 잔칫상’이란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산골마을에 오 형제가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오 형제에게 “너희는 이 마을을 떠나 먹고 살 기술을 한 가지씩 익히도록 해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첫째 아들은 농사를 배웠습니다. 둘째 아들은 대장간의 일을 배웠습니다. 셋째 아들은 목장의 일을 배웠습니다. 넷째 아들은 큰 음식점을 열었습니다. 다섯째 아들은 과수원에 가서 일을 배웠습니다. 

다섯 아들 모두가 큰 부자가 되기로 각오하여 저마다 꿈을 이루었지만 산골마을에는 그림자조차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아들들은 소식도 없고 늙은 부모만 집에 쓸쓸히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을병이 걸렸다고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아버지는 죽기 전에 큰 잔치를 벌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맏이는 곳간을 열고, 둘째는 풀무로 물건을 만들고, 셋째는 짐승을 잡고, 넷째는 음식으로 잔치 상을 채우고, 막내는 과일 두 상자를 가지고 왔습니다. 푸짐한 잔칫상이 되었습니다. 다섯 형제는 아버지가 죽게 되었다는 말에 슬펐지만 동네 어른들, 손님들을 대접하느라 모처럼 기뻤습니다. 이 때 아버지는 털고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가 꾀병을 부렸지만 오 형제는 기뻤습니다. 
  
죽기 전에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아들들은 아버지가 죽을병이 아니라 꾀병인 것이 기뻤습니다. 아버지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은 가장 슬픈 소식이었지만 아버지가 죽지 않고 살아 계신다는 것은 가장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가장 기뻐하는 날이 가장 고통스런 날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의 그늘이 점점 깊게 드리운 날이었습니다. 잔치 상을 받은 사람들은 멋모르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멋모르고 기뻐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죽음이 가까이 온 십자가를 지러 가는 슬픈 날이었습니다. 
  
‘버킷 리스트’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옛날 교수형에 처해지는 죄수의 발아래에 버킷이 있었는데 그 버킷을 차면 몸이 떨어지고 목이 졸려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 죽인다는 것을 ‘버킷을 찬다’(kick the bucket)라는 말을 씁니다. ‘버킷 리스트’라는 것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것들을 말합니다. 

요즘에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죽기 전에 곡 먹어봐야 할 것’ 등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에게 잡히시고,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르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고, 십자가를 지고, 죽은 것은 예수님의 ‘버킷 리스트’입니다. 
  
공관복음서라 불리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활동이 주로 갈릴리에 집중 되어 있습니다.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활동이 처음부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세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2장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숙정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5장에는 예루살렘에 가셔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사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체류하신 기간이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사건을 흔히 ‘예루살렘 입성’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의 사건을 기록한 마지막 입성은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은 ‘호산나’로 주님을 찬양하였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은 죽음을 향하여 가신 길입니다.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심경을 몰라주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마태,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호산나’를 불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예루살렘 입성은 기록하지만 사람들이 ‘호산나’를 불렀다는 사실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가 당신께 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호산나’는 기쁨과 승리, 구원의 희망 등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우리나라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습니다. ‘호산나’ 즉 ‘구원하소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구원은 십자가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은 환희의 주일입니다. 기쁨의 주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고난의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묵상하며 고난주간의 경건의 의미를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호산나의 길은 주님을 높이는 찬송의 길입니다. 
  
마태복음 21:9에는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장면을 성경의 기자는 자세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제자들은 겉옷을 예수님이 타신 나귀 위에 깔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환호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21:15에는 “어린이들”도 길에 나와 어른들과 함께 “호산나”를 부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아람어 ‘호산나’(hosan-na)의 음역으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시편 118:25에는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호산나’는 이 말씀에서 유래된 표현입니다. 구원을 간구하는 짧은 기도입니다. 유대인의 초막절 의식에는 제단에 물을 부을 때 레위인들이 시편 118편을 찬양했습니다. 이 때 제사장들은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옵소서”라고 외칩니다. 이 전승에서 나온 말이 ‘호산나’입니다. 
  
백성들이 ‘호산나’를 외칠 때에 적어도 두 가지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는 외침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찬송 받을 자로 인정하는 외침입니다.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하겠습니까? 찬송 받을 자로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치겠습니까? 
  
사본들 가운데는 ‘호산나’ 찬양 가운데 누가복음 19:38의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가 첨가 된 사본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의 탄생에 버금가는 찬양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본에는 없다고 보지만 사본에는 이 구절을 첨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에는 사람들이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신 것을 말합니다. 7절에는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하고 예수님께 경의를 표하는 말씀입니다. 8절 상반절에는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라고 합니다. 자신의 옷을 길에 펴는 것은 상대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최상의 예의를 표한 것입니다. 
  
쉴러는 “악마들조차도 수없이 많은 예술에 대해 알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노래를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빛으로 충만한 밝은 세계로 악마를 인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찬양하고 노래를 부른 것은 악마의 세계가 아니라 천사의 세계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15절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라고 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자신의 기득권과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높이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을 구원자로, 찬양 받을 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찬양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을 위해 노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주님께 대하여 노하게 됩니다. 
  
