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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님을 맞으러 나가자 (요 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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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맞으러 나가자 (요 12:12-19)
  
오늘은 우리교회가 지키는 춘계 성례주일이며, 교회력으로 수난주일이며, 종려주일입니다. 수난주일이라고 하는 것은 이번 주간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수난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또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이 베다니에서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 날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는 가운데 입성하셨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입성하시는 주일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면서 경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죽으신 십자가와 부활하신 빈무덤 위에서 모여진 공동체가 기독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생명의 진리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영원한 진리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모인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예배드리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기억하고 회상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중에 임재하시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40일이란 긴 시간의 사순절을 보내고, 수난주간, 성금요일을 경건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모두다 주님의 수난에 그 초점을 맞추다 보니, 부활주일의 기쁨이 크지 못하다는 지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직 하루만의 부활절, 기쁨이 없는 부활절, 하루의 기쁨으로 그치는 부활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부활절로부터 오순절 즉 성령강림절이 될 때까지 50일 동안을 ‘기쁨의 50일’로, 부활의 감격으로 남은 한 해를 보내는 그런 큰 기쁨을 누려야겠습니다. 부활절에는 승리에 초점을 둔 찬양과 경배의 예배와 성도의 교제로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주일이 단 하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주일 아침부터 시작하여 오순절 성령강림절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부활 절기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유월절(파스카)의 절기, 기쁨의 50일, 위대한 50일이라고 불렀습니다. 니케아종교회의에서는 이 부활절기는 기쁨과 축제로 보내라고, 무릎을 꿇는 것도 공식적으로 금하였습니다. 주일은 항상 작은 부활절로 보냈습니다. 사순절이 진행되어도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었기에 사순절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부활은 생명이요, 감격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주님은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셨으며, 예루살렘에서 죽으셨으며 삼일 후에 부활하셨고,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귀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제자들 보다 앞서서 가시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리고에서 삭개오를 만나시고 그 집에 유하셨으며, 베다니에 오셔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베푼 잔치에 참석하시고 베다니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있습니다. 

감람산이란 이 산은 해발 800m의 높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보다 90m 정도 높아서 감람산 정상에 서면 예루살렘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입니다. 보통 갈릴리에 사는 유대인들은 베뢰아 지방을 돌아서 여리고에 와서 쉬고, 다시 여리고를 출발하여 베다니에서 머물고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동리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어린 나귀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는 풀어 끌어오려고 하였습니다. 

마침 그 나귀의 주인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낯선 청년들이 동리로 들어오더니 나귀 새끼를 끌어가려고 합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이 말은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고 했습니다. 두 제자는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순순히 허락하였습니다. 

여러분, 유대나라의 인심이 정말 후한 것을 봅니다. 우리나라가 같으면 주인이 싸우자고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아니 너의 주인하고 이 나귀새끼하고 무슨 상관이야, 어림없는 소리 하지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만 가봐. 너의 주인 데려고 와봐”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두 제자의 하는 일이 정말 진지한 모습이었고, 정직한 사람들이었고, 주의 명령을 받들어 왔다고 하는데,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두 청년은 나귀 새끼를 끌어다 팔아먹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마태복음에서는 구약 스가랴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여 바로 그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은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나귀에 태우고 갈 때에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구약에도 겉옷을 깔거나 옷을 길에 펴는 일은 매우 존경한다는 표시였습니다. 왕으로 환영하는 모습입니다.

이 때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맞아 큰 무리가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습니다. 복음서마다 찬송하는 내용이 조금씩 다른데, 호산나를 외쳤으며,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라”라고 외쳤습니다. 

