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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집과 길(II) (요 1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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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길(II) (요 14:1-14)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 우리와 다시 만나게 될 한 '집'을 약속해 주셨으며 또한 그 집을 찾아갈 수 있는 '길'까지 가르쳐 주신 역사상 유일한 분이십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을 지금 당장 눈앞에서 만나 뵙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조금도 근심할 필요 없이 그 주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을 확실히 믿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그 '길'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2.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다시 만나게 될 수 있는 '길'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 4절부터 6절에 "4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내가 지금 아버지 집에 가서 너희 있을 곳을 예비한 후에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가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듣고도 도마는 미심쩍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우리 중에 누가 지금 당장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 집에 함께 갔다 와서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그 집에 갈 수 있는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저 유명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원문을 보면 여기의 '길, 진리, 생명'이라는 단어들 앞에는 각각 '그'라는 정관사들이 붙어 있습니다. 
즉 오직 예수님만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는 '그 길'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그 생명'을 얻게 해 주시는 분이며,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될 수 있는 참된 '그 진리' 자체이시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은 여러 종교, 여러 교주들에게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단 한 길', '오직 예수님'밖에 없음을 명백히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런 길이 되시는 것이겠습니까?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생명을 통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예수님이란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이란 길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 길의 첫 단계는 우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7절부터 9절에 기록하기를 "7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빌립은 이 말씀이 석연치 않았습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아는 것은 틀림없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을 뵌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그 아버지를 우리 눈앞에 직접 한 번만 보여 주시면 우리도 하나님을 훨씬 더 잘 믿을 수 있겠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3년 동안이나 너희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그처럼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도 이미 본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또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영이시기 때문에 원래는 사람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예수님을 '만나고 보고 알게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사람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그 길'의 첫 단계가 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의 제2단계를 설명하셨는데, 그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서 10절과 11절에 "10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기록된 사실입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빌립더러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와 함께 3년이나 같이 살았으니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않느냐?'라는 그런 후에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문장을 통하여 '알다'라는 말을 '믿다'라는 말로 바꾸시는 것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즉 이 말씀은 '네가 나를 잘 알면서도 나를 그렇게도 믿지 못하겠느냐?'라고, 실로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인격 대 인격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어떤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그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학생이 학교수업이나 학원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어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서 "얘야, 네 아빠 엄마가 오늘 저녁에 바쁜 일이 생겨서 내가 대신 데리러 왔단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을 따라갈 학생이 있겠습니까?
모르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사실, 아니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상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면에 친척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와서 "오늘 네 부모님이 밖에서 저녁을 사 준다고 너를 데리고 아무 식당으로 바로 오라고 하시더라."고 한다면,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 아는' 사람은 '확실히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고 나면, 그 예수님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빌립 같은 제자들이야 예수님과 그렇게 '오래 함께' 먹고 자면서 살았으니까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지만, 저와 여러분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것보다 오히려 예수님을 더 잘 알 수 있는 훨씬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성경 말씀, 특히 사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이라는 분을 직접 만나고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실로 제게 너무나도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저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그 '놀랍고도 위대한 인격'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상상할 때 주로 수염이 더부룩하고 노숙해 보이는 사오십 대의 장년 남자를 그려 보게 마련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때의 예수님은 겨우 '30세의 청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새파란 청년' 예수님을 만난 사람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다 그 젊은 예수님의 인격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감동하고 당장에 그 자리에서 열렬한 팬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거친 바다를 상대로 싸우며 고기잡이하던 베드로는 그 예수님을 만나게 된 순간 즉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면서 땅바닥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위 '물고기 배 째 먹으며' 산전수전 다 겪고 살던 거친 어부가 세상에 누구 앞에서 주눅이 들겠습니까?
하지만 그처럼 기가 센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난 첫 순간 그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그 앞에 푹 꼬꾸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리 삭개오도 그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고 자진해서 회개의 서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세리란 로마제국에 빌붙어서 자기 동족의 고혈을 짜내어 치부하던 자로서, 유대 사회에서 최악의 매국노요 왕따였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얼굴에 철판 깔고 살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무슨 꾸중 같은 말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는데도 그냥 제풀에 자기의 과거 인생을 부끄럽게 느끼게 되면서 한순간에 딴 사람으로 변화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느 동네의 '죄인인 한 여자'가 그 예수님 앞에서는 자신의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고 머리털로 닦아 드리며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릴 정도로 사람이 바뀌어졌습니다. 
