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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요 12: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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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알이 되어 (요 12:12-36) 

1.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든 군중들로부터 환호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성경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슥9:9-10)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예수께서 임의대로 행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 예언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성경에 예언한대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잉태하게 되었을 때 주의 사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1:20-23)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은 B.C.734년경,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처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을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말씀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하심이며,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마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께서는 또한 십자가에 고난받으시고 죽으실 것,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 수차례 미리 예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눅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눅18:31-33)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성경에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이며, 자신에 관해 이렇게 성경에 예언하신 말씀을 모두 이루어가시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눅22: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십자가에 고난받으시고 예언하신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눅24:36-3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에 제자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생각을 아시고 예수께서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성경에 예언하신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눅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성경대로 세상에 오셔서 성경대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 마디로 하나님 말씀에 붙잡힌 바 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변화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고전15:3-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세상에 오시고 성경대로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으며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그를 따랐던 무리들에게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셨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 자신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경대로 사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 보여주신 목적은 바로 복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롬1:1-6)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성도 여러분을 택하신 목적은 여러분을 어두움과 사망에서 영원한 빛과 생명으로 인도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엡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바 된 사도 바울 역시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살았음을 고백했습니다. 

(행 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가장 지혜롭고 영광스러우며 복된 삶입니다. 성경대로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성경대로 세상에 오셔서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뜻, 곧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 받으시고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되신대로 나귀 새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왕되심을 상징하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귀타신 모습이 로마 귀족들이 볼 때는 비천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보였을지라도 이는 분명히 영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스가랴서의 예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귀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환호성을 듣고 심상치않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스가랴 9:9-10에 분명히 ‘나귀 새끼 타시고 오시는 분은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는 왕으로 오신다.’고 했기 때문에 교권을 장악한 무리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겠다는 것은 스가랴 선지자보다 훨씬 더 멀리 야곱이 임종 전에 12아들들, 12지파들에 대해 축복할 때, 그 중 유다에 대해 축복하며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창49:10-12)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라.”는 말씀은 야곱의 12지파 중 유다 지파가 장차 치리자, 곧 왕이 되리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이 예언대로 유다 지파 자손인 다윗이 왕이 되었고 그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른 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짓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기쁘게 여기시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하7:12-16)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유다의 가문에서 왕이 나와 그 왕위가 영원하리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 그리하리라”는 말씀에서 ‘실로’는 메시야를 뜻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메시야로 오시는데 영원한 만왕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상징인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유다 지파, 다윗의 조상 야곱이 예언한대로 나귀 새끼 타시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족보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야곱의 12지파 중 유다 지파 가문, 다윗 왕의 왕족 가문에서 태어나신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 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유다 지파에 대한 야곱의 축복,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는 말씀은 장차 유다의 후손들이 약속의 가나안 땅에서 누리게 될 평화롭고 풍성한 축복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유다의 후손, 즉 메시야를 통해 누리게 될 성도의 평화롭고 풍부하며 건강한 삶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야곱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 되신 성도 여러분은 영원한 왕족의 가문이 되어 아브라함과 더불어 약속된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갈3:7-9)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종려주일을 맞아 평화의 왕으로 성전에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하는 성도 여러분과 가정에 평강의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 예언대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성전에 입성하신 것은 인류 구원을 위해 섬기는 자로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스가랴9:9-10을 다시 보겠습니다. 

(슥9:9-10)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이 겸손한 모습이 아니라 주님이 겸손하시지만 왕으로서 나귀를 타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나귀새끼를 타신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바르게 가져야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그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이며, 정치의 중심인 예루살렘에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실 때, 수많은 군중들이 환호하며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깔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8-9) 라고 소리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군중들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겉옷’을 길에 폈다는 것은 바로 예수를 왕으로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과거 B.C.841년경, 북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아합 왕의 군대 장관이었던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각각 자기들의 옷을 길에 펴고 ‘예후는 왕이라.’고 외치며 예후를 왕으로 영접했습니다. 

(왕하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또한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폈다고 했습니다. 종려나무는 승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거나 흔들어 환호하는 것은 그를 왕으로 영접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군중들은 이러한 과거 전통 의식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환호하며 영접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이렇게 예수를 환호하며 영접하게 된 것은 그간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들, 능력 등을 볼 때(요12:17-18),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등 당대 그 누구도 감히 도전할 수 없었던 최고의 권력가들을 압도하는 권위있는 가르침 등을 볼 때, 로마 제국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자신들을 능히 해방시킬 새로운 유대인의 왕으로 손색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를 정치 혁명가로 보았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해성같이 등장해서 백성들의 인기를 등에 업고 세상을 뒤엎으려고 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본문 19절) 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적 이유로 대제사장들은 죽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와 그를 다시 살리신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들 가운데 구약 시대의 ‘사독’이라는 제사장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그들의 신앙과 교리를 근본적으로 뒤집어버리는 것입니다. 나사로와 그를 부활시킨 예수님을 그냥 두었다가는 사두개파가 없어질 위험에 처하는 상황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의 증거자인 나사로와 함께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추종자는 모두 반란자로 몰아 죽이고자 했습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입성 당시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는 한 예수님의 지상운명은 비참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 예수께서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와 지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성전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얼마든지 그 인기와 지지를 업고 세를 몰아 유대인의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상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 해방하는 구원자로 오신 것이기 때문에 그 지지 세력들을 규합하여 세상 권력에 대한 압력 단체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목적하신 것은 세상 권력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근본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 입성은 당대 세상 권력의 중심부로 향한 것이 아니라 골고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32-34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될 일을 알고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막10:32-34)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 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또한 오늘 요한복음12:23-2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이사사53:10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희생 제물이 되시어 그를 믿는 수많은 자들이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12:26,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으리라.’는 말씀에서 ‘나 있는 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를 섬기는 자는 권력을 추종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권력의 매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의지가 강한 크리스챤이라도 한번 권력의 맛을 보면 섬김의 도리에서 쉽게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랫 사람의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도 바로 권력에 대한 미혹 그 자체였습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께 속한 권력(power)을 획득할 수 있다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에덴 동산의 죄는 권력(power)의 죄”라고 말했습니다. 권력은 처음부터 사탄의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가 되어 왔습니다. 예수께서 사탄으로부터 받은 시험도 바로 그 권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마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4: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인류 구속의 사역을 하시면서 권력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철저하게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0:20-28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열두 제자를 따로 곁에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그 때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와서 절하며,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마실 수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인데 제자들은 세상적인 욕망, 세상 권력에 대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언행일치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몸소 섬기는 종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13:3-17을 보겠습니다.

(요13:3-5)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요13:12-17)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며,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 한 알의 밀알처럼 사는 것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며 사는 사람이 많아질 때, 그 사회에 생명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칙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죽음으로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며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히게 되는 것은 차가운 땅에 떨어져 무덤 속에 매장되는 것처럼 그 곳에 묻힐 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게 된 것은 많은 순교자의 죽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었기 때문에 교회는 산 교회가 되어 수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게 된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아가 죽을 때 십자가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누가 죽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죽으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요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자아(ego)가 죽어야 하는 곳입니다. 자아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마10:38-39)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바로 여기 십자가에 생명의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가 생명으로 넘치는 길은 한 알의 밀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10년, 20년, 아니 평생을 했어도 십자가에 자아가 죽지 아니하면 아무런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영육간 삶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영광된 가정과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삶이 되어 열매가 풍성한, 그리고 영광스러운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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