우리 주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십니다. 여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왕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모든 말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인정하는 말이요, 자기들의 희망이라는 뜻으로 외친 말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찬양이 울려나왔다고 봅니다. 4복음서가 다 달리하는 것을 보아, 이런 저런 찬송이 뒤섞여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찬송하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합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책망하라는 말은 꾸짖으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19:40)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찬양하지 않고 잠잠하면, 침묵하면 돌들이 우리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이것은 메시아적인 행진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는 것이나,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을 보니 예수님이 평화의 왕, 이스라엘의 왕,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호산나라는 말,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보면서 잠잠하라고, 침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른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찬양을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마땅히 찬양해야할 사람들이 침묵하지 말고, 소리높여 찬양하여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짐승에게 당신의 몸을 맡기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 있는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야 합니다. 주님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셨으면, 주님이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면 우리도 온유하고 겸손하여야 하며, 주님은 당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면 우리도 그래야 주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으로,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으로 예배여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채운다는 말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으로, 우리 주님을 나의 왕으로 모셔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비움이 먼저 이루어져야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란 영역에 세상으로 채워져 있으면 거룩을 담을 수 없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성숙한 영성입니다. 거룩이란 구별되었다는 뜻이요, 다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나라는 공간에 나로 채워져 있으면 하나님은 담을 수 없습니다.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욕망으로 채워져 있으면 베품과 사랑은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의심으로 채워져 있으면 믿음은 담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절망으로 채워져 있으면 희망은 담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죽음으로 채워져 있으면 생명은 담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 시간에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과 함께 예배당을 나가야 합니다. 나를 버리고 죄를 버리고 욕망을 버리고 과거를 버리는 비움의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비움이 바로 회개입니다. 예배란 회개의 시간을 가지지 않고는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분노를 버리고 고통을 버리고 상처를 버리는 비움의 과정이 회개입니다. 예배란 그 비워진 곳에 하나님을 채우고, 거룩을 채우고, 사랑을 채우고, 믿음을 채우고, 희망을 채우고, 생명을 채우는 과정입니다. 예배를 다시 한 번 우리의 진솔한 모습을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 필요한 존재입니까? 나는 어디에 쓰임받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소명 혹은 사명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스펄죤 목사님에게 "어떤 것이 소명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스펄죤 목사님은 세 마디로 짤막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제일 귀하게 보이는 것이 소명이다. 의사가 제일 귀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의사의 소명이 있는 것이고, 후세를 가르치는 일이 제일 귀하다 느끼는 사람은 교사의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목회가 소중하다고 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목회에 있습니다. 

둘째는 제일 쉬운 일을 하는 것이 소명이다. 하나님께서 그 방향으로 일을 시키려고 하셨다면 반드시 그것을 담당할 만한 달란트를 미리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하면 마냥 어려운데 내가 그 일을 하면 아주 쉽다고 느끼는 것이 소명입니다. 

세 번째는 가장 즐거운 일을 하는 것이 소명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한없이 즐거워야 합니다. 피곤함이 없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우리 왕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왕중 왕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왕권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여사가 쓴 ‘로마인의 이야기’에는 개선장군이 로마 성에 입성하는 개선행진에 대하여 상세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변방에 나가 외적들과 싸워 승리한 군인들은 반드시 개선식을 거행한 후에야 로마 성내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온 군인들이 성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 밖에 머물면서 개선식을 준비하고 예행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군인들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도 꽃길을 만들고 붉은 카펫을 길에 펴고, 많은 깃발을 내어 걸어 거국적인 행사가 되게 하고,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였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개선장군과 그의 부대가 개선행진하면서 로마 시내로 들어옵니다. 

개선행진이 있는 날이면 로마의 황제는 모든 신하를 거느리고 중앙 연단에 나와 앉았고, 원로원을 비롯한 귀족들이 도열하여 맞이하고, 모든 시민들이 대로변에 나와 군인들을 맞이합니다. 개선장군이 선두에 서면 그의 휘하에 있는 모든 대장들이 따르고, 부대별로 행진하여 들어옵니다. 개선장군은 화려하게 장식된 백마를 타고 호위대에 둘러싸여 개선문을 지나고 신전으로 향하여 개선행진을 벌입니다. 참으로 멋지고 감격스러운 행진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상상해보아야 합니다. 그 모습은 결코 화려하지 않습니다. 멋져 보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흰말을 타시거나 검정말을 타시고, 아니면 수례를 타시고 입성하시면 당당하고 멋져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가랴9:9의 말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하셨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이나 유대인들의 외침을 보면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 

오늘 우리는 한 마리의 나귀와 같아야 합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나귀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까지도 다 내어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주님이 쓰신다고 하면 다 내어 드리고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정말 거들떠보지도 않을 나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나의 등에 우리 주님이 타고 계시므로 우리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에게서 예수님이 내려오시면 정말 보잘것없는 나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내 등에 모시고 갈 때가 영광이지, 예수님이 불편하여 내려와야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아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갈 때에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나를 비우고 예수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겉옷을 벗으면 그 순간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좋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가는 종들입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종들입니다. 영광입니다. 자랑입니다.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은 구경삼아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들어가시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미 세 번이나 예언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갈 2:20)

오늘 우리는 주님을 맞으러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손에 종려가지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손에 사랑과 섬김을 담아야 하고, 우리도 옷을 벗어 길에 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옷을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전인격을 바치고, 드림으로 예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도 건강도 시간도 사업도 우리의 가정도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이 사용하시는 것을 쳐다보면서 감격해야 합니다. 겨우 나만을 위하여 내가 살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나의 물질, 건강, 시간, 사업, 가정이 주님을 위해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으로 만족합시다. 주님의 은혜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며, 구원이십니다. 영원한 축복입니다.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을 사모하시면서 만왕의 왕이신 주님 앞에서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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