성경에 그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 '죄인인 한 여자'란 말이 바로 그 동네의 창녀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창녀가 젊은 남자를 만나면 당연히 유혹할 생각부터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녀가 그 젊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는 그런 생각이 들기는커녕, 지금까지 자기가 몸을 팔아 돈을 벌던 과거의 삶이 생전 처음으로 부끄럽게 여겨지면서 그 '죄'를 예수님께로부터 용서받고 싶어지는,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신기한 일이 그녀의 마음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바로 그처럼 예수님을 만난 순간 180도로 딴사람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는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였습니다. 
당대 최고 학력의 소유자, 오늘날로 치자면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야말로 앞길이 창창하게 열려 있던 수재 중의 수재였습니다. 
그랬던 '사울'이 일단 예수님을 만나 '바울'이 된 후에는 유대 사회에서 자신의 출세를 보장해 주고 있던 그 모든 자랑스러운 '상아탑 졸업장과 박사학위'들이 다 "배설물" 같은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이제부터는 그에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놀랍고 신기하지 않습니까?
자기를 알게 된 사람들을 이처럼 극적으로 변화시킨 사람은 역사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도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실로 위인, 현인, 성인이라는 말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고, 오직 '완전한 사람'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감히 필적하기는커녕 곁에 갖다 놓고 한번 견주어 볼만한 상대조차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는, 유일한, 최고의, 전무후무의 '완전한 사람'이 바로 제가 성경 말씀을 통해 '알게' 된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로 '아버지 집' 즉 내세의 천당이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라고, 스스로 당신을 가리켜 '성자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선택은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세상에서 제일가는 사기꾼이나 미친 사람이었다고 단정하든지, 아니면 예수님과 그 하신 말씀을 모두 다 그대로 믿든지 이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 예수님이란 분을 '결코 믿을 수 없는 거짓말쟁이'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저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아니 제가 역사나 뉴스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아무리 다 통틀어 본다 해도 이 예수님보다 더 '완전한 사람'은 결코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과 감히 비겨 볼만한, 근처에 갖다놓을 비슷한 사람조차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된 이후 제게 있어서는 세상의 모든 다른 사람을 다 의심한다 해도 결코 의심할 수 없는 마지막 한 사람,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적 사유의 한 방법으로서,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의심해 보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것, 틀림없는 진리라고 확신해 왔던 것들 모두를 두고 '이것이 정말 진리일까?'하고 다시 한 번 검증의 의심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의심해 보는 가운데 데카르트는 단 한 가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처럼 의심의 사고 작용을 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만큼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최고의 진리라고 확신한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자신의 철학의 제1명제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릅니다. 
저도 모든 것을 의심해 볼 수는 있습니다. 
제가 배운 것, 제가 겪은 경험, 제가 얻은 정보가 정말 사실인지 하나 하나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이 정말 믿을만한지, 아니 제가 지금까지 알고 친하게 지내던 가장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의 사고 끝에 가면 제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대상이 딱 하나 남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저는 아무리 모든 것에 대하여 의심하려 해도 이 완전무결한 사람의 모습으로 역사에 나타나신 예수님만큼은 결코,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데카르트의 흉내를 낸다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시다. 고로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 이것이 제 신앙의 제1명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믿음에서부터 다른 모든 신앙고백과 지식들이 절로 연역됩니다. 
그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으니, 그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가르쳐 주셨고 성령 하나님을 약속해 주셨으니, 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대로 믿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이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으니, 저는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성'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하셨으니, 저는 제가 예수님의 인격을 의심할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천국과 지옥의 실존'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일단 예수님을 '알고' 나면 그 다음에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이처럼 쉽고도 확실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면 그 다음 마지막 단계의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일을 준행하는' 신행일치의 생활입니다. 
