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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 물음 앞에 서시다 (요 18: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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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물음 앞에 서시다 (요 18:33-38)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유대 탈무드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하늘나라 법정에서 받게 되는 질문이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세상에서 사는 동안 네게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행했는가?”입니다. 생각과 말, 행동, 그리고 삶이 일치했는지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속과 겉, 앞과 뒤가 조화되도록 노력하며 살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토라(Torah. 성경)’를 읽고 공부했는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묵상했는지 묻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는가?”입니다.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약속의 조상으로 세움 받고, 가정을 꾸려 자녀를 낳아서 바르게 양육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이 세상이 구원되기를 열망했는가?”입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는 않았는지, 이웃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향한 책임을 감당했는지 묻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앞에 질문 받을 것을 준비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빌라도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상황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질문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지상의 권력자인 빌라도가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을 향해 질문을 퍼붓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이름이 나오는 인물입니다. 그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메 지역을 AD 26년에서 36년까지, 11년 동안 통치했던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바로 그 즈음에 총독의 직분을 감당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유대인은 로마제국의 눈으로 보면 아주 골치 아픈, 다루기 힘든 백성들이었습니다. 메시아 운동을 통해 끊임없이 로마제국에 저항했고, 반란을 시도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로는 유화적인 정책을 펴기도 했고, 때로는 아주 잔인한 통치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인물 앞에 예수님이 서게 되신 것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빌라도가 질문을 할 때마다 하나하나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를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 앞에 끌고 온 때는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새벽부터 잠자는 사람을 깨워서 고발한단 말인가?’ 사실 빌라도는 귀찮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자기들의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사회는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묶여져 있었기에 로마 총독으로서는 그것에 깊이 관여되기가 싫었습니다. 본문 3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끌고 온 유대 사람들에 대한 빌라도의 불편한 마음이 나타납니다. 도대체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데리고 간 것일까요?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요한복음 18:31) 

악은 끊임없이 동조자를 구합니다. 혼자 악을 행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와 권력이 야합하여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빌라도의 말에 대한 유대인들의 대답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더 이상 우리와 살아서는 안 된다’며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형에 대한 법적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를 찾아와 로마법으로 그것을 시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이자 정치적 반란을 주도한 국가적 음모사건의 주인공으로 확대하여 빌라도에게 데려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생각했습니다. ‘예수, 이름은 들어봤는데 누구인가? 대제사장인가? 예언자인가? 유대인의 왕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 새벽부터 유대인들이 이렇게 흥분하여 이 자를 고발하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 앞에서 처음에는 빌라도도 호기심과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로 정치적인 질문을 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민란과 소요를 일으킨다면 총독으로서 골치 아픈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정치적인 보스인지를 묻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되물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요한복음 18:34) 

“소문을 듣고 하는 말이냐, 아니면 네 마음속에서 내가 유대인의 왕처럼 보여서 하는 말이냐?” 그렇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네 입으로, 네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빌라도는 예수님께 무엇을 했는지 묻습니다. 체포된 몰골이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품위는 없는 듯한데, 도대체 왜 여기까지 왔으며 진짜 정체는 무엇인지 밝히라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별도로 있다”는 예수님의 말에 빌라도는 깜짝 놀라 이야기합니다. “네 대답이 네가 스스로 왕이라 하는구나?” 바로 이 때, 예수님은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요한복음 18:37) 

“그렇다. 네 말대로 내가 왕이다. 내가 이를 위해서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다. 진리에 속한 자만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일 수가 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왕이심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제 호기심과 관심이 아닌, 의심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기껏해야 진리? 힘과 능력, 권세를 가진 왕인 줄 알았는데,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네 모습이 어디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왕 같으냐?’ 그 비아냥거리는 마음이 세 번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요한복음 18:38) 

