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믿으면 보리라 (요 11:23-27, 38-44)

첨부 1


믿으면 보리라 (요 11:23-27, 38-44)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로 합니다. 죽음이 있어야만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사함을 얻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고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구약을 통하여 계시된 것이요,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지라도 이 복음이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하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부활과 관련된 한 스토리를 요한복음을 통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이 일곱 번 나오는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이 마지막으로 나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뿐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고합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동안 열두 제자 외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각별한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할 때에도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며 전갈을 보낼 정도였습니다. 평소부터 예수님과 각별한 사이였기에 나사로가 병이 들자 마리아와 마르다는 지체 없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으셨으면서도 베뢰아에서 오히려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3절)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은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하십니다. 5절을 보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체하시는 것도 이들에 대한 주님의 독특한 사랑의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제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사로의 집에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한다(15절)고 하였는데 이는 예수님이 나사로와 함께 있어서 죽지 않게 하는 것보다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그를 살리시는 것이 제자들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믿음을 심어주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믿는다’는 단어가 7번 나오면서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위독한 것을 아시면서도 바로 달려가지 않고 도리어 그가 확실히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믿음을 제대로 갖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공간적인 제한을 받기 때문입니다

졸지에 오빠를 잃어버린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사람을 보냈는데도 평소에 자기들을 사랑해 주시던 예수님이 오시지 않은 것에 대하여 아쉬움과 섭섭함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마르다는 곧바로 동구 밖까지 나가 슬픔과 섭섭함을 표현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주님이 안 계셨으니 문제가 생겼다는 겁니다. 주님은 이미 여섯 번의 표적을 통해 당신이 누구인지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주님이 곁에 계셔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고난의 현장에 함께 있지 않으시고도 문제를 해결하신 적이 많습니다. 가버나움에 있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가나에서 고치셨습니다. 죽어가는 백부장의 하인에게 가시지 않고도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함께 계시지 않으면 능력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 아닙니다. 주어진 공간 안에서만 주님을 이해하려는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 시간적인 제한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틀 더 머무신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왔을 때는 그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지 삼일 동안은 영혼이 시체 곁을 떠나지 않고 돌아다니며 다시 육체로 돌아갈 기회를 찾다가 나흘째가 되어 시체가 부패하게 되면 영혼은 그 시체 곁을 아주 떠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흘이 지났다는 것은 나사로는 분명히 죽었고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시신이 있는 무덤으로 가서 무덤 문을 막고 있는 돌을 옮기라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니 벌써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 먼저 직면하는 현실이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흘이 지난다고 주님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믿음으로 무덤의 돌을 옮겨야 할 때라고 하십니다. 

3) 교리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마르다에게‘부활의 교리’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실제’를 보여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마르다는 이 말씀 속에 있는 부활의 현실성을 깨닫지 못하고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믿나이다”(24절) 라고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을 부활의 교리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랍비들도 부활의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구약을 보면 부활에 대하여 언급한 구절들이 여럿 있습니다. 

욥 19:26, “내 육체의 가죽이 썩은 후에는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며” 

시 16:10, “주께서 나를 무덤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주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 교리만을 붙든다고 우리의 삶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리가 우리의 삶에 실제화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어떻게 마르다의 믿음을 키우십니까?

1)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3절) 

나사로의 죽음은 그의 누이동생들과 그것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슬픔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 속수무책이었고 안타까움 속에 울부짖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을 알고 있으니 이 상황에서 자기를 위하여 무엇인가 하나님께 구하라고 부탁을 합니다. 

마르다가 아는 지식으로는 죽은 자들이 이 세상 마지막 때에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 말고 지금 당장 무엇인가 해서 자기를 위로해 달라고 합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자기가 본 것 이상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주님은 나의 생각/방법/경험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내 생각이나 경험 속에 제한시키지 말고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임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2) “네가 믿느냐” (26절)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절) 

부활을 먼저 언급하셨고, 다음으로 생명을 언급하셨습니다. 부활한 다음에 부활의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날에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그리고 ‘영원히’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이 부활과 생명을 위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영생이기에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생명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들은 예수님과 연합한 자이기에 몸은 죽음을 경험할지라도 영혼은 그 순간부터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한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마르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마르다도 생명을 주관하시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대화를 통하여 그의 믿음의 눈이 열려집니다. 

