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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시 1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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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시 118:24)

(시 118:24)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피카소의 작품 가운데 '황소몰이'라고 하는 걸작이 있다고 합니다. 값어치로 치면 딱히 얼마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값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소재는 그가 쓰레기 처리장에서 주워온 다 낡아빠진 자전거인데 그것을 소재로 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내버린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자전거이지마는 피카소의 눈에 띄었을 때, 피카소의 손에 들려졌을 때에 엄청난 값의 작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쓸모없이 여김을 받던 자가 영광을 얻게 되었다는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시인은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과 같은 여호와의 행하신 구원 역사가 인간의 눈에 기이한 바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초자연성을 강조한 것이며 이러한 기이함은 찬양의 주제가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구원의 날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음을 밝히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자고 노래합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부적합 하다는 판정을 받은 돌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모퉁이 돌로서 합당하게 변화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버린 돌', '머릿돌'등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으며, 이는 예수께서 직접 자신을 증거 하는 데 인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고 하십니다.

사도들로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오실 메시야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건축자의 버린 돌이라고 말씀 하실까요? 예수님의 배척과 모함과 관계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1-3)고 합니다.

그런데 버린 돌처럼 낮고 천한 자리에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은 인류의 구원을 이루는 모퉁이 돌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씀 하시며 멸망의 자식이며 죄의 포로라고 말씀합니다. 그랬던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는데 이 놀라운 질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8-9)하시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 하므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시며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막12:1-12) 포도원 비유에서 주인은 포도원을 정성스럽게 아름다운 포도원을 만들고 이제는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막12:2-5절). 

주인은, 추수 때가 되어 세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첫째 종은 "잡아 심히 때렸습니다."(막12:3). 둘째 종은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습니다." (막12:4). 셋째 종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막12:5). 넷째 종은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막12:5).  

그러자 마지막으로 주인은 "저희가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아들"을 보내는데 그 아들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막12:6). 지난날의 실망을 잊고, 최후로 아들을 보내는 것은 주인 곧 아버지의  최후 대책입니다. 다른 종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아들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의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 던졌느니라."(막12:7)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잠깐 숨을 돌리시면서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 합니다.(막12:9). 마태에  따르면,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마 21:41) 한 것으로 말합니다.

주인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고 생각하나, 소작인들은 "유산이 우리의 것이  되라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주인이 너무 어리석은 것 같기도 합니다.(고전1:25) 그런데 이 어리석어 보이는 주인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눈에 어리석어 보이나 구약의 배경에서 보면,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반응을 바랍니다. 이 비유에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고, 사랑과 성실이 많은 분"으로 묘사합니다.(출 34:6).

예수께서는 갑자기 이 비유를 결론 맺으면서,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막 12:10-11)고 묻습니다. 아주 엉뚱한 것 같습니다.

왜  갑자기  버림받은 돌에 대해 말씀하실까요? 히브리어에서 "돌" 에벤(eben)은 "아들" 하벤(ha-ben)과 거의 소리가  같습니다. 구약과 당시 랍비들의 문헌에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돌들"로 그려집니다, (출 28:9-10; 39:6,  7, 14; 애  4:1-2; 수4:6-7; 슥 9:16; 마 3:9).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버려진 돌"이 "버려진 아들"과 동일시되었습니다.
또한 당대 유대 지도자들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메시아를 가리킨다고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 시로 다윗은 구속자의  모형입니다. 다윗은 막내였지만, 선택되어 불레셋에서 이스라엘을 건집니다. 사무엘과 다윗 가문과 골리앗과 사울과 다른 사람들이 그를 몰라보았고 외면하였고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선택되었습니다. 그가 유대 나라를  완성시킨 자입니다.

마가는 버림받은 돌의 비유를 첨가함으로써, 명백하게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을 말해줍니다.
역설적으로 예수는 새  성전의 모퉁이 돌입니다. 이 성전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막 14:58)합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점은 주님 자신이 참된 이스라엘의 대표라는 것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대표들이 아니라, 그가 버림받고 세움 받을 참 돌임을 밝혔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는 '돌'로 상징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이 '돌'을 '시온의 기초 돌로 표현했습니다.(사 28:16)  
다니엘은 '손대지 아니한 돌 '로 표현했습니다. 
개정역은 뜨인 돌이라고 하였습니다.(단 2:45) 