진리를 앞에 놓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호기심도, 구도자의 물음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냉소주의자인 빌라도의 코웃음 치는 물음이었습니다. “진리가 네게 밥 먹여 주더냐?” 라고 묻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이렇게 체포되어서 초라하게 있는 것에 대한 물음이었고, 진리타령 그만 하라는 의미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님은 더 이상 빌라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침묵을 지키실 뿐입니다.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질문의 의도와 자세는 중요합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을 때, 늘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질문을 하라. 질문하는 것이 곧 공부다. 질문을 해야 생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질문을 해야 대답이 나온다. 질문하지 않는 것은 학생의 기본적 태도가 아니다.” 바로 질문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그런데 물어보는 것이라고 해서 다 질문은 아닙니다. 질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예 의심하고 비난할 마음을 갖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기 안에 어떤 대답을 가지고 묻는 것입니다. ‘내 대답과 맞으면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 내 대답과 다르면 저 사람은 엉터리’라는 생각으로 마음에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정말 대답할 수 있어? 내 대답을 당신이 알아?’ 라는 비아냥과 시니컬함으로 묻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는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대답을 하면 할수록 싸움과 분쟁이 커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이미 자신들의 답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답과 다른 답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든지 잡아들이려고 올무를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 간접화법으로 대답하시거나, 아예 침묵으로 대응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도 이런 질문에 대한 충동이 수없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호기심을 가지고 배우려는 마음에서 하는 질문입니다. 더 깊이 더 넓게 알기 위한 질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는지 기대하는 마음의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좋은 질문입니다. 질문하는 내용보다 질문하는 태도와 자세가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에 예수님은 즐겁게 대답하셨습니다. 함께 고민하자, 그 길에 나도 참여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이란, 믿음이란, 질문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즉, 신앙이란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더불어 참된 질문이 사라지면 신앙이 죽어버린 종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된 질문은 신앙을 살아있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이 역동적이게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질문을 통해서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은 내게 대답하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내게 질문하시고 나는 하나님께 대답하고.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대화, 신앙적인 대화입니다. 이런 신앙적 대화가 있을 때에 신앙은 생명의 신앙, 살리는 신앙, 마음을 기쁘게 하는 신앙, 역동적인 신앙으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이 고착화되는 이유는, 질문이 멈췄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딱딱한 종교로 바뀌거나 종교 이데올로기로 변질이 되는 것은 신앙 안에 진정한 질문이 사라지고,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질문으로 채워질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종교지도자들은 더 이상 진리가 무엇인지 깊이 묻지 않았습니다. 자기 비판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법조항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질문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문제였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질문하고 예수님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계십니까? 당신이 나의 아버지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영원한 창조주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당신의 아들이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내 죄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까?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를 용서하신 사랑을 보여주신 분입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해야 내 신앙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내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할 때, 우리의 인생이 신앙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 있을 때는 신앙이 있는 것 같지만 세상에서는 신앙과는 상관없는 사람이 될 때가 많게 됩니다. 

세상에 나아가서도 고민하면서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길을 갈 수가 있겠습니까?” 매순간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란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으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폐허처럼, 딱딱한 고체처럼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고 멈춰 서게 되어버립니다. 
권력자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질문을 계속하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질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협박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9:12) 

“당신이 총독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이런 사람을 그대로 놔두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며,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을 놔주겠습니까?” 유대인들은 빌라도를 몰아붙였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모든 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더 이상 묻는 것도 진리를 알려는 것도 포기한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에게 질문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지금까지 어떤 질문을 해 오셨습니까? 앞으로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향해서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문자를 향해서 질문하는 것은 두 번째입니다. 교리를 향해서 질문하는 것도 두 번째입니다. 우리는 먼저 살아계신 예수님,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질문해야 됩니다. 내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감격을 허락해 달라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인 것을 내가 알게 해 달라고, 주님이 정말 그런 분이시냐고 물어야 합니다. 

세상의 다른 많은 질문들은 하다가 멈춰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질문은 마지막까지 밀고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내게 가르치실 때까지, 예수님의 형상이 내 안에 생길 때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안에서 내가 경험하고 깨달을 때까지 지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포스트모던적인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절대적인 진리를 상대화시킵니다. 양자택일적 선택을 싫어하고, 유일성보다는 다양성을 좋아합니다. 내게 약간의 평안과 작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이 괜찮다고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른 많은 것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길이다, 진리다, 생명이다, 부활이다.” 하시는 그 분의 말씀을 가슴으로 들을 때까지 우리는 그 분과 대화하기를 멈춰선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끝까지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이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남에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내 실존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서 쓰임 받는 복된 실존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고난 주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 주간 동안 하루 한 끼씩 금식해 보세요. 아니면 일주일에 하루정도 금식하며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해 보십시오. 그래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기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축복받은 인생인 것을 선포하면서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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