마르다가 아는 신앙에서 믿는 신앙으로 변화를 경험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육신의 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죽음은 그저 상태의 변화일 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부활을 경험하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생, 즉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가지는 삶을 가지게 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영벌, 즉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영원한 고통을 가지는 심판을 받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네가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물음은 죽고 난 다음에 천국을 가는 것이나 이 세상 마지막 날에 부활하는 것을 믿는 정도의 교리적인 차원에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이 지금도 나타남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3) “돌을 옮겨 놓으라” (39절) 

나사로의 시신이 있는 무덤으로 가서 무덤 문을 막고 있는 돌을 옮기라고 명령합니다. 누구보다도 나사로가 살아나기를 원했으나 주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보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그는 확실히 죽었고 다시 살 가망이 없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그의 마음을 지배하니까 돌을 굴리기를 주저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난다는 상황 보고보다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4)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40절) 

그동안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나 그 기적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전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행하는 기적은 그저 신기한 것이요, 호기심을 자극할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런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하였지만 그 믿음이 아직 연약한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며 재차 그녀의 믿음에 도전을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돌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순종하고 옮겨놓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나사로를 일으키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 예수님은 나사로가 누워있는 무덤을 향하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주의 권세를 가지고 ‘나사로야 나오라’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당장 나오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중에 여러 번 큰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주님의 큰 소리에는 항상 어두움의 권세를 꾸짖는 주님의 신적인 권위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 1:25)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 

주님의 외침은 사망의 큰 권세 앞에서 절망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는 함성입니다. 그 생명의 말씀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가자 죽은 나사로의 몸에 생명이 임하였고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주님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44절)고 하십니다. 

묶여 있으면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자유를 얻어야 온전한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어 살리는 부활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역사적 현장에서 일어났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이 사건은 단순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셨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나사로의 다시 살리신 것과 예수의 다시 살아나신 것은 차원이 틀립니다. 

나사로는 살았지만 그는 다시 죽었습니다. 진정한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고전 15:20; 롬 6:9)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보이십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과 같이 누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여 그 놀라운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삶 속에서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주님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심과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라고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실제로 행하시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줍니다. 주어진 암담한 현실을 인하여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고통이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시 88:14)하며 탄식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공간과 시간 안에 “안 계시는 같이 느껴지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며 심지어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하지만, 믿음이 있는 성도는 오히려 고통 속에서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더 깊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머무시던 곳에서 의도적으로 이틀 간 더 머무시며,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으로 바로 가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병을 고치시는 주님’을 넘어서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님’을 보는 더 큰 영광을 맛봅니다. 주님은 오늘도 사랑하는 백성을 죽음으로 내몬 죄악 된 세상과 사탄을 향하여 분노하시며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말없이 깊은 사랑의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 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과 어두움과 죽음의 권세를 향해 분노하시면서 그 세력을 공격하시는 분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 말들은 죽음은 절망이요 끝이라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인간의 절망과 한계 속에서도 일하는 분입니다. 불가능의 상황에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와 죽은 나사로를 볼 때, 인간적으로는 나사로의 문제가 더 심각한 것 같지만 주님에게는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 속에 제한시키지 말고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임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표현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돌을 옮겨놓는 믿음이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돌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순종하고 옮겨놓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2) 주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당장 나사로를 살리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41-42). 

예수님은 아직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신 것으로 믿고 오히려 승리를 확신하며 미리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은 그 동안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지금도 듣고 계신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 주변에 있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하는 기도의 내용을 듣고 왜 이런 기적을 행하는지 이유를 듣습니다. 주께서 공개적으로 기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2절) 

제자들로 하여금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목적은 그 문제 해결자체보다 그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 문제의 근본을 해결해주시는 분입니다. 고통과 환난의 때에 불평과 원망보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5,16).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렘 33:3)

‘주의 사랑하시는 자’도 병이 들 수 있습니다. 때로 주님의 손길이 너무 먼 것 같아 안타까움 속에 원망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함으로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는 절망적인 상황이 없습니다. 문제가 절망적일수록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은 더욱 빛을 발할 기회가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요구하시는 때에 움직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드러낼 수 있는 때에 움직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고난을 통하여 그분의 능력과 사랑의 영광을 체험하며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닥친 일이 때로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주님의 섭리 속에서 영광 받으실 주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네가 믿느냐”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도전의 말씀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찾아오셔서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고 고통의 멍에를 함께 져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선하게 인도하십니다. 고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함으로 주님께 나아가면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을 본받아 연약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그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랑의 사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같이 주님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시던 새벽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과 같이 자기들이 경험한 주님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절에 함께 한 모든 성도들에게 주님의 부활과 생명의 능력이 풍성하게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