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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께서 다시 사셨거늘 (눅 2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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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다시 사셨거늘 (눅 24:1-10)


작가 오혜령 (吳蕙齡)의 묵상 기도집 ‘당신 없는 인생은 빈 그물이오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녀는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나 지성인임을 자처하며 예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실패자들이나 매달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나는 그물을 던지면 얼마든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과신으로 예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위암과 임파선 암을 동시에 진단받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이 되었습니다. 

예정된 죽음의 날자가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매주 꽃을 보내주는 사람이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백합 50송이를 보내왔습니다. 그녀는 반시간 가까이 꽃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강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정신없이 방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직감적으로 살아 계신 예수께서 찾아 오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물이 텅 비어 있는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왜 죽음의 한복판에까지 따라 오시는 것입니까?” 그 말을 내뱉고 나니 그동안 주님을 몰라라하며 마음대로 살아왔던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어디서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아졌습니다. 수십 개의 양초가 녹아내릴 때까지 회개하고 또 했습니다. 기도와 찬양을 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던 어느 날 온몸에 오한이 덮쳐 왔습니다. ‘이제 죽음의 시간이 다가 왔구나’ 예감했습니다. 너무 추워서 이불깃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어깨에 복숭아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복수로 차올랐던 배가 꺼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살아 계신 주님이 자기를 찾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의 그물은 고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경기도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버림받은 노인들을 돌보는 평화의 집을 경영하였고 하루 9시간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녀의 글입니다. “당신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 나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 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당신 없이 한평생 수고해 보아야 우리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 

비록 저희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당신을 지금 당장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희의 계획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당신께 대한 신뢰 속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각오가 설 때 저희 행위에 방향과 성취가 부여됩니다. 당신은 가장자리에 계시지만 늘 저희에게 그물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던지라고 분부하고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날마다 호숫가에서 저희를 기다리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부활의 주를 만난 그녀의 고백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은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향한 열심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무덤에 장사한 후 누구보다 먼저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이 는 예수께서 부활하셨으리라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큰 돌로 막아 놓은 무덤의 문을 누가 열어줄 수 있을까 걱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당도하니 무덤 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무덤 안에 들어가 보니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를 잃어버렸다고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여인들의 곁에 서있었습니다. 놀랍고 두려워 엎드린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는 말씀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도 살아나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혹시 십자가에 죽은 예수만 믿는 것이 아닙니까? 부활의 주님은 삶의 한 복판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부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다시 사셨거늘,
 
첫째로 어찌하여 근심하느냐

1874년 남북 전쟁 당시 미국 온 나라는 도탄에 빠졌습니다. 젊은이들이 전쟁에 나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고, 악성 전염병이 돌아 장례식도 제대로 치루지 못한 채 쓰레기 묻듯 하였습니다. 인간의 심성이 갈래갈래 찢겨져 어디서도 희망을 볼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 처참한 장면을 보면서 절망 중에 하나님께 엎드린 로우리 목사(Robert Lowry)가 깊이 기도하는 중에 심령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면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기에 절망하고 쓰러져 있을 수 없는 일 이 아닌가? 주님 앞에서는 전쟁터도 지옥이 될 수 없으며 전염병의 절망도 부활의 주님의 생명을 이길 수는 없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강한 확신을 갖게 된 로우리 목사는 일어나 다른 사람을 격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가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벅찬 감격 속에서 찬송가 160장이 작사, 작곡되었습니다.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 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문제가 생긴다 해도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본문 4절입니다.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죽은 자는 시체밖에 보지 못합니다. 산 자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만족해선 결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에만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의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역의 완성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묵상하고 고난을 생각하며 눈물 짖는 것으로 만족해서 안 됩니다. 살아 계신 예수와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동행하시는 부활의 주를 만나야 합니다. 부활의 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근심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어찌하여 믿지 않느냐 

1945년 4월 8일 주일 아침, 본회퍼(D. Bonhoeffer)목사가 감옥에서 아침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험악하게 생긴 두 사나이가 본회퍼를 사형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왔습니다. “본회퍼, 나와서 우리와 같이 가자.” 감옥에 영국군과 함께 수감되었는데, 그는 본회퍼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알고는 비통한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마지막이군요. 안녕히 가십시오.” 그러자 본회퍼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평안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마지막이 아니라 이제 시작입니다.” 임종의 순간은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영광의 순간입니다. 

부활의 확신이 있는 한 임종의 시간은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으며 동시에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구원받았기에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됨을 믿어야 합니다. 천국 없이 다만 이생뿐이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불쌍한 자가 아닌 것은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입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 찾느냐” 예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믿는 믿음입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는 불신앙으로부터 깨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고 의지하기 바랍니다. 내 힘과 지식과 생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앞이 캄캄한 상황에 처했다 해도 구원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고 머리로만 생각만 하는 것, 믿음도 없으면서 우선 달리고 보는 것은 모두 불신앙입니다. 앉아서 생각만 하고 있든지 눈으로 확인해서 이해하지 못하면 못 믿겠다는 자세는 똑같이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력에 근거를 두는 불신앙일 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를 믿는 믿음으로 불신앙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어찌하여 잊고 있느냐 

맥아더 (Douglas MacArthur) 장군은 76세에 무서운 병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의료진의 진단에 의하면 36시간의 수명뿐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전의 용사답게 그는 다시 회생하여 공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BBC 방송 기자들이 찾아와서 건강 회복을 축하하고 격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무서운 병으로 사경을 헤맬 때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물었습니다. 맥아더는 비몽사몽간에 요한복음 11장 4절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라는 말씀과 25절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말씀으로 힘을 얻어 승리할 수 있었노라 대답하였습니다. 강건한 삶이 가능한 이유는 말씀을 기억함에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여인들이 근심한 이유는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여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더라면, 부활을 믿었다면, 오히려 무덤이 빈 것을 보았을 때 기뻐했을 것입니다.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근심한 이유는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의 말씀을 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적용하는 사람은 근심 대신 평안이, 슬픔 대신 기쁨이, 절망 대신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말씀으로 일어설 것입니다.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주일을 작은 부활절로 지켰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주일을 제외하고 주일을 작은 부활절로 지켰습니다. 사순절이 의미 있는 절기라고 해도 부활의 주님을 기리는 것이 더 앞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나면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정말로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서로 인사하였습니다. 부활의 감격을 유지하고 오랫동안 지속해야 합니다. 주일 하루만의 기쁨으로 그치고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이 샘솟아 오르게 해야 합니다. 

부활하여 여기에 살아 역사 하시는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거의 기억에서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떠나 표적이나, 신비 적 체험을 통해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에 살아 계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는 음성을 듣고 삶의 한 복판에서 살아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다시 사셨거늘 왜 근심하십니까? 왜 불신에 빠져있습니까? 왜 말씀을 잊었습니까? 모름지기 부활의 주를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가 계신다면 절망의 노래가 환희의 노래로 바뀔 것입니다. 통곡의 노래가 감격의 노래로 변합니다. 패배의 노래가 승리의 노래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다신 사신 예수로 더 이상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를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약속을 잊지 아니하고 기억함으로 승리함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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