바로 12절 이하 14절에 기록된 말씀으로서 "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의 하는 일"은 바로 예수님의 언행을 본받는 일이며, "이보다 큰 것"이란 예수님께서 남겨 두고 가신 일 곧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일들 역시 우리는 그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와 함께 순종할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친히 "시행"하시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게 되어도 그 모든 것은 다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는 일이 될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신자는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본받고 그 맡기신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마지막 세 번째 단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신행일치의 생활로써 충성하는 '길'을 계속 걸어가면 그 끝에서 바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의 교회 생활이 힘들게 여겨집니까?
주일성수나 십일조 생활 같은 가장 기본적인 신자의 행실도 그렇게 어렵습니까?
수요 전도대회에 참여하는 것이나 선교회비를 내는 것이 여전히 부담스럽기만 합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을 확실히 '믿으면' 그 믿음에 대한 '행함'이 절로 따라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것은 곧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믿을 도리가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는데도 왜 아직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을 마음을 열고 읽지 않고, 주의를 집중해서 듣지 않고, 열심히 배우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잘 공부해 보지도 않고 예수를 못 믿겠다는 사람이나, 설교 말씀조차 귀 기울여 듣지도 않으면서 "목사님, 제 신앙이 자라도록 기도 좀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교인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 말씀에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깜깜한 어두운 밤중 같던 심령의 소유자라도 일단 성경 말씀을 '주의하여 읽으면' 그 심령 속에 예수님이 '샛별처럼 밝고 분명하게'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그 길',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잘 알게 되면 자연히 예수님을 확실히 믿게 되고, 그처럼 예수님을 분명히 믿고 있으면 절로 예수님께서 명하신 일을 행하며 살게 되는 바로 이 길만 똑바로 따라감으로써, 이 길 끝에 예비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에 틀림없이 도착하여 거기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을 꼭 만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무도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오늘도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는 자들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2-3)라고 탄식한 시편 기자의 심정을 똑같이 공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근심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집'에서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 살게 될 약속을 분명히 해 주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집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길' 역시 자세히 가르쳐 주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인류역사상 그 어떤 현자나 성인이라는 사람도 우리에게 이런 집을 약속해 주지 않았고 이런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마호메트는 죽으면서 그 제자들에게 "나는 이제 너희들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간다."라고 영원한 작별을 고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후계자를 아예 정해 놓고 죽었습니다. 
다시는 자기를 못 만날 것이니 그 제자들이 자기 대신 따라갈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 후계자를 세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마호메트에게는 그의 제자들에게 다시 만날 곳으로 약속해 줄 만한 '아버지 집'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석가모니는 그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스스로 정진해서 도를 닦으면 나처럼 불타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오늘도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죽비로 찰싹찰싹 맞으면서 비몽사몽간에 뭔가 '도' 즉 '길'을 깨닫겠다고 참선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불쌍하지요.
스승부터가 유일한 '그 길'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죽고 나니 그 뒤의 모든 제자들이 두고두고 고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얼마나 편합니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 우리는 뭐 도를 깨우치느라고 고행은커녕 가부좌조차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 길'을 다 가르쳐 주셨을 뿐 아니라, 아무리 아이큐가 나빠도 누구나 다 깨닫고 기억할 수 있도록 아예 성령님까지 개인지도교사로 딸려 보내 주셔서 '그 집'까지 틀림없이 도달하도록 인도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석가모니나 마호메트는 결코 할 수 없었던 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너무나 위대한 말씀을 선포할 수 있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도 어디로 가시는지를 분명히 알리고 가셨던 유일한 '승천자'이셨고, 또한 예수님만이 그 약속하신 대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유일한 '재림주'가 되실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 기독신자는 비록 지금 당장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도하지 못할지라도 조금도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성경이라는 약도를 보면서 '길' 되신 예수님만 믿고 따라감으로써, 비록 아무도 가보지 못한 천당이라 할지라도 번지수 하나 틀림없이 정확하게 그 '아버지 집'에 도착하여 우리를 기다려 주고 계시는 주님과 다 함께 만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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