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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나? (요일 19: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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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나? (요일 19:17-30)


오늘은 종려주일이자 고난주일입니다. 전자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적에 무리가 종려가지를 꺾어서 흔들면서 환영한 데서 비롯되었고, 후자는 주님께서 오로지 대속의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 올라가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수난은 목요일 밤부터 시작되고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주간이 전적으로 십자가 죽음을 위한 것이므로 이번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아시는 대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희생 위에 세워졌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인류의 구세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고, 기독교는 생명의 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의 중심 내용은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그가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당시에 매 주일마다 성찬을 나누었는데, 이는 그들이 그만큼 주님의 죽으심을 중요시하고 기념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신약성경에 수록되어 있는 서신서들을 읽어 보면 사도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시요 구세주로 믿고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은 사복음서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체포되시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신 전말에 대하여, 그리고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져서 재판을 받으시고 사형을 언도받으셨으며, 로마 군인들에 의해 흉포한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형장으로 가셨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수의 사람들만 아는 가운데 은밀하게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고 유대인의 최고 재판소 격인 산헤드린의 주도 아래, 당시 유대를 관장하던 로마 총독 빌라도의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로마법에 의해서 집행되었습니다. 

처음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후에 고소한 자들에게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을 석방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고 외치자, 그만 굴복하여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합법을 가장하여 죄 없는 예수님께 사형을 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신 일시는 금요일 오전 9시였는데,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각 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광경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고 증언합니다. 처형장인 골고다까지 따라간 자들도 많았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고,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의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형을 집행하고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로마와 헬라와 유대 글자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를 붙여 그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주후 1세기에 살았던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저술한 유대고대사 18권 3장 3절에 보면 이 같은 증언이 나옵니다.

「한편 바로 이 때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 그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선생이었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그의 곁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유대의 유력 인사들의 청에 의해 그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으나 그를 처음부터 사랑하던 자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해 예언한 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뿐 아니라 그에 관해서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었다. 그의 이름을 본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요세푸스가 저술한 「유대교대사」, 「유대전쟁사」는 지금도 권위 있는 역사서로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만약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한갓 지어낸 것이라면 사도들이 목숨을 바쳐서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요, 기독교가 오늘날처럼 온 세상에 전파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이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이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세주께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것이 그를 믿는 자들의 구원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몇 달 전에 제자들을 데리시고 갈릴리 북쪽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들은 대로 고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은 비로소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도 예수님은 재차 말씀하시기를 “33)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막 10:)고 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을 수시로 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죽음이 우연히 발생한 불상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늘 십자가의 죽음을 마음에 품고 계셨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죽음을 그것도 끔찍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상에서 마지막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원하셨다면 얼마든지 십자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유월절 기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셨거나 혹 올라가셨더라도 대제사장들이나 공회원들을 자극하는 언행을 자제하셨더라면, 무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러자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온 사람들이 호응하여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며 어떤 사람들은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지르기를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했습니다. 

이는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스가랴 9:9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했는데, 여기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분은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백성들이 “호산나!”를 외치는 가운데 입성하시는 광경을 본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너무나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만약에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한다면 자기들의 지위가 위태롭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두고 볼 것이 아니라 죽여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잠든 밤중에 예수님을 체포하였고, 밤을 새워 재판을 하여 새벽에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으며, 총독을 강요하여 사형을 선고하게 하여 서둘러 예수님을 처형하였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진행과정을 살펴 볼 때, 예수님께서 죽음을 자초하셨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처럼 죽음을 자청하시는 언행을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인류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하는 것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신 대로, 자원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전날 밤에, 집집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칠함으로, 장자가 죽는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죽임 당한 어린양은 곧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화목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셨기에 이제 그를 믿는 사람들이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로운 자라는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의 형벌을 당하셨으므로 이제 그를 믿는 자들이 죄책을 면제 받고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이 곧 대속의 원리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당치 아니하셨다면 우리의 죄가 그냥 그대로 있을 것이요 우리는 구원의 여망이 없이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가져다주었는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유대교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급적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처형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의 지위와 기득권이 공고함을 백성들에게 주지시킬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가하면 로마총독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속국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로마제국의 위엄을 보여줄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이처럼 속국 백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다른 이유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인 신명기 21:23에 의하면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죽음은 사람을 죽여 나무에 달아매는 것이었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으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것은 전적으로 우리 인생들을 대신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서 3:13에 이르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 낸 형벌 가운데 가장 잔인한 형벌에 속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는 한 두 시간 안에 죽지 않고 적어도 하루 이상, 길게는 사흘 동안도 버티다가 죽습니다. 그 동안 나무에 매달려 온 몸의 근육이 경직되어 뒤틀리고 피가 잘 돌지 않아 호흡이 곤란해지고 심장이 극심한 고통을 당합니다. 내리쬐는 태양빛 아래서 갈증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죄수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 중 하나는 예수님을 비웃고 놀렸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또 한 강도가 그를 보고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또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에 달린 세 사람은 고통 중에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겪는 육체적인 고통을 묵묵히 견디셨습니다. 

정작 예수님께서 절규하시기까지 고통스러워하신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저주를 한 몸에 다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막심했으면 운명하시기 직전에 크게 소리 지르시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을까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버림당하시는 것이야말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온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셨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21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십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같은 예수님께 인간들의 모든 죄를 다 지우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셨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죄 그 자체로 취급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홀로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렇게 절규하셨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다 담당하셨기에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하실 때 자연인 아무개로 대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우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믿는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판결문이 나옵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이 복음인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으나 이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은 의인의 자격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전에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을 때에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종살이하던 자들이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고 화목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은혜로운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현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구원받은 성도들이 할 바가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지 않고 오직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9-10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얼마나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셨으면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셨을까요? 우리에게는 그만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 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 바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우리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자주 자주 “하나님, 사랑합니다.” 라고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물질을 드림으로 또는 많은 봉사를 함으로써 표현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런 것으로도 어느 정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은 억지로, 또는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한 것 같이”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때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3:34에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주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상산수훈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상산수훈에는 예수님의 가치관이 잘 나타나 있으므로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때 예수님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벧후 3:9).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서 한 영혼이라고 더 주님을 믿어 구원 받게 하는데 힘씁니다. 전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사랑의 책임을 태만히 하는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고난 주일에만 주님의 고난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속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속죄와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과 같은 복스럽고 영광스러운 은혜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보면, 구원을 천국행 열차표를 끊어놓은 것처럼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제 구원은 받아 놓았으니 되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되겠구나, 그럽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를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주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만 보장을 받습니다. 이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 진액을 공급받아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날로 더 생생하게 마음속에 되새김으로써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성도님들의 삶속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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