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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은 곧 회복입니다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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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곧 회복입니다 (마 28:1-10)

욕망에는 버려야할 욕망이 있고 가져야할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가지는 욕망가운데 가장 절실하고 가장 진실한 욕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생명에로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즉, 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사실 세상 어느 누구도 살고 싶은 욕망이 죽고 싶은 욕망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말을 잘합니다. “내가 죽어야지!” 혹은 연세 드신 어른들이 “늙으면 죽어야 해” 합니다. 그런데요 이 말이 정말 죽고 싶다는 말이 아닙니다. 누가 한번 옆에서 “그러면 죽으세요.” 해보세요. 큰일 납니다. 할머니가 하도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하니까 손자가 밥풀에다가 밀가루를 묻혀 가지고 “할머니 이거 죽는 약인데 드세요.” 하고 드렸더니 그 날부터 할머니가 한 달 동안 손자하고 말을 안 하더랍니다. 보세요. “죽고 싶다” 는 말은 “살고 싶다” 는 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이 생명에로의 욕망, 살고자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무서울 정도로 강한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봅시다.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남을 죽인다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입니까? 남을 죽여서 자기가 사는 욕망을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인간적인 얘기냐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사람이 나옵니다. 가야바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원흉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 할 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면서 빌라도만 못된 사람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사실 이 가야바가 더 나쁜 사람입니다. 이 가야바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 하는 도다”(요 11:50) 

한 사람을 죽여서 모두가 편안할 수 있다면 죽이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나 죽이는 게 무슨 문제냐, 편안한 게 문제지, 내 욕망을 위해서라면 몇 사람을 죽인다 한들 무슨 대단한 문제가 되겠느냐는 식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을만한 죄를 지었더라도 생명에 관한 문제를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죄도 없는 예수님을 이렇게 하찮은 목숨으로 몰아가고 있는 사람이 가야바입니다. 

생명의 문제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엄청난 충격과 깨달음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적어도 생명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문제라는 것을 인류에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부활 사건입니다. 
죽음의 문제란 곧 생명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신비로운 사건이 부활사건입니다. 죽음으로써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가진 것, 누리는 것, 무엇이든지 죽음과 함께 다 없어집니다. 그 많은 소유나 피나는 노력도 죽음 앞에 무력합니다. 죽음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덱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지 않겠다는, 혹은 죽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인생은 불행하다.” 안 죽겠다, 못 죽겠다는 것으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혹은 나대신 다른 사람을 죽여가면서라도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더 더욱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죽어서 죽음 너머의 부활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죽음이란 피해야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변화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11:25-26) 

장수의 문제를 말씀하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부귀영화의 문제도 아닙니다. 누구를 죽이고 죽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 곧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죽지 않으려고, 죽음을 피하려고 쌓아가는 욕망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압니다. 오히려 죽음 너머의 소망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은 잊고 살았던 우리들의 신앙에 대한 회복을 상기시켜 줍니다. 부활은 곧 회복입니다. 죽었던 것들이 새 생명을 입는 것과 동시에 침체되었던 것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무덤의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이 없는 듯 무덤 속에 파묻혀 그렇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과 소망과 생기로 꿈틀거리는 종교입니다. 무덤 속에 묻힌 모든 것을 파내어야 합니다. 죽어버린 신앙, 묻혀 버린 열심, 깨져 버린 관계들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이 있기 전에는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신뢰와 사랑의 관계는 깨어져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했고, 가룟 유다는 돈 몇 푼 때문에 예수님을 팔기까지 했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이러한 관계를 일순간에 회복시켰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신 약속입니다. 

마26:32에 보면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다 알고 계셨지만 관계회복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배신하고, 팔아먹고, 도망하여 나와의 관계를 깨트려 놓더라도 내가 그 관계를 회복하마.” 라는 깊은 사랑의 의미가 이 부활사건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실제적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깨트린 관계지만 주님께서 먼저 회복시키시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주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에 금이 가는 행동을 하며 삽니까? 베드로처럼 내게 불리할 땐 예수 믿지 않는 사람처럼 얼른 가면을 바꾸어 쓰기도 하고, 물질 때문에, 욕심 때문에 신앙의 중심을 팔아먹고 때로는 주님을 내 거래의 수단처럼 여기는 가룟 유다의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까? 

때로는 귀찮고 내 삶에 작은 어려움이 닥칠 때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치는 제자들처럼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이 모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우리 쪽에서 깨트린 관계, 우리가 허물어 버리고 어찌할 수 없어서 무덤 속에 꼭꼭 숨겨두고 살았던 죄와 게으름과 악함과 부끄러움을 끄집어내어 회복시키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모든 불 신앙적인 생각과 행위가 죽어 없어지고 새로이 부활해야 합니다. 회복되어야 합니다. 죄로 찌들어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이 부활주일에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이 주는 메시지는 “회복” 입니다. 관계회복, 사명회복, 그리고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회복되는 부활절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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