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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을 신앙하는 사람들 (행 4: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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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신앙하는 사람들 (행 4:32-35)
  
초대교회에 속사도교부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속사도교부’는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사도들의 뒤를 이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속사도교부 가운데 이그나티우스(Ignatius)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테오포로스’(Theophoros)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테오포로스라는 말은 하나님을 짊어지고 가는 자, 하나님을 모시고 다니는 사람(bearer of God)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던 사람으로, 당시 교회가 그를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보여주는 별명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마가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품에 안으시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마가복음 9:36-37)라고 말씀하시던 어린아이가 바로 그 이그나티우스였다고 합니다. 
  
안디옥의 제2대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그가 로마로 끌려가면서 기록한 7통의 편지를 통해서 그가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박해자로 유명한 트라얀 황제(재위 98-117) 때인 주후 107년 경에 로마로 끌려가게 됩니다. 로마 군인들은 이그나티우스를 곧바로 로마로 압송하지 않고, 일부러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천천히 압송해 갔습니다. 로마황제의 명을 거역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죽인다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줌으로써 기독교인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순교를 당하기 위해서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에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위해서 구명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서머나에서 이렇게 편지를 써 보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탄원합니다. 나에게 ‘불합리하게 친절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것(순교)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도착하도록 내가 야수들을 위한 먹이가 되도록 하십시오.” 

자신을 위해 구명운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기꺼이 맹수의 밥이 되는 순교의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굳이 순교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순교라는 죽음의 자리가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 황제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과 믿음에 대해서 변론을 합니다. 그런 이그나티우스를 보고 황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트라얀 황제는 그의 두 손에 강제로 불을 쥐게 하고는 옆구리에 기름에 적신 종이를 감아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런 뒤에 뜨겁게 달군 가위로 그의 살을 찢었고, 나중에는 불에 탄 그의 몸을 맹렬한 맹수에게 먹잇감으로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끔찍한 순교를 당했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그나티우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를 당하거나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는데 그들에게도 그런 동일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히브리서 11:35)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들에게 당한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견디기 힘든 고문까지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함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브리서 11:36-37) 

고난과 시련만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본향’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브리서 11:16)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주어질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이 있음을 믿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죽음 이후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살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죽음이라는 인간 최대의 두려움 앞에서도 우리를 당당하게 만듭니다. 더 좋은 본향에 가기 때문입니다. 또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를 낙심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세상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는 힘은 부활을 믿는 그 신앙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확실한 신앙은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실 때까지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구세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로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전한 복음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오순절에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받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23-24, 32, 36) 
  
사도행전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 걸인을 고쳐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앉은뱅이를 고쳐준 일로 인해서 성전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할 때,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사도행전 3:14-15) 
  