이 '돌'은 시온을 중심으로 하여 메시아에 의하여 세워질 영적 교회의 기초 돌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이 '돌'은 '건축자' 즉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22절)인 그리스도를 버린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실 때에 이 '건축자'를 예루살렘 공회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지칭했습니다.(마 21:23,45)  

그런데 예수 이후 모든 종교(우상) 지도자들이 예수를 버렸으며, 모든 인본주의자들, 무신론자들, 합리주의자들이 다 이 예수를 버렸습니다. 이들 모두는 '종교의 집' 또는 '문화의 집', '정치의 집'을 짓는 '건축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버림받은 돌은 그들에게, 즉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거친 돌', '걸리는 반석', '함정', '올무'가 됩니다.(사 8:14)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된다고 하셨습니다.(롬9:33,벧전2:8)  그들에게 있어서 이 '돌'은 그들을 깨어 가루로 만드는 돌이 됩니다.(마 21:44,눅 20:18 '심판의 돌'이 되는 것입니다.(단 2:34)

사실 주님은 철저하게 버림받았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자기 백성들은 지속적으로 그를 거부했습니다. 그가 참 메시아라는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기적과 놀라운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이 그를  버렸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도 그를 버렸습니다. 백성들 뿐 아니라, 지도자들이 그를 버렸습니다. 그들은 건축자들이었습니다. 영적 건축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공한 자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무식한 무리들이 버린 것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인  제사장, 사두개인과 빌라도가 버렸습니다.

그 버림은 또한 격렬했습니다. "그는 메시아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온갖 모욕을 다 퍼부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버림이었고 거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높아졌습니다. 높아져 가장 존귀한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모든 돌을 잇는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모든 돌들이 그를 통해 이어집니다. 머릿돌이 없는 건축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잇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벽과 이방인의 벽을  다 잇습니다. 남자와 여자, 헬라인과 유대인, 종과 주인을 하나로 잇습니다. 또한 하늘과 땅을 잇고, 시간과 영원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모퉁이돌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거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슥 3:9)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돌'로 '보내심을 받은' 자(요 6:29)이시며 아버지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인치신 자'(요 6:27)이시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버리기 위해 오신 분(막 10:45.요 10:15)시며 성령에 의하여 지금도 증거 되시는 분(요 15:26)이십니다.

이와 같은 삼위 하나님의 섭리는 실제적으로 유대의 종교와, 희랍의 문화와 로마의 정치 세력을 통하여 '버린 돌'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모퉁잇돌로 정하심에 있어서 행하신 방법은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놀랍다 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3)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막 12:11)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 처녀 탄생, 수욕의 생애, 십자가의 대속, 그리고 부활, 이 모든 일들은 하나같이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놀라운 사건들 이후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 즉 많은 군왕, 귀족, 정치가, 철학자, 과학자,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이 예수를 영원한 교회의 '머릿돌'임을 믿게 된 사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0-12)고 합니다.
  
아마 예수께서 처음 이 비유를 말씀했을 때, 베드로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말씀을 계속 붙잡고 생각했을 것으로 이해합니다. 베드로는 여러 중요한 사건들과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예수께서 버림받고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크신 계획 속에서 모통이 돌이 되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사, 그를 모퉁이 돌로 세웠음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막강한 재판관들인 안나와 가야바,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 가문이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했다고 감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전의 베드로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이 다시 그를 위협하고, 아무에게도 다시는 예수에 대해 말하지 말라 할  때에도 "저는 제게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부활 전에 베드로는 두려움에  자주 빠졌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베드로는 도망쳤습니다. 부활 후에 그는 용기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큰 능력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견고한 신자로서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위협과 투옥도 그가 예수를 증거 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는 자기 나라의 건축자들이 멸시하고 버렸지만, 이 세상의 사회  구조의 확실한 기초로 나타났음을 그는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모퉁이 돌"임을 깊이 붙듭니다.