일본 서양지성사 교수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4권에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삼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승리’라고 하였습니다.  사가들은 고대역사는 세 줄기가 있다고 합니다. 히브리의 종교와, 로마 정치와 법과, 헬라의 문화와 문학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의 정치와 법, 헬라의 문화와 문학은 히브리의 종교에 잠식되고 맙니다. 지금은 로마에 가든, 헬라(그리스)에 가든 기독교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마침내 승리한 것입니다.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가 죽을 때 ‘Vicisti Galilaee’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갈릴리인이여, 당신이 이겼소”라는 뜻입니다. 나폴레옹은 “예수 바로 당신이 이겼소. 당신만이 승리자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승리자인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 찬양받으실 승리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분으로 인정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호산나”가 주님을 높이는 우리의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호산나의 길은 주님께서 죽음을 향하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마태복음 21:8에는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라고 합니다. 나뭇가지는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과, 십자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종려주일에 꺾어 놓은 종려나무 가지를 일 년 내내 말려둡니다. 그리고 다음 해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에 마른 종려나무 가지를 태웁니다.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풍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라고 합니다. 
  
‘베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코프톤’이고, ‘펴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스트로뉘온’입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이 두 단어가 다 미완료형태 동사입니다. 끝나지 않은 동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실수록 더 많은 무리들이 계속해서 종려나무를 길에 펴는 반복적 행위를 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려나무는 팔레스타인에 아주 흔한 나무입니다. 종려나무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악마를 대적하는 상징물이며, 축복의 나무입니다. 

출애굽기 15:23에는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고 합니다. 15:25에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고 합니다. 마시지 못하는 쓴 물에 나무를 던지니 단물이 되어 마시는 물이 되었습니다. 나뭇가지는 십자가를 상징하는데 십자가로 정결케 하는 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민수기 33:9에는 “마라를 떠나 엘림에 이르니 엘림에는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그루가 있으므로 거기에 진을 치고”라고 합니다. 십자가로 정결케 된 사람들이 엘림이란 아름다운 곳을 만납니다. 이곳에서 승리의 종려 70 그루를 만납니다. 우리도 십자가로 승리의 종려나무를 만나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7:9에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7:10에는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찬송합니다. 종려나무는 구원의 승리를 노래하는 나무입니다. ‘호산나’를 부르는 종려나무는 구원의 승리를 노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2세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올라갔다가 오는 길에 부모님은 이미 출발하였지만 성전에서 학자들과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길이 엇갈려 예수님을 찾지 못한 부모를 속 태우던 주님이셨습니다. 20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에 오르셨습니다. 이제는 어머니의 속을 더 태우게 되는 광경을 눈앞에 두고 오르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오르신 것은 고난 같은 기쁨이며, 기쁨 같은 고난입니다. 승리의 입성이라고 하지만 십자가 고난의 시작입니다. 승리와 고난의 역설적 장면이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산을 상상해 보세요. 모리아산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의 예배 처소가 있던 자리입니다. 솔로몬 성전이 세워질 자리입니다. 이 모리아산에 이삭과 아브라함이 함께 올라가면서 이삭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은 번제물로 모리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번제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리게 하지 않고 대신 수양을 주셔서 번제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수양도 주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셔서 우리의 한번으로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번제할 어린양이 되시려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종려나무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기 위하여 올라가시지만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라는 것을 보이십니다. 십자가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을 보이십니다. 
  
창세기 35:3에는 야곱이 세겜에서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세겜 사람들에게 욕을 당한 다음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고 합니다. 벧엘로 올라가는 길은 기쁨의 길이 아닙니다. 딸의 일로 말미암아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되었고, 가정적 큰 환란을 당하여 죽기보다 싫은 길입니다. 정말 올라가기 힘든 길이고 부끄러운 길입니다. 그러나 올라가면 회복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야곱은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합니다. 고통의 길이지만 거기에 기쁨이 있고, 회복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환호와 축제의 소리 뒤에는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로의 삶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뒤에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 있고, 우리의 구원이 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새 생명이 있습니다. 

  결론

옛날 한나라에 길분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전에게 무고하게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15세인 아들 길분은 울부짖으며 자신이 아버지 대신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처형하는 사람이 길분에게 무섭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무섭지도, 후회하지도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본 임금은 길분의 아버지를 용서하고 길분에게는 큰 상을 내렸습니다. 우리 대신 죽겠다고 예루살렘에 오르신 주님은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셨지만 그 길은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라 승리의 호산나의 길이었습니다. 부활의 길이었습니다.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신 종려주일이며, 고난을 당하신 고난주간입니다. 사순절 중 특별히 거룩한 주간을 ‘성주간’(Holy Week)라고 합니다. 기독교사에 유명한 아타나시우스 감독은 이 기간을 ‘거룩한 유월절 주간’(Holy Paschal Week)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거룩하게 사는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한 주간이 가장 거룩한 주간이 되어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못 박히고 돌아가신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여, 다음 주일 부활의 영광과 기쁨도 함께 맛보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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