사도행전 4장에서는 앉은뱅이 걸인을 고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을 못마땅히 여겨 사도들을 붙잡아 옵니다. 그리고는 사도들을 위협하며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지도자들은 제자들을 위협하지만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산헤드린 공회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로 가결하여 예수님을 죽일만큼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곳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제자들 역시 예수님처럼 죽임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제자들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사도행전 4:10)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이 신앙이 아주 분명했습니다. 최고의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을만큼, 심지어 자신들이 죽음의 위기에 몰린다 하더라도 절대로 변할 수 없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그들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사람들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모습들이 바뀌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한 가지 예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한 초대교회 교인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털어버린 채 살았습니다. 본문 32절에서 말씀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세상에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간혹 욕심을 극복하려 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교인들은 모두가 재물에 대한 욕심을 초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 가운데 몇몇 신앙 좋은 사람들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내 욕심에 끌려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교인이 된다는 것은 내 재산과 내 욕심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34-35절의 말씀에 의하면, 자기의 재산을 모두 나누었습니다. 집이 있는 사람은 집을 팔고, 밭이 있는 사람은 밭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가 사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부자들도 욕심을 버렸고, 가난한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삶의 절박한 욕망을 버렸습니다.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다가 사용했습니다. 부자라고 더 많이 가져간 것도 아니고, ‘가난해서 지금까지 못 먹고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배불리 먹어보자’고 욕심을 부리며 더 많이 가져가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필요한 것만 가져갔습니다. 그랬더니 모두가 굶주리지 않고 만족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가족입니다. 가족은 모두가 똑같은 생활을 합니다. 아빠가 돈을 많이 벌어왔다고 아빠는 비싼 밥을 먹어야 하고, 갓난아이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으니 굶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몸이 불편하거나 몸이 아파서 일을 하지 못하는 가족이 있으면 다른 가족이 힘들게라도 일해서 자기 가족 모두가 먹을 수 있도록 먹을 것을 마련합니다. 아빠는 부자인데 아들은 찢어지게 가난해 학교도 못가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그런 가족은 없습니다. 아빠의 것이 가족 모두의 것이고,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에 가족이면 누구나 둘러앉아서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식일지라도 밥을 맛있게 먹으면 부모의 마음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모두 가족이었습니다. 유산을 많이 받아서 집과 밭을 가지고 사는 부자도,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모두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기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며 부족함 없이 사는 모습에 서로가 행복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들이 그렇게 욕심을 버리고 한 가족처럼 네 것 내 것 욕심 부리지 않고 살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 해답을 오늘 본문 33절에서 말씀해줍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큰 은혜를 받게 되었고, 그 은혜로 인해서 그들은 욕심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왜 교인들로 하여금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게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그분만의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제자들이나 모든 성도들 역시 자신들도 부활할 것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씀한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린도전서 15:20)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보증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사람들은 더 나은 본향인 천국에서 왕노릇하게 됩니다. 천국을 소유하고 천국에서 왕노릇하게 될 것이기에 이 땅에서 조금 더 가지고 조금 더 누리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누리게 될 영원한 나라에서 왕노릇하게 될 것에 비하면 이 땅의 것은 아주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의 엄청난 부귀영화가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데, 이 땅에서의 작은 부귀영화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쯤은 포기해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에서의 욕심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부활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세상의 욕심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 부활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 안에 살게 만들어주는데, 그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 안에 머물기만 하면 세상의 그 어떤 두려움도, 그 어떤 욕심도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네 것 내 것 구분하지 않고 모든 재산을 공동소유로 해서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보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공산주의라고 알고 있는 사회주의는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가 공동재산을 만들어 사람들이 필요한만큼 나눠가지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며 태동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런 사회주의의 이상은 물거품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사회주의가 태동된 러시아에 재벌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국에는 우리나라 인구보다 더 많은 백만장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중국 인구의 상위 10%는 엄청난 부를 누리며 살고 있지만, 하위 80%는 가난에 찌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리며 산다는 것은 헛된 이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사람이 자기의 능력에 맞게 열심히 일하고, 모두가 일해서 얻어지는 이익을 함께 공유하며 나눔으로 모두가 행복해 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그 멋진 이상이 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까?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의 의지로 그 일을 만들어보려 했고,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일을 했다는 것이 다릅니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반드시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욕심을 털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심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때 우리 인간은 내 힘이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욕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심령에 들어오게 하는 통로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고, 받은 그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특별히 부활을 신앙하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우리의 가슴 가득히 채우는 능력입니다. 
  
부활을 신앙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더 나은 본향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본향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놓으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신앙하는 사람들은 욕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우리 인생의 주인노릇하려 하는 욕심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세상을 이기며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며 살 수 있습니다.

스위스 제네바에 가면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만 누구의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묘가 하나 있습니다.(사진1) 이 묘는 우리 장로교 창시자인 장 칼뱅(J. Calvin)의 묘입니다. 칼뱅은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룬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강요』와 같은 역사적인 불후의 명작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 개혁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그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칼뱅이 죽을 때에 “내 무덤에는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도 없도록 해 달라.”고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칼뱅의 유언을 따라 그의 무덤 묘비에 이름을 새겨넣지 않았습니다. 단지 칼뱅을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워해서 무덤 위쪽에다가 그의 이름 이니셜인 ‘J C’라고만 새겨놓았습니다. 지금은 아쉽게도 그의 무덤 앞쪽에 칼뱅의 무덤임을 말해주는 현대적 묘비가 만들어져 있지만(사진1) 원래는 이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덤 역시 칼뱅의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유언처럼 그의 묘비를 표시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칼뱅은 무덤의 묘비를 만들지 말라고, 무덤의 흔적조차 없도록 해 달라고 유언을 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칼뱅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 주는 것조차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 이후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욱 큰 영광 가운데 들어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유명해지고, 세상에 업적을 남기고 싶은 인간적인 욕망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을 신앙하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부활을 신앙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부활을 신앙하는 사람은 삶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를 지배하려 하는 욕심을 이기게 하는 것이 바로 그 부활신앙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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