이 돌은 "항구성"을 뜻합니다. 이 후에 베드로는 그의 첫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산  돌"이시며  우리도 "산  돌"이  되어야한다고  권면합니다(벧전 2:4-8)
  
베드로는 예수를 "산 돌"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돌이 "산 것"이 될 수 있는가요?
베드로는 "산 것"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부활하사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합니다. 그는 "산  말씀"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살아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돌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 성경에서 "돌"은 무생물이며 하나님(행 17:29), 아브라함의  아들들(마 3:9; 눅 3:9) 혹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눅 19:40)과 대조를 이룹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산 돌" 이라고 말할 때, 그는 참 하나님임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산 소망," "살아 계신 하나님," "살아 있는  말씀," "산 돌"을 통해 당대  이방종교의 절망과 우상과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산돌"입니다. 이 돌에게 나아와야 합니다. 이 돌은 "산 돌"일 뿐 아니라, "생명을 주는 돌"이십니다. 우리가 산돌이신 그리스도와 이어질 때, 생명을 얻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교회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퉁이돌이 되신 날은 부활의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 118:24)합니다.

'이날'은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22절) 날입니다. 이날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놀라운 구원의 날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고전 15:23)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로서 앞으로 부활한 성도들로 이루어질 영원한 교회의 '산 돌'이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고 합니다.

'부활의 날'은 십자가로 구약의 구속 사역을 완수하고 무덤에서 안식한 구약의 안식일(토요일)을 '주의 날'로 바꾼 영원히 안식하는 날입니다. 이날은 인간의 역사가 바뀐 날이며, 생명의 의미가 바뀐 날이며, 모든 가치관이 바뀐 구원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24절)라고 합니다.

이 부활의 날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의 날이며, 영원한 안식의 날입니다. 안식의 날은 시간과 영원이 만나는 날이며,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날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로 되는 날이며, 기쁨과 찬양의 날이며 모든 생명이 '구원'을 받고 '형통'하는 날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시 118:25)합니다.

캐롤 버리스라는 주부는 근육무력증에 걸립니다. 이 무서운 병은 온 몸에서 점점 근육이 무력해져서 죽게 되는 병이라 합니다. 그는 40대 초반에 6명의 자녀를 두고 변호사 사무실의 비서로 일하면서 무용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삶은 충만하고 풍요했으나 이제는 그녀의 모습은 끔찍하게 변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모두 빠지고 스테로이드 과다투여로 얼굴과 몸 전체가 부어 있었습니다. 마치 낡은 담요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자존심을 버린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모두들 기도를 하지만 마음속으로 '오래 살지 못할텐데'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읽으면서 그녀는 더욱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심장이나 호흡 장애가 일어날 때마다 그대로 죽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짐이 된 느낌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데 부활절에 성가대원들이 그녀의 집에 몰려 왔고 그들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통성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그녀는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참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병을 위해서 그리고 살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간 다음, 다시 그녀는 원상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시 무력해지면서 비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음속에 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나도 그렇게 기도했는데 그것은 다 무엇인가? 그냥 헛것인가? 내가 신자로 그렇게 믿어야 하겠는가? '왜 백부장처럼 하지 않느냐? 기도를 하고 말씀을 받았으면 믿어야지'  

그래서 우선 자리에 누워있지 말아야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일어나서 움직이기는 너무 힘이 들었으나 거기서 물러 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꾸만 마음속에 들어오는 자멸감의 어두운 그림자를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남편, 자식, 친구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사람들의 기도와 자신의 기도를 믿으면 그만큼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비록 몸이 불편하고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라고 남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풀지 못할 것은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세상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담을 쌓은 것은 자신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차츰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병 때문에 어둠에 빠진 다른 이들을 방문했습니다. 휠체어에 앉은 채 집이나 요양원이나 병원의 환자를 찾아 용기를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전에 모르던 새로운 영역이 열립니다. '내 생명이 꺼질 때까지 사랑하고 생명을 나누리라'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차츰 몸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다시 글을 쓰고 연단에서 강의를 하고 50중반의 몸으로 교회 사무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용 강습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병은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오히려 비전속에 전보다 더욱 건강한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알았다. 기도를 사용하련다. 마치 은행에 맡긴 돈을 찾아 쓰듯, 하나님께 드린 그 수많은 기도의 말을 나는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제인가 다시 오더라도 나는 상처받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내 생명의 마지막 촛불을 사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에게 주신 승리의 날이며 악의 세력에게는 멸망의 날이기에 성도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빛된 사명을 감당 할 수밖에 없는 날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믿음은 건축들의 버린 돌과 같은 심령을 모퉁이 돌이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줄 믿습니다. 이 사실 믿고 새 생명으로 거듭난 기쁨과 감격 속에 학습 유아 세레 입교 세례 예식에 동참하는 모두가 되고 이 은혜에 감사하며 헌신 하며